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83화 (83/100)

-외전 4-

꽤 진지하게 말을 꺼냈으나 정작 그 말을 들은 에비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딱딱한 빵을 질겅질겅 씹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떠난다고요? 이 마을 사람들도 아리안한테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였어요? 뭐, 아리안이 떠나겠다는데 저희가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이번에는 어느 마을로 갈 거예요?”

“아, 그러니까.”

혼자 떠나려고 하는데. 아리안이 말끝을 흐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물을 마시던 카를의 입에서 폭포처럼 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평소라면 더럽다며 구박을 했어야 할 에비타가 조용했다. 그녀는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건 안젤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잘 이해가 안 돼서.”

“말 그대로야. 너희는 여기에 있어. 나는 떠날 테니까.”

“왜요? 이유라도 말해 줘요.”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안젤라였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아리안이 떠나려는 이유를 물었다.

“이번 일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나야, 나. 나 때문이라고. 내가 이상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서 일어난 일이잖아. 너희는 괜히 나랑 있다가 어느 순간 마녀로 몰려서 죽을지도 몰라.”

“맙소사, 아리안. 그런 진부한 핑계는 뭐예요. 백 년 전에 만들어진 연극에서도 그런 대사는 안 쓸 거예요.”

“언니. 그런 말은 좀…….”

“왜, 사실이잖아.”

에비타가 안젤라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아리안은 에비타가 화가 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만약 그녀가 화를 낸다면 저런 표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잠 제대로 못 잤던 거 다 알아요.”

“아, 그건.”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요.”

“…….”

“왜 죄책감을 갖는 거예요?”

에비타의 말이 머리를 쿵 울리는 듯했다. 그야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사람을 죽였다. 그야말로 죄책감을 가져 마땅한 일이었다.

“죄책감을 가져 마땅한 일이야.”

“그럼 그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에요. 아리안의 집을 태운 게 누군데요? 아리안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저희를 죽였을 거예요. 저도, 안젤라도, 카를도.”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돼.”

“그 사람들이 저지른 죄도 정당화될 수 없어요. 아무 죄 없는 아리안한테 낫을 휘둘렀잖아요! 아리안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상처가 심하게 덧나서 죽었겠죠.”

아리안은 십수 년 간 그들과 함께 살면서 에비타가 이렇게까지 화가 난 모습은 처음 봤다. 마을 사람들과 연관된 문제가 유독 그들에게 민감한 사항인 탓이었을까.

“……나는 정말로 악랄한 마녀일지도. 망설임 없이 수십의 사람들을 죽였어.”

“그럼 저희는 마녀가 맞나 보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뭘 하든 뭐라고 하든 사람들은 우리를 마녀로 생각할 텐데.”

아리안은 자신만을 마녀라고 칭했다. 그리고 에비타는 자신과 에비타, 카를까지 전부 포함해 마녀라고 칭했다. 뭐, 애초에 마녀는 사람들의 공포가 형상화된 허구의 존재에 불과하기는 했으나.

갑자기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리안은 놀라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투명한 눈물이 묻어 나왔다. 아리안은 잠시 얼빠진 사람처럼 젖은 손등을 응시했다.

그녀는 가족들과의 추억이 불탔을 때도 울었고 지금도 울고 있다. 에슨이 죽고 난 뒤 홀로 그의 장례식을 치를 때 펑펑 운 이후로 이렇게 운 것은 수십 년 만이었다.

에비타는 으이구, 따위의 소리를 내며 아리안을 끌어안았고 안젤라는 말없이 아리안을 끌어안았다. 카를은 셋의 눈치를 보다가 에잇, 하며 팔을 넓게 벌려 셋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아이들에게 안겨 위로를 받는 기분이란. 아리안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아리안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칭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죄인의 죄를 감싸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면 그들은 흔쾌히 죄인을 구원하는 신의 역할을 자처했을 것이다.

결국 아리안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리안이 자신들을 떠나지 않음에 제각각으로 기뻐했다. 에비타는 방긋 웃었고 안젤라는 희미하게 웃었으며 카를은 바보처럼 웃었다.

그렇게 또 수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들은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는 숲속 깊은 곳에 자신들만의 집을 짓고 살았다.

카를은 나이가 들고 뒤늦게 술에 빠진 탓에 자신의 누나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는 에비타가, 그 후로는 안젤라가 차례대로 눈을 감았었다.

안젤라가 죽기 전 어느 햇살 좋은 날에, 아리안과 안젤라는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아리안의 시간은 여전히 스물다섯에 머물러 있었고, 안젤라의 시간은 그때에도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아리안이 안젤라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믿지 못할 테였다. 겉모습만으로는 아리안이 안젤라의 손녀로 보일 정도였다.

안젤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

“아리안, 당신은 이곳에서 저희와 행복했나요?”  아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모든 산해진미를 즐기는 것보다 다 함께 에비타와 카를이 잘못 만든 빵을 먹어치우는 게 더 즐거웠다고. 네가 나를 걱정해 만든 약물을 받았을 때는 금은보화를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노라고.

함께 산 세월이 오십 년을 훌쩍 넘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안젤라는 아리안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얽매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아요, 아리안.”

안젤라는 그 말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비타를 따라갔다.

더 이상 세상에는 아리안을 얽맬 것이 없었다. 가족들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들은 이미 오래전 불에 타 사라졌고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을 나타내는 물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직접 자신들의 물건을 정리한 탓이었다.

그들은 결혼조차 하지 않고 죽었다. 아리안이 자신들을 그리워할 매개체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고 그저 그렇게 살다 보니 연인을 만들고 사랑을 할 시간도 없었다.

때문에 아리안은 비교적 홀가분하게 그들이 살던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이 에비타와 안젤라, 카를이 원하던 바였다. 그들은 아리안이 가끔 저들의 무덤을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생각했기에.

물론 홀가분하다고 하여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카를이 죽었을 때도, 에비타, 안젤라가 죽었을 때도 아리안은 매번 묘지 앞에서 울부짖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시간의 저주를 원망하며.

하지만 그녀는 이제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또 다른 사람으로 치유가 가능함을 알게 됐다. 그녀는 새로운 가족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안녕, 안젤라. 내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잘 있어. 안녕, 에비타. 안녕, 카를.”

아리안은 묘비에 대고 하나하나 인사를 한 후에야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

이후 아리안은 새로운 마을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을 경계하다가도 마을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는 등 친절하게 굴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여유롭게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안젤라가 말한 것처럼,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해서.

하지만 소중한 것을 찾겠다는 욕심과 강박 때문이었을까.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아리안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녀에게 중대한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리안은 집에 틀어박혀 마법을 연구했다. 이제 그녀는 원한다면 홀로 왕국도 갈라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왕이면 평화로운 세상이 좋았다. 아리안은 조용히,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

이번 마을 사람들은 느긋하고 둔했다. 수년에 한 번씩 아리안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나가도 '저번에 저 집에 살던 여자의 딸인가?'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평생 그녀는 가슴이 설레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마을은 사람들이 둔하니까, 한번 해 볼까?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곧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그만두고는 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들마저도 아리안보다는 훨씬 어렸다. 그녀는 에슨보다도 늦게 태어난 이와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리안은 마을에서 인기가 많다는 한 청년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다. 청년은 아리안이 약초를 캐는 숲까지 찾아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실 텐데 이런 말씀 드리게 돼서 죄송하지만 좋아해요. 저번에 우물가에서 첫눈에 반했어요.”

“……?”

이 대사,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리안은 약초를 뜯다 말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

때는 네바에가 살아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마을에서 연극을 한다며 아리안에게 함께 갈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고, 아리안은 귀찮은 척하다가 그녀를 따라나섰다.

당시 연극의 한 대사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었기 때문에 아리안은 그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 렐라.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상점가를 거니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사랑해요, 렐라.

아리안은 간만에 그 대사를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시 연극의 평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리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고백할 때 사용하는 대사보다는 나이 차이였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니?”

“네? 나이요?”

“그래.”

“아, 스물한 살입니다.”

맙소사! 아리안은 마음속으로 탄식을 했다. 스물한 살이라고? 그녀의 나이에 비하면 거의 방금 전에 갓 태어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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