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안 돼.”
아리안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청년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눈을 감자 바람을 타고 아릿한 약초 냄새가 풍겨왔다. 아리안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나이 차이요?”
청년은 아리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사고로는 아리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쪽, 그러니까…… 아가씨는…….”
“아리안.”
“아, 네. 아리안. 하지만 아리안도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걸요. 많아 봐야 다섯 살 차이 정도일 텐데.”
다섯 살은 무슨. 내가 너보다 가뿐히 이백 년은 더 살았을 텐데. 아리안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꿀꺽 삼켰다.
“아무튼 안 돼. 게다가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럼 제가 누구인지 알면 된다는 말씀이세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말이 그렇게 돼?”
그 후 청년은 아리안이 언제 어디에 있든 매일 그녀를 찾아와 눈도장을 찍었다. 때문에 아리안은 알고 싶지 않아도 청년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푸른 머리칼을 가진 청년의 이름은 알마스. 예의가 바르며 친절하고 상냥하며…… 사실 이런 것들은 아리안에게 하나도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귀찮다고 생각한 것은 알마스의 성실함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리안. 좋은 아침이죠?”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만.”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이런 일이나,
“아, 아리안! 여기서 약초를 캐고 있었군요. 아리안을 만나다니, 마침 오늘 우연히 이 길을 지나가길 잘했네요.”
혹은 이런 일. 알마스는 ‘우연히’를 특히 강조해서 말했다.
“우연히? 이곳은 숲으로 연결된 길이라 늑대가 나타난다고 해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데. 그런 길을 우연히 걷고 있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서 아리안은 약초를 캐고 있었던 거예요? 빨리 마을로 돌아가요!”
“약초를 다 캐기 전까지는 돌아가기가 곤란한데.”
알마스는 아리안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일을 돕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미숙하게 약초를 캐면서도 불안한지 숲 쪽을 계속 힐끗거렸다.
“무서우면 먼저 가도 될 텐데.”
“아니, 아니에요. 무서운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 갑자기 늑대가 튀어나올까 봐…….”
“결론은 늑대가 무섭다는 게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다음날 알마스는 늑대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여 괭이를 챙겨왔다. 끝이 뭉툭하고 녹슨 낡은 괭이였다.
저딴 걸로 늑대를 잡겠다고 설치다니……. 아리안은 한심한 표정으로 알마스와 괭이를 쳐다봤지만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리안은 약초를 캘 때 항상 늑대를 쫓는 향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늑대가 갑자기 그들을 덮칠 일도 없었다.
알마스는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도 모르는 늑대를 무서워하면서도 매일 아리안의 일을 도왔다. 그것은 약초를 캐는 일일 때도 있었고 약초를 씻어서 말리는 일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마침내 해가 지나가고. 하루는 알마스가 찾아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홀로 묵묵히 약초를 캐며 알마스를 떠올렸다. 알마스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침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리안이 답을 하지 않아도 계속 말을 걸었었다.
그래, 그렇겠지. 어차피 계속 받아 주지 않으면 결국은 포기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원래 다 그렇지 뭐. 변덕스러운 게 사람이지, 변덕스러워야 사람이지.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알마스가 찾아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흘렀을 때 마침내 아리안은 약초를 캐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곧바로 마을로 내려왔다. 둔감한 마을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아리안은 보고도 살갑게 반겨 줬다.
“아니, 이게 누구야. 숲 근처에 사는 아가씨 아니야? 어머니는 또 안 모시고 나왔나? 함께 있는 걸 본 적이 없군 그래.”
“어머니는 집에서 쉬고 계세요. 그나저나 저 여쭤볼 게 있는데…….”
어머니는 어디 있냐는 말을 하도 듣다 보니 이제는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술술 나왔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서 굳이 이상함을 찾으려고 들지 않았다.
“왜, 무슨 일인데?”
“알마스. 알마스의 집이 어딘지 궁금해서요.”
“아아. 알마스? 알마스라면 저기, 저기 있는 집에서 혼자 살고 있지. 근데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통 집에서 나오지를 않더라고.”
아리안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미처 하지 못하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보는 눈이 많아 마법을 쓸 수도 없으니,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보기에 알마스의 집은 굉장히 작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알마스의 어머니가 그를 가지자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버리고 떠났고, 알마스가 태어난 후 어머니조차 그를 내버려두고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작은 집의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방 안의 열기가 후끈했다. 아리안은 이런 기운을 이미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이것은 병자의 기운이었다.
“……알마스?”
아리안은 조용히 알마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새삼 아리안은 자신이 알마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 안에서 사람의 형체가 꿈틀거리더니 곧 알마스의 찡그린 얼굴이 이불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리안……?”
“알마스.”
“여기는…… 어떻게.”
콜록. 알마스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리안은 곧장 알마스의 팔을 들어 맥을 쟀다. 알마스가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며 발버둥쳤지만 그의 힘은 아리안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평범한 감기 따위가 아니었다. 물론 평범한 감기라고 해도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치명적인 병으로 취급되기는 했지만.
아리안은 알마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마법과 약초를 사용했다. 수십, 수백 년간 마법과 약초를 연구해 온 그녀에게 있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아끼지 않는 상대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참으로 지극정성이었다.
이후 기력을 조금 회복한 알마스가 이불 밖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는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리안이 걱정해 주니까 너무 좋아요…….”
평소 아리안은 알마스가 헤프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 웃고 다녔다. 특별히 기분이 좋은 일이 없어도 그저 매일 웃고 다녔다.
하지만 그런 헤픈 웃음들과 달리 이 미소는 왜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지.
“……멍청한 놈.”
결국 아리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있을 때는 십 년도 짧게만 느껴졌으나, 알마스와 함께했던 한 해는 결코 짧지 않았다고.
그녀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오래전 네바에와 함께 봤던 연극보다도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특별하지도 않은 게 사랑이지, 어떻게…….
아니지, 진부하니까 사랑이지. 뻔한 전개를 알면서도 바보같이 매달리니까 그게 사랑이지.
아리안은 결국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이 설레는 사랑을 하고 말았다.
***
“잠시 먼 곳에 갔다 올 거야.”
“먼 곳이라는 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짧으면 이틀, 길면 나흘 정도 걸리겠지.”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알마스는 아리안이 사랑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마주 봤다.
“나 없는 동안 다른 사람한테 한눈팔면 안 돼.”
“아리안이야말로 나 버리고 다른 사람한테 가 버리면 안 돼요.”
알마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아리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는 한껏 차가워진 공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날이 많이 추워졌네요.”
“그러게.”
“곧 눈이 오려나 봐요.”
아리안은 곧 눈이 올 것만 같은 추운 날에 옛 가족들을 만나러 갔다. 중요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너희들이 원했던 것처럼 잘 살고 있다고. 그러니 너희들도 더 이상 내 걱정 말고 편히 쉬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기 위해.
아리안은 웬만하면 알마스의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알마스는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알지만, 아리안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를 괴물, 혹은 마녀라고 생각할까 봐.
그리고 다행히 알마스는 병을 앓았을 당시 아리안이 마법을 사용해 자신을 치료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리안은 알마스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후 돌아섰다. 알마스는 시야에서 아리안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알마스와 헤어진 후 아리안은 길을 따라 걸어 시내로 내려왔다.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신문을 보던 한 남자가 아리안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아리안 아냐. 평소에는 알마스랑 맨날 붙어 다니더니,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 가? 알마스가 서운해하겠네.”
“먼 곳에 친구들을 만나러 다녀오려고요.”
“먼 곳에? 짐 하나 안 챙기고?”
“네. 먼 곳이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거든요.”
먼 곳이지만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아리안은 의문스러운 표정의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그를 지나쳐 걸었다.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한참 걷다 보니 들으려는 의도가 없었어도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매우 불경스럽게도, 그들은 저들이 사는 곳을 통치하는 왕을 욕하고 있었다. 아리안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을 듣고 최근에 들은 소식을 떠올렸다.
정복왕 아이벡. 하나 그 별칭은 풍족하게 생활하는 귀족들이 만들어 붙인 거짓이었다. 실상은 세금으로 왕국민들을 박해하는 폭군일 뿐이었으니.
나라가 평화로우면 백성들이 왕의 이름을 모른다고들 하지. 안타깝게도 마을 사람들은 왕의 이름을 모르기는커녕 하루하루 왕을 욕하느라 바빴다.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증거였다.
이 정도면 됐나. 아리안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법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오랜만에 옛 가족을 찾았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아리안은 기나긴 고민 끝에 겨우 말 한마디를 짜냈다.
“나는 잘 살고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도 잘 살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리안은 그들 이전의 가족을 만나러 떠났다.
아리안은 느긋하게 옛 가족들을 만나고 사흘 후에 돌아와서, 난장이 된 마을을 보며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가족들을 만나러 가서는 안 됐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