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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85화 (85/100)
  • -외전 6-

    그날은 알마스의 말처럼 눈이 내렸다. 날은 추울 대로 추워져서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나왔다.

    마을에 살아 있는 생명은 없었다.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좋아하던 아이들도, 눈이 오면 허리가 아프다던 노인도, 마을을 떠나기 직전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도.

    아리안은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눈을 뜨고 곧장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 그 위에 쌓인 눈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곳에는 알마스가 잠든 듯이 누워 있었다. 호수처럼 맑고 푸른 그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천천히 그의 뺨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눈보다 차가운 피부가 느껴졌다. 늘 들리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리안은 차라리 그가 눈 위에 오래 누워 있어서 몸이 차가워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잠시 있자 시체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에 질려 얼굴을 떼어낼 법도 한데, 아리안은 아주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그녀가 살던 마을을 포함한 근방의 마을들은 왕이 제시한 세금에 불만이 많았다. 개중에 글을 아는 영리한 이들은 영주들에게 불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영주들에게 도착한 편지의 내용은 순화되어 왕에게 보고됐을 것이다. 하지만 순화를 해 봤자 결론은 왕의 뜻에 불만을 가졌다는 사실뿐.

    왕은 기사들에게 감히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 반란 종자들을 쓸어 버리라고 명령했고, 그 본보기가 된 것이었다. 알마스와 그녀가 살던 마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에비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력석이라도 쥐여줄걸, 나를 부를 수 있게. 그랬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마도 달랐겠지.

    ……아니,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비밀을 밝혔을지라도 바보같이 착한 알마스는 자신 때문에 아리안이 곤경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을 테니까.

    도대체 사람은 왜 변하지를 않는지. 하여간 이기적인 족속들. 남의 목숨은 개미만도 못하게 여기지.

    아리안은 알마스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슬픔의 무게는 모두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알마스…….”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 미안, 정말 미안해. 너희들을 떠나보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슬퍼.

    적어도 너희하고는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잖아. 떠날 때 알마스가 내게 보여 줬던 미소가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더 오래 볼 걸 그랬어.

    너희처럼 좋은 가족을 다시 한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거였을까. 그 끝이 좋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아리안은 수백 년 동안 키워 온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해졌는지 알고 있었다. 확실한 동기가 있다면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아리안은 곧장 왕국의 수도로 향했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궁이 얼마나 호화롭던지.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마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본 아리안의 눈동자가 점점 더 차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왕궁의 경비가 뛰어나다고 해도 공간을 찢고 이동할 수 있는 이에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아리안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고 아이벡을 찾아냈다.

    이 자가 귀족들 사이에서 정복왕이라고 불리는 아이벡이로구나. 다채롭게 몸을 장식한 아이벡을 내려다보는 아리안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온기가 없었다.

    아리안은 하루에 걸쳐 아이벡을 끔찍하게 죽이고 땅을 갈라 왕궁과 썩어 문드러진 귀족들을 지하에 가라앉혔다. 죽어서도 땅 아래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그녀가 땅속 깊숙한 곳에 묻어버린 왕국은 차후의 사람들에게 고대 제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대 제국과 함께 파묻힌 귀족들과 달리 살아남아 도망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기댈 곳을 찾기 위해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주신 렌다였다.

    렌다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신에게는 아주 강력한 힘이 있고, 신께서 그 힘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믿음은 존재했다.

    인지하는 것이 곧 힘이었다. 믿음과 깨달음은 사람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냈다.

    곧 세상 여기저기에서 사람을 치유하는 힘을 가진 이들이 등장했다. 아리안의 능력과는 종류가 다르기는 했으나 특별한 능력이라는 것은 똑같았다.

    그들의 능력은 사용할 때 백색의 빚을 뿜는 것이 특징이었다. 사람들은 그 힘에서 나오는 빛이 신이 내려 주신 것이라며, 신성하다 하여 성력이라고 불렀다.

    성력은 마법처럼 여러 분야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물건을 옮긴다거나, 누군가를 공격하는 등 간단한 일들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사람 중 일부는 성력을 얻어 특별해졌다. 성력을 얻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도 고대 제국에서 귀족이 아니었던 이상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전보다는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비록 짧은 순간일 뿐이겠지만 모두가 행복한 그 순간에 불행한 것은 아리안뿐이었다.

    알마스, 알마스……. 아리안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차라리 잠들고 싶었다. 이왕이면 영원히 잠들어서,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에 절망했다.

    숨이 끊어져도 심장의 울림이 멎어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항상 멀쩡하게 의식을 차렸다. 숨이 끊어지는 과정에서 얻은 상처들마저 완벽하게 아문 채로.

    이제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사람이 없는 황무지에 높은 탑을 쌓고 그 안에서 마법을 연구했다.

    그녀의 인생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됐다. 아끼는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을 잃고 혼자가 되어 마법을 연구하다가 다시 그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

    지독하게 권태로운 인생이었다. 권태롭고 지루하다고 하여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는,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는 인생.

    아리안은 그 지루한 인생을 조금이라도 즐겨 보기 위해 때때로 마법진을 그려 악마를 소환하기도 했다. 그녀는 소환된 악마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자신이 사용하는 마법의 파동과 악마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파동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비슷한 것을 넘어 거의 동일했다.

    아리안은 과거에 자신에게 주어진 영원의 시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시간의 저주라고 불렀었다.

    영원의 시간은 저주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저주였구나. 내 힘은 악마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아리안은 이 사실을 알고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악마의 힘에서 비롯됐으면 뭐 어때. 나는 이미 수백 년간 이 힘을 써 왔고, 이제는 내 힘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느 순간부터 아리안은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계속 쌓이다 보니 책장 여러 개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나쁘지 않네.”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알마스를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리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알마스를 닮은 인형을 쳐다봤다.

    알마스를 닮은 인형은 아리안이 말을 걸어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까딱이기만 할 뿐이었다.

    제발, 알마스. 이제 제발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내가 너를 그리워하며 인형에 대고 말을 거는 식의 추접스러운 짓까지 저지르지 않게 해 줘. 아리안은 두 다리를 끌어안고 그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탑의 꼭대기 층에서 연구를 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탑 전체가 울렸다.

    노크 소리가 탑 전체에 울려? 이럴 수가 있나? 아리안은 누군가가 자신의 연구를 방해했다는 불쾌함과 노크 소리를 이 넓은 탑 전체를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는 데에 기묘함을 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탑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머리가 아리안의 가슴 정도에 오는, 정말 작은 소녀였다. 아리안의 키가 지나치게 큰 탓도 있었지만 소녀의 키가 지나치게 작은 탓도 있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맞으시죠? 저는 헬렌이라고 하고요, 마법사님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괜찮으시면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시겠어요? 마법사님이 엄청나게 마법을 잘 다루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소녀는 숨 한번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분명 탑을 쌓은 이후로는 사람들과 교류한 적이 없는데 내 소문을 어떻게 들었다는 거지. 아리안은 눈앞의 작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은 가르쳐 준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렇지만 혼자 연습도 했어요! 가벼운 물건을 옮기는 거랑, 그리고 또…… 아! 방금처럼 소리를 넓게 울리게 할 수도 있어요!”

    헬렌이 발랄하게 문을 두드리자 탑 여기저기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안은 헬렌의 그 쓸데없는 마법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성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처럼, 자신과 같이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나타난 모양이라고.

    “마탑에는 위대한 마법사가 산다고 했잖아요. 그게 마법사님 맞죠?”

    마탑, 마탑이라니? 설마 그게 내가 지은 탑의 이름인가? 마법사의 탑이라서 마탑인 건 아니겠지? 맙소사. 게다가 위대한 마법사라니. 본인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그런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말란 말이야. 아리안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말하는 위대……한 마법사라는 게 내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는지.”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칭하는 것은 정말이지 못할 일이었다. 아리안은 당장 고개를 숙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저는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데 혼자 하려니까 영 실력이 안 늘더라고요. 그래서 스승님으로 모실 분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그래, 그렇구나.”

    “부모님은 이게 악마의 힘이라면서 저를 은근히 피하셨거든요. 이 힘을 마법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여기까지 오면서 알았어요.”

    “알겠어. 이야기를 다 들어 준 것 같은데 이만 문 좀 닫아도 될까?”

    “아악! 잠시만요!”

    헬렌이 닫히는 문을 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온몸으로 문을 미는 동시에 마법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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