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
“그나저나 네 구식 고백을 받아 줄 사람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옆에서 듣는 내가 다 짜증이 나더라니까. 걔가 네 뺨을 갈기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걸 보고 있었어?”
“그래, 내가 제일 아끼는 제자가 고백을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잖아. 레비아, 아니 르비아였나? 소심한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래.”
벨라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당신이 그녀에 대해 무얼 알아 그렇게 말하냐고 길길이 날뛸 녀석이 웬일이람.
“그래, 뭐. 어쨌든. 잘해 봐.”
잘해 보라는 말에 벨라프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리안은 푹 숙인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좋은가.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 르비아를 만나러 외출했던 벨라프가 돌아왔다.
“벨라프? 너 나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 헉.”
벨라프는 울고 있었다. 가장 먼저 그의 우는 얼굴을 본 카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침대에 누워 태평하게 책을 읽던 아리안도 그를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메릴마저도 하던 일을 멈추고 벨라프를 쳐다봤다. 카일은 ‘쟤 눈에서 흐르는 거 빗물 맞지? 밖에 비가 오나?’ 따위의 헛소리를 하며 창문을 열어 보기도 했다.
벨라프는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거칠게 눈을 문질러 닦으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아리안이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맙소사, 메릴. 제발 내가 잘못 본 거라고 해 줘.”
“그렇지 않아도 제가 방금 카일 허벅지 꼬집어 봤는데 아프다고 꽥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지금 보고 있는 게 꿈은 아닌 모양이에요.”
“설마 헤어졌나. 그, 있잖아. 누구였지. 레비아?”
“르비아요.”
“아, 그래. 맞아. 르비아. 그렇게 좋아 죽더니 헤어진 건가?”
“글쎄요. 카일. 네가 한번 가서 물어보고 와.”
메릴이 카일을 벨라프가 있는 쪽으로 밀자 카일이 기겁했다. 카일은 손까지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메릴, 아리안. 당신들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건 알지만 이건 좀 아니에요. 저럴 때는 그냥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요.”
“공감 능력이 부족하긴 누가 부족하다는 거야.”
“누구긴요. 그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아리안이죠.”
“카일.”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메릴의 목소리를 듣고 카일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메릴이 계략을 꾸미는 참모처럼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 위에는 카일이 평소에 예뻐하던 흰색의 토끼가 올려져 있었다. 이 잔인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결국 카일은 땅이 꺼질 듯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벨라프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카일은 아리안과 메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날아오는 물건에 얻어맞으며 도망쳐 나왔다.
“아으. 봐요, 제가 가만히 놔두자고 했잖아요!”
“역시 헤어졌나 봐요.”
메릴과 담담하게 말하자 카일이 그 모습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아리안이나 메릴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여간 저 인간들은 왜 저렇게 공감 능력이 부족한 건지.
그 후로 벨라프는 종일 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카일은 배도 고프지 않냐고 타박을 줬고, 굳이 식사를 할 필요가 없어 채소로 식사를 때우는 아리안조차 그에게 질려 끌끌 혀를 찼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된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벨라프가.”
“실연의 슬픔이 큰가 보지, 뭐. 하기야 애초에 저 더러운 성격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어.”
“메릴.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날카로운 말을 하는 게 문제야.”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왜 나한테 잔소리야.”
“하여간 너나 아리안이나 공간 능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
“뭐 새삼. 쟤가 울어도 해야 할 연구가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연구나 하자고.”
***
“벨라프. 벨라프 어딨어? 그놈한테 맡겨야 하는 거 있는데.”
아리안의 물음에 책상에 엎드려서 자던 카일이 부스스 침을 흘리며 일어났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방에서 안 나왔어요.”
“아직도? 얘 식사는 하고 있는 거야?”
“나온 적이 없는데 식사를 할 수 있을 리가요. 근데 혹시 모르죠. 새벽에 은밀하게 빵 훔쳐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을지.”
“지금 장난할 때야?”
“……저도 진지하게 말했는데.”
사람이 식사는 꼬박꼬박 해야 하는데……. 결국 그들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을 열었을 때 쏟아질 벨라프의 분노에 대해 절반씩 책임을 지기로 합의한 후 문을 열었다. 물론 자신들의 신체적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마법을 이용해서.
“여, 열게요.”
“하나, 둘, 셋 하면 열어.”
“으……, 네.”
“하나, 둘…….”
셋을 외치는 아리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카일은 문고리와 연결된 마력의 흐름을 뒤틀어 문을 열었다. 끼이,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낡은 나무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이 열려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었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없는데요?”
“뭐?”
“안에 벨라프가 없어요. 창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까 창문으로 나간 걸까요? 공간 이동 마법도 쓸 수 있는 놈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이 망할 놈. 설마 그 나이 먹고 가출이라도 했나. 아리안은 빈방을 들여다보며 푹 한숨을 쉬었다.
“카일. 너는 빨리 벨라프 찾아봐.”
“이럴 때만 나를 찾지……. 네, 네. 알겠어요.”
“그나저나 대체 언제부터 방에 없었던 거야?”
“실연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죽은 건 아닐까요.”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메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 죽어? 벨라프가 죽어? 아리안은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며 경악을 했다.
“맙소사, 메릴!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내가 죽으면 그놈한테 마탑을 물려주려고 했단 말이야!”
“어차피 벨라프가 살아 있든 죽었든 아리안보다 벨라프가 먼저 죽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하여간 말을 해도 꼭 저렇게……. 카일은 질린다는 얼굴로 메릴을 흘기다가 곧 벨라프를 찾기 위해 눈을 감고 창문을 열었다. 그는 푸른 하늘에 마력을 넓게 펼쳤다.
아리안은 그가 좋은 결과를 내놓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난 후 카일이 눈을 뜨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리안.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감지가 안 돼요. 벨라프 정도의 마력이면 이렇게 감지가 안 될 리가 없는데……. 진짜 어디 가서 죽은 건 아닐지…….”
“죽었을 리가 없잖아. 일단 너희는 마탑으로 돌아가서 다른 마법사들이랑 기다려. 그놈은 내가 찾아볼 테니까.”
그렇게 아리안이 벨라프를 찾은 곳은 마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황무지였다. 아리안이 그를 찾는 데 세 시간은 족히 걸렸으니 카일이 찾지 못할 만도 했다.
“……아리안.”
“뭐야, 너. 답지 않게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아리안, 나…….”
아리안은 흐린 눈을 비비고 똑바로 벨라프를 쳐다봤다. 곧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가 소년일 적부터 청년을 거쳐 성인이 될 때까지. 아리안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벨라프가 세차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울고 있었다.
빗방울이 뺨에 엉겨 붙어 무엇이 눈물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표정이 너무나 서러워 보여 아리안은 벨라프가 울고 있다고 판단했다.
“마법이, 마법이…….”
벨라프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내뱉으며 힘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어떤 마법을 쓰려고 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손 중앙으로 모이던 푸른 빛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마법을 쓸 수가 없어……. 마력이 모이지를 않아…….”
“…….”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한참을 말없이 벨라프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아리안이 마침내 힘겹게 짧은 문장을 뱉었다.
그제야 아리안은 벨라프가 최근 몇 달간 끼니까지 거르며 몰두하던 연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르비아는 사실 이곳 사람이 아니다, 그녀에게서는 특이한 향이 풍긴다, 그리고 그 향 때문에 그녀가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
아리안은 지금껏 르비아에게서 미세하게 풍기던 향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다른 세계? 우리가 사는 곳 말고도 새로운 세상이 있단 말이야?
벨라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향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 마법을 사용하고 나니 더 이상 마력이 모이지를 않는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누군가 망치로 그녀의 심장을 쿵 친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커다란 괘종시계가 열두 시가 알리며 뎅뎅 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벨라프는 결국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보이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소리를 내어 우는 것도 아닌데 그 모습이 어찌나 서러워 보이던지. 아리안은 한때 그가 사람을 사랑하느라 더 이상 마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르비아를 사랑한 만큼 마법을 사랑하고 있었다.
네 선택에 후회하느냐고 묻자 벨라프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절망스러울 뿐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아리안의 눈에는 모든 게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그깟 사랑이 뭐라고. 몸과 영혼을 갉아먹기만 하는 사랑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언젠가 끝나 버릴 감정이 뭐가 그렇게 황홀하다고…….
아리안은 그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잘못된 것이었는지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밟고 서 있는 이 마탑조차도 그녀가 알마스를 잃고 홀로 틀어박혀 살기 위해 만들었던 곳이었으니.
그러나 다음 순간 아리안은 알마스에 대한 기억을 부정했다.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를 잊고 벨라프를 쏘아붙였다.
“멍청한 새끼.”
“…….”
등신, 머저리, 천치. 그 어떤 말을 해도 꽉 막힌 듯한 가슴이 뚫리지는 않았다. 왜 마법을 잃은 것은 벨라프인데 자신이 더 억울하고 답답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