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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82화 (82/100)
  • -외전 3-

    아이들을 거둬들인 지 1년 정도가 지났을 때 아리안은 에비타에게 푸른색의 단단한 돌을 하나 쥐여 줬다.

    그녀의 마력을 담은 마력석이었다. 아리안이 약초를 캐러 나갔거나 집에 없을 때 급한 일이 생기면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는 용도였다.

    물론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력석이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마녀라며 두려워했고, 그 덕분에 그들의 집은 언제나 평화로웠으니.

    하지만 평화롭던 마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전염병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던 두려움을 지워 버렸으며 근본 없는 용기를 불러냈다.

    사람들은 아리안의 집에 쳐들어가 카를의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으며 에비타와 안젤라에게 발길질을 했다. 횃불에서 떨어진 불씨로 인해 집이 한순간에 불타올랐다.

    에비타는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질질 끌려 나오면서도 반항하며 불타오르는 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안 돼. 집이 불타면, 안 되는데……. 에비타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처음 아리안을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저 낡은 집에 애틋함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물건들, 그리고 여섯 명의 단란한 가족이 그려진 작은 액자. 아리안은 종종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 액자를 빤히 쳐다보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들이, 아리안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전부 불타고 있다. 에비타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마력석을 찾기 위해 품 안을 뒤졌다. 어서 아리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아리안은 그녀에게 마력석을 주면서 급할 때 이것을 깨뜨리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신호가 올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그동안 혹시라도 잘못 깨뜨릴까 봐 조심히 지니고 다녔던 것을 드디어 세게 쥐어 깨뜨렸다. 마력석을 세게 쥐자 퍼석, 하고 낙엽이 짓밟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리안이 도착하는 데는 눈을 깜빡일 만큼 짧은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에비타가 마력석을 깨뜨리고 그 가루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아리안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아, 아리안…….”

    그녀를 발견한 카를이 울먹이며 아리안을 불렀다. 그에게는 평상시의 활발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공포에 질려 기가 죽은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아리안은 아이들을 보기 전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최근 십 년 동안 마을 사람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대부분은 아는 얼굴들이었다.

    저 사람은 톰이었나. 이십 년쯤 전에 늑대한테 물려 죽을 뻔한 걸 내가 몰래 도와 줬었지. 저 사람은 에드나인 것 같은데. 십오 년 전쯤 딸이 아플 때 약을 줬었고. ……딸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갔나.

    아리안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떠올린 기억들은 전부 에슨이 살아 있던 적의 일이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로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침착하던 아리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

    아리안이 짧게 탄식을 뱉었다.

    한참 전부터 무섭게 집을 집어삼키던 불은 어느새 사그라들어 마지막 불씨마저도 가라앉았다. 불을 끌 것도 없이 이미 집은 전부 타 재가 되어 버린 후였다.

    아리안은 본능적으로 제집에 불을 지른 것이 마을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왜…….”

    나는 당신들을 도운 일 외에는 아무 짓도 한 적이 없는데, 당신들은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지만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기억이란 아주 약한 것이라서, 기억을 보관하던 매개체가 사라지면 그 기억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기 쉽다.

    “…….”

    아리안은 전부 타서 회색 재가 되어 버린 집을 멍하니 응시했다. 가족들과의 추억이 담겨 있던 것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완전히 사라져서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아. 아리안은 꾹 주먹을 쥐었다.

    “…….”

    가장 서러운 것은 가족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일 액자에 그려진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겨우 유지하던 희미한 기억마저 이제 지워져 버렸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리안을 보고 잠시 주춤했던 이들이 아리안이 눈물을 흘리자 다시 용기를 얻었다.

    “마녀, 허공에서 마녀가 나타났다!”

    “저년이 우리 마을에 병을 퍼뜨렸어!”

    “죽이자, 마녀를 죽여!”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귀가 웅웅거렸다. 마녀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때 누군가 달려와서 날카로운 낫을 휘둘렀다. 아리안은 불타 없어진 집에 정신이 팔려 공격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낫이 여린 살을 가르고 아리안의 어깨에 박혔다. 그 광경을 보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에비타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아리안은 귀가 찢어질 듯이 울부짖는 에비타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그제야 어깨의 고통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눈앞에 벌어지는 순간순간이 비현실적이었다. 자신만 제외하고 전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절대 그녀의 시간이 빠르게 흐를 리는 없을 텐데도.

    자신의 목을 향해 낫이 날아오는 시간이 참 길게도 느껴졌다. 최근 십 년 동안 이렇게 그녀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공포에 질려 흐느끼고 있는 아이들이 가장 안쓰러웠다. 마녀로 몰리던 마을에서 도망쳐 이곳까지 온 아이들에게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아리안의 얼굴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날아오던 낫이 아리안의 목에 닿으려던 순간, 땅에 번개가 내리쳤다.

    콰릉. 번개는 천둥과 거센 비를 이끌고 찾아왔다. 번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타죽고 시체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내리쳤다.

    아리안은 온기가 깃들어 있지 않은 눈길로 마을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죽이러 온 악랄한 마녀인가 보지.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됐어요. 이 능력을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하지 않겠다고, 사람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그 약속 지키지 못했네요.

    그래 봤자 당신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도 내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내가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겠지만…….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에비타가 힘없이 다가와 아리안의 손을 잡았다.

    “아리안…….”

    “……에비타.”

    “……미안해요. 집이 타 버리기 전에 아리안을 불렀어야 했는데…….”

    아리안은 침묵했다. 에비타는 불안한 강아지처럼 아리안의 손을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집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그녀가 자신들을 버릴까 봐 불안한 감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마침내 아리안이 입을 열고 나지막이 말했다.

    “……가자. 다른 마을로. 이 마을에는 이제 못 있겠다. 전부 엉망이 되어 버려서…….”

    “아리안…….”

    불에 다 타 버려서 챙길 것이 없었다. 아리안은 에비타, 안젤라, 카를의 손을 잡고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그녀가 평생을 살아왔던 마을에는 이제 산 사람이 없었다. 그 후 주변 마을들에는 마녀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마녀가 그 마을에 전염병을 퍼뜨렸다고. 병에 걸리지 않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녀에게 직접 살해당했다고. 이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리안은 씁쓸하게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

    아리안은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운 마을에 정착했다. 새롭게 도착한 마을은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여기는 평화롭네.”

    “평화롭기는 저번 마을도 평화로웠어. 사람들의 본심은 위기를 맞이했을 때 드러나는 거야.”

    카를이 멍하니 한 말에 에비타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제 딴에는 아리안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인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아리안은 청력이 좋았다. 아리안은 에비타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그들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테다. 아리안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이 성장할 동안 아리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에비타, 안젤라, 그리고 카를. 그들은 아리안의 가족과도 같았다. 그녀의 가족도 늙지 않던 자신들의 딸을, 언니를, 누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었다. 그녀의 시간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서도.

    하지만 단순히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저주로 인해 얻게 된 힘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달랐다. 자신이 그들을 도왔던 사실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저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미웠다. 심지어 자신은 전염병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도.

    그래도 그녀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수십 명을.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며칠간 잠을 자지 못했다. 마법을 연구하느라, 죽기 위해서, 이처럼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잠을 자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그녀가 죽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묵묵한 얼굴로 아리안을 살피던 안젤라가 조그마한 병에 담긴 약물을 아리안에게 내밀이었다.

    “제가 만들었어요. 악몽을 꿀 때 마셔요. 푹 잘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리안은 안젤라의 선물을 받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편하게 잠들어서는 안 됐다. 자신이 편해진다는 것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적어도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리안은 가만히 앉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수십 년이 흐르면 이 마을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는 아리안에 대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극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언젠가 사람들은 또 그들을 마녀로 몰아 공격할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만든 추억이 또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아리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 아리안은 아이들을 한데 불러서 말을 꺼냈다. 만난 지 십수 년이 흘러서 이제 그들은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나이가 되기는 했지만.

    “나는 떠나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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