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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86화 (86/100)
  • -외전 7-

    헬렌의 마법은 아리안에 비하면 정말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런 헬렌이 제아무리 문을 열려고 끙끙거려 봤자 아리안이 진심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쉽게 문을 닫을 수 있었겠지만 아리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 안 돼요, 마법사님. 제 이야기 한번만 들어 보세요. 저 마법 배우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집에서 쫓겨나서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에요. 이런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자신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는 사람치고는 뻔뻔한 행동과 말투였다. 아리안은 모질게 대답했다.

    “하나도 안 불쌍해.”

    “대충 보니까 혼자 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같이 살면서, 아니, 마법 배우면서 말동무라도 해 드릴게요.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요. 네? 네?”

    아리안은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행동을 멈춘 틈을 타 헬렌은 얼른 문을 열고 탑 안으로 들어왔다.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한 아리안을 보며, 헬렌은 바보같이 헤헤, 하고 헤프게 웃었다. 그 웃음은 아리안 그녀가 오래전 반했던 미소와 닮아 있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고 몸이 딱딱하게 굳는 듯했다. 그 헤프고 바보 같은 웃음을 본 이상, 더 이상 감히 그녀를 내쫓으려고 할 수가 없었다.

    아리안은 그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나는 또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려고 하는구나.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실수를 반복하려고 한다.

    ……어쩔 수 없잖아. 미숙하고 제 행동과 감정을 조절할 수 없으니 사람이지. 몇 년을 살았든 나도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아리안은 스스로의 행동을 변호하며 결국 소녀를 탑에 들였다.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래 봬도 청소도 잘하고요, 빨래도 잘하고요……. 또…… 뭐가 있지. 하여튼 몸으로 하는 건 전부 자신 있어요!”

    헬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리안이 구석에 세워져 있는 빗자루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빗자루가 지능을 가진 생명체처럼 스스로 지저분한 곳을 찾아다니며 청소했다.

    “어…… 음…….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스스로 청소하는 빗자루를 보고 자신의 쓸모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헬렌은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그 모습을 본 아리안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너 여기 마법 배우고 싶어서 왔다며 그게 아니라 청소하러 온 거였어?”

    “아.”

    헬렌은 뒤늦게 아리안의 말뜻을 이해하고 방긋 웃었다.

    ***

    헬렌은 마탑에 들어온 후 보통 아리안의 연구를 돕거나 옆에서 연구를 지켜보며 연구 내용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헬렌이 열여덟 살이 됐을 때는 스스로 그녀 자신만의 마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헬렌을 받아들인 후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녀의 탑으로 몰려들었다. 그중 대부분은 헬렌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다수는 아리안을 찾아와 제발 받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집에서 쫓겨났다는 핑계를 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핑계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헬렌을 돌아보면 그녀는 언제나 억울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쟤한테 그 수법을 알려 줬을 리가 있겠어요? 저도 처음 보는 애란 말이에요.”

    “뭐? 수법? 방금 수법이라고 했어?”

    “에고, 이런. 말실수를 했네. 하지만 집에서 쫓겨났던 건 사실이에요.”

    “여기가 너희 집이냐? 내가 너희 보모야? 내가 왜 연구할 시간도 모자란데 너희를 키우고 있어야 해?”

    “어쩔 수 없잖아요. 처음 저를 받아들인 게 죄죠. 그리고 시간이라면 아리안한테는 충분하잖아요.”

    “그래, 그랬어. 네놈이 이 사태의 원흉이었구나.”

    아리안이 헬렌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을 듯이 그녀에게 돌진하자 헬렌은 그 상황마저 즐거운지 얼굴에는 미소를 띄운 채 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하지만 머릿수가 많다고 하여 좋으면 좋았지 결코 그녀에게 나쁜 것은 없었다. 특히 연구 부문에서 그랬다.

    홀로 연구를 진행할 때는 책장 몇 개만을 겨우 채우던 책들은 여럿이 함께하자 모이고 모여 도서관이 되었다. 책장이 모자라게 되자 아리안은 아래층에 따로 책들을 보관하는 용도의 방을 마련했다.

    “책을 한데 모아 놓으니까 보기에 나쁘지는 않네.”

    “그렇죠? 역시 저를 받아들인 게 좋은 선택이었죠?”

    책이 많아져서 좋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헬렌은 아리안의 말을 그 이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헬렌의 성격이었다. 털털하고 넉살스럽고, 능글맞고.

    그게 딱히 나쁘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몽글몽글 좋아진다면 모를까. 한 번도 기분이 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아리안의 성격이 그녀를 닮아 가는 것 같았다.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리안은 평생을 마법과 함께했고, 그녀에게 내려진 시간의 저주는 증오스러웠으나 그녀에게 주어진 마법은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다니. 세상에 이보다 더 근사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아리안은 생각했다.

    그래서 아리안은 그들을 더욱 사랑할수록,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탑의 마법사들이 자신을 떠나갈 날을 걱정했다. 물론 영원의 시간을 사는 아리안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아리안처럼 영원을 사는 것은 아니었으나 보유한 마력의 영향 때문인지 보통 사람들보다 노화가 느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를 스스로 알았다. 그래서 죽기 몇 년 전에 안온한 곳에서 노후를 보내겠다며 마탑을 떠나고는 했다.

    정든 이들을 떠나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안은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않아도 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과 달리 오랜 시간 알마스를 그리워했던 이유는 그와의 마지막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결말이 비극인 연극은 특히나 관객들에게 여운을 더 오래 남기는 법이었다.

    알마스가 아이벡의 폭정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다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죽은 것이었다면 그녀도 이렇게까지 알마스를 그리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

    사실 아리안이 만들었던 알마스를 닮은 인형은 헬렌이 마탑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됐었다.

    지나다니던 헬렌이 인형을 보고 자주 놀란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 스스로 기억 속의 알마스를 이만 놓아 주기로 한 것이었다.

    완전히 포기하니 차라리 마음이 더 편했다. 아리안은 인형을 폐기한 후 이전보다 더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처음으로 아리안을 찾아왔던 헬렌이 떠나고, 함께하던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끝내러 떠나도 계속해서 새로운 마법사들이 마탑을 찾아왔다. 계속되는 연구로 마탑의 불은 꺼질 날이 없었다.

    어느 날은 한 소년이 마탑의 문을 두드렸다. 아리안은 연구 중에 귀찮게,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직접 문을 열어 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언제인지 모를 순간부터 굳어진 관습이었다.

    “나갑니다, 나가.”

    쿵쿵 문을 두드리며 재촉하는 손님에 아리안은 신경질을 내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마법으로 장난을 쳤나 싶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한참 아래에 위치한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년의 키가 얼마나 작았느냐 하면, 헬렌을 처음 봤을 때보다도 키가 훨씬 작았다.

    키가 작은 소년은 자신을 벨라프라고 소개했다. 벨라프는 지금껏 마탑을 찾아온 이들 중 최연소였다.

    비록 가장 어린 나이기는 했으나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아리안에게는 못 미치는 실력이기는 했으나 벨라프는 그녀가 본 마법사들의 실력 중 단연 최고였다.

    “내가 이런 말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너는 내가 없었다면 최고의 마법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뭐가 어찌 됐든 내가 있으니까 최고의 마법사가 되는 건 힘들겠지만. 너는 내 연구도 제일 많이 도와줬으니까, 만약 내가 죽으면 이 마탑은 무조건 너한테 줄게.”

    “당신은 안 죽으니까 상관없잖아. 그리고 떠들 시간 있으면 가서 약초나 더 들여다 봐.”

    “어린놈이 칭찬을 해 줘도 말을 이따위로……. 하여간 싹수 노란 것.”

    다만 완벽한 그의 단점을 하나 꼽으라면, 성격이 더럽다는 것이었다. 벨라프의 성격 결함은 자신이 잘난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다.

    아리안은 벨라프가 항상 자신에게만 신경질적이라며 징징거렸지만 마탑의 모든 마법사는 그 말에 반대했다. 그리고 벨라프는 아리안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신경질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예외는 있었으니.

    벨라프가 열여덟 살이 되는 해, 아리안은 싫다는 벨라프를 끌고 마을 축제로 향했다. 벨라프는 그곳에서 르비아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정말이지 최고로 연극 같은 일이 벌어졌다.

    벨라프는 마탑 마법사 중 가장 신경질적인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항상 1위를 차지하고는 했다. 벨라프가 마탑에 온 지 십 년이 지났으나 그가 웃는 것을 본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다소곳하게 앉아 르비아에게 보낼 편지를 쓰며 웃고 있었다. 벨라프가 웃는 모습을 본 마법사들은 자신이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스스로 자신의 뺨을 갈기기도 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아리안은 경악했다.

    “맙소사! 저놈이 연애를 하면 내 연구는 누가 도와줘!”

    “다른 놈한테 맡기면 되잖아. 메릴이라든가, 카일이라든가. 둘 다 느긋해 보이던데.”

    “야! 우리도 약초 채집하느라 바쁘거든?”

    미쳤다. 저놈이 미친 게 틀림없다. 마법에서만큼은 항상 성실했고 진지했던 놈이 다른 마법사들한테 자신의 일을 넘기다니. 미친 게 분명했다.

    심지어 벨라프가 편지를 쓰다 말고 신나서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을 듣고 아리안은 정말 기절할 뻔했다. 르비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깊게 빠졌구나.

    아리안은 부디 세상 물정 모르는 그가 연극에나 나오는 ‘이런 감정을 느낀 건 네가 처음이야’ 따위의 대사를 뱉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벽 뒤에 숨어 벨라프가 고백하는 장면을 훔쳐봤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하지만 아리안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상냥한 르비아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누가 연극을 허구라고 칭하던가. 잘 생각해 보면 아리안이 연극에서 본 장면들은 대부분 현실에서도 일어나고는 했다.

    저 성질 더러운 못난 놈을 데려가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리안은 아닌 척하며 벨라프를 많이 아꼈다. 그랬기에 르비아에 대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마법사들에게는 광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 광기의 대상은 마법이었다. 이는 곧 마탑이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아, 그렇군. 저놈 광기의 대상은 마법이 아니라 사랑인 거였어. 아리안은 온화하게 웃으며 편지를 쓰는 벨라프를 향해 눈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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