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88화 (88/100)

-외전 9-

“……진짜. 꼴값 떨고 있네. 사랑이 뭐라고. 너 같은 걸 애초에 마탑을 들인 내가 미친놈이지.”

“…….”

“마탑에서 나가. 마법도 못 쓰는 새끼를 마탑에 들여보내 줄 수는 없지.”

아리안은 이후에야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때 제일 힘들었던 건 벨라프였을 텐데.

수백 년을 살아왔으면서 왜 아직도 충동적인 감정 하나 이기지 못해 그런 말을 했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나부터 좀 변해 볼걸.

“……짐. 짐만 가지고 갈게. 마탑에 있는 마법사들한테 인사도 해야 하고…….”

아리안은 더 듣지 않고 마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그녀를 보고 카일이 화색을 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아리안. 벨라프는 찾았어요?”

아리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카일은 다행이라며 화색을 표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다행인가. 글쎄, 다행일까. 나한테는 마법이 곧 인생이었는데. 아마 벨라프도 그랬겠지.

차라리 찾지 말걸 그랬나. 아니, 그랬더라면 죽은 줄로만 알았겠지. 아마 그쪽이 더 슬펐을 테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이별이 항상 더 슬픈 법이니.

마법을 잃었는데도 그런 짓을 벌인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할 수가 있지. 처음 마탑에 찾아왔을 때는 인생의 모든 순간을 마법에 투자할 것처럼 말했으면서. 사랑, 하여간 그놈의 사랑…….

“그나저나 벨라프는 어디 있어요? 같이 안 왔어요?”

“카일. 마탑의 문을 열어 놔.”

카일은 그녀의 명령 같은 지시에도 큰 의문을 가지지 않고 순순히 문을 열었다. 벨라프는 마법을 잃었기 때문에 마탑까지 오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벨라프?”

돌아온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카일이었다. 그는 벨라프가 돌아오자마자 충동적으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아, 미안. 기분 나빴나.”

그러다가도 얼른 몸을 떼어 내고 물었으나 벨라프는 괜찮다는 듯이 카일의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야, 너 비에 젖은 것 좀 봐. 잠깐만. 너 설마 마법 안 쓰고 1층부터 여기까지 걸어서 올라온 거야? 엄청 힘들었겠다.”

“걸어 올라왔다고?”

그때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릴?”

“왜? 마법을 쓰면 되잖아.”

질문에 묘하게 가시가 돋아 있었다. 과연 저 질문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가? 카일이 보기에는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메릴과 눈싸움을 하듯 시선을 맞추던 벨라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마법을 쓸 수 없어. 그러니 이곳을 떠날 거야.”

순간 공간에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그 침묵을 깬 쪽은 메릴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데?”

“메릴, 그만해.”

“그만하라니, 뭘? 나는 그냥 궁금한 걸 묻고 있는 것뿐이야.”

더 이상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는 아리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리안. 당신이 대신 설명해 줘. 단, 메릴에게만.”

“…….”

벨라프는 간단하게 짐을 쌌다. 챙길 것은 편한 옷가지 몇 벌뿐이었고 그가 연구를 진행하며 수집한 자료들은 전부 마탑에 남겨 뒀다.

그는 떠나기 직전 마법사들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무뚝뚝한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나 아무도 이에 대해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안녕, 카일. 그리고 메릴.”

벨라프의 시선이 마법사들의 얼굴 위에 하나하나 머무르다가 마지막으로 아리안에게 머물렀다. 그는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아리안.”

***

“다른 세계라니. 벨라프가 마탑에서 내쫓기는 걸 보지 않았더라면 허황된 이야기라고 믿었을 거예요.”

“내쫓기다니.”

“아리안한테 내쫓긴 거 맞지 않아요? 마법을 그렇게도 좋아했던 놈인데 스스로 마탑에서 나가겠다고 했을 리는 없고.”

……마법을 그렇게도 좋아했다고. 자신은 벨라프가 마법보다 사랑을 우선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메릴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신기하기는 하네요. 벨라프도 넘어갔을 정도면 그 향이 대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

“아리안,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메릴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평소 제2의 벨라프라고 불릴 정도로 표정이 없던 그녀가 어쩐지 신나 보였다.

“이쪽 세상이랑 벨라프가 말하는 다른 세상이랑 연결해 보는 거.”

“뭐?”

“솔직히 아리안도 궁금하지 않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말고도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하잖아요. 왜, 저희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미친 듯이 연구만 해서 새로운 마법 만들어내는 거.”

메릴의 말에 잠시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곧 벨라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세상에서 온 이들에게서는 향이 난다고.

그 향을 없애기 위해 벨라프가 마법을 잃어야만 했다. 그걸 알면서도 이쪽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해 보자고?

“웃기지 마. 그렇게 하고 싶으면 혼자 하든가.”

“설마 혼자 하겠어요? 하자고 하면 자기도 하겠다고 손 번쩍 들 마법사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메릴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빙긋 웃었다. 그녀가 마탑에 들어온 이래로 처음으로 보는 메릴의 미소였다.

***

메릴의 연구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알려졌다. 그들이 그녀의 연구에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새로운 세상. 연구와 마법에 미쳐 있는 마법사들에게 얼마나 매혹적으로 들리겠는가.

연구에 참여하지 않는 마법사는 아리안과 카일뿐이었다. 메릴도 자신의 제안이 두세 번 정도 거절당하자 더 이상 함께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리안은 카일을 데리고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망할 마법사 놈들이 마탑주 말도 안 듣는다고, 꼴도 보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카일은 그냥 희생양일 뿐이었다.

술집에서 연거푸 술을 들이키던 아리안이 탁자 위에 엎어져 몸을 바르작거렸다. 긴 팔다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퍽 우스웠으나, 이미 술에 찌들어 이성을 잃은 카일에게는 웃을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아리안이 아무렇게나 휘두르던 팔에 이마를 얻어맞은 후에는 자연히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벌건 얼굴을 하고는 아리안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에 비해 아리안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주제에 겉보기에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것처럼 멀쩡해 보였다.

“야.”

아리안이 껄렁하게 카일을 불렀다. 비위를 맞춰 주지 않으면 마치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라도 걸 듯한 투였기에 카일은 얼른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

“말씀하세요.”

“넌 왜 메릴이랑 같이 연구 안 했냐.”

“그냥…… 뭔가 찜찜해서요.”

“찜찜해? 뭐가.”

“좀 그렇잖아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찜찜하고, 그 세계랑 이쪽 세계를 연결한다는 건 더 찜찜하고. ……게다가 벨라프가 그것 때문에 마탑에서 떠났는데.”

아리안은 카일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벨라프를 쫓아낸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이 착한 놈이라도 자신의 멱살을 잡을 게 분명했다.

주제를 돌려야 할 것 같은데. 카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몸싸움이 일어나 난장판이 된 도박판이었다.

아리안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먼지 낀 금화 다섯 닢을 꺼냈다. 메릴이 꼴 보기 싫어 마탑에서 뛰쳐나올 때 마탑 여기저기를 탈탈 털어 찾았던 것이었다.

불안한 눈빛을 하고서 아리안을 쭉 주시하던 카일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아리안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악! 미쳤어요?! 그건 우리 생활비라고요!”

“카일. 걱정 마. 내가 이길 수밖에 없으니까.”

비틀거리며 도박판으로 걸어가면서도 얼마나 뻔뻔하고 당당하게 말을 하던지. 카일은 멍하니 아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길 수밖에 없다니. 대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잠시 후 아리안은 정말 품에 가득 돈을 안고 카일이 앉아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카일은 물을 마시다 말고 입에 머금고 있던 것을 주르륵 뱉어 냈다.

“봐.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다고 했잖냐.”

“어떻게…… 어떻게 한 거예요? 아리안이 저 도박광들을 이겼을 리가 없는데.”

“마법의 힘을 좀 빌렸지. 투시 마법.”

“결국 사기 쳤다는 거네요.”

“사기가 아니라 재능이지.”

말은 참 번지르르하게도 하시네.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쯧쯧 혀를 차다가도 아리안이 용돈 좀 주겠다며 돈을 허공에 뿌리자 재빨리 바닥을 기며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아리안은 낄낄 하고 소리 내어 웃은 후 다시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벌써 시간이 늦었는데……. 카일이 손가락으로 조심히 아리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죠.”

“가긴 뭘 가. 잠도 여기서 자고 갈 건데. 너도 여기서 자고 가라.”

“제발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머릿속에서 검토를 거치고 뱉으란 말이에요.”

“충분히 검토했어.”

“충분히 검토하긴 뭘 해요!”

“…….”

“아리안? 지금 자는 척하는 거죠?”

“…….”

하여간 말이 안 통한다니까. 아무리 말을 걸어도 침묵으로 응하니 대화가 이어질 수 있을 리가. 결국 카일은 살살 달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 아리안이 키는 크지만 정신 연령은 조금 어릴 수 있으니까.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메릴이 그 연구를 끝낼 때까지? 아니면 메릴이 늙어서 그 연구를 중단해야 할 때까지.”

“머리 울린다. 시끄러워.”

“쫓아낼 수도 없잖아요. 쫓아낸다고 해서 순순히 나갈 애들도 아니지만.”

“…….”

“……?”

그는 자신이 ‘쫓아낼 수도 없잖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아리안의 표정이 오묘해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나?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안을 쳐다봤다. 아리안이 주정을 부리며 네가 맨날 짓는 그 표정 짜증난다고 지적을 했으나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너 그러다가 눈 그 상태로 고정되는 수가 있어.”

“숨기는 거나 빨리 말해 봐요. 뭐 있죠. 뭐 있는 거죠?”

평소에는 바보 같은 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치가 빨라. 아리안은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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