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외전 1
아리안이 처음으로 세상을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거스르고, 거스르고 또 거슬러 올라간 아주 오래전이었다.
그녀가 눈을 뜬 후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모였다. 아리안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리안이 태어나고 그녀의 아래로 네 명의 동생들이 더 태어났다. 가르트, 네바에, 티타, 에슨. 아리안이 보기에 하나같이 귀엽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동생들이었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챙기는 건 첫째인 아리안과 둘째인 가르트의 몫이었다.
그리고 첫째인 아리안이 열다섯, 막내인 에슨이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부모는 일을 나갔고, 아리안은 심심하다며 칭얼거리는 에슨을 데리고 숲으로 갔다.
아리안은 에슨을 주변에서 뛰어놀도록 둔 뒤 두꺼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었다. 두꺼운 책의 페이지가 쉴 새 없이 넘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리안은 깜빡 잠이 들었다. 전날 침대에 누워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책을 읽은 탓일 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에슨을 찾았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자고 말하려고 했으나 에슨이 보이지 않았다.
“에슨……?”
도대체 어디에 간 거야. 아까부터 배고프다고 하더니, 혼자 집에 돌아간 건가? 아리안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집 쪽을 향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때였다. 흙바닥에 찍혀 있는 작은 발자국이 아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
에슨의 것처럼 보이는 발자국은 숲 깊은 곳을 향해 있었다. 말도 안 돼, 맙소사. 아리안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에, 에슨…….”
발이 천천히 땅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장 숲의 깊은 곳을 뛰어갔다.
“에슨! 에슨! 어디 있어!”
헉, 헉. 산꼭대기에 올라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숨이 찼다. 그럼에도 아리안은 뜀박질을 멈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밤의 숲은 위험했다. 아리안이 잠들었던 곳은 숲의 끝자락이기 때문에 짐승들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도 이야기가 달라진다.
숲에는 사나운 늑대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단다. 이것이 바로 마을의 어른들이 항상 아리안과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아리안도 늑대를 본 적이 있었다. 신기한 풀들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숲으로 조금 들어와 버린 후였다.
숲의 깊은 곳을 바라보다가 사람이 엎드린 듯한 형체를 보았다. 어렸던 아리안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늑대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마을을 향해 도망쳤다.
일평생 살면서 그 순간보다 절박했던 때는 단연코 없었다. 아리안은 숨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 숲에서 빠져나왔다.
마을에 도착해 울타리 안에서 숲을 바라보니 숲 끝자락까지 그녀를 쫓아온, 노란 눈을 가진 늑대가 빤히 아리안을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아리안이 목이 쉴 때까지 에슨을 부르며 달렸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보다 특히 더 정이 많았다. 만약 이 일로 에슨이 죽는다면……. 아리안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끝까지 하지 못한 말은 이것이었다. 에슨이 죽는다면 나도 따라 죽어 버려야지.
아리안은 눈을 감고 뛰었다. 발로 풀을 짓밟은 소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곤충이 우는 소리. 그리고…… 어린아이가 훌쩍이는 소리.
에슨. 에슨이 분명했다. 아리안은 번쩍 눈을 뜨고 울음소리를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한발 늦었다. 아리안이 에슨을 발견했을 때 이미 탐욕스러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늑대가 에슨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늑대가 에슨을 보며 그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아, 안 돼. 에슨!”
설령 에슨이 늑대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아리안이 그에게 닿는다고 해도 늑대를 물리칠 방법이 없었다. 에슨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을 뿐이지, 아리안도 손에 무기 하나 없는 열다섯 아이였다.
아리안은 에슨을 향해 팔을 뻗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자신도 늑대에게 잡아먹힐 테였다. 굳이 동생의 마지막을 두 눈을 뜨고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감은 눈 너머로 밝은 빛이 느껴졌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자신에게 달려들었어야 할 늑대가 잠잠했다.
“흐, 흐으…….”
죽지 않은 에슨이 울먹였다. 아리안은 에슨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슬그머니 눈을 뜰 수 있었다.
에슨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에슨을 잡아먹으려던 늑대는 어디에 있지?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아리안은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했다.
망치로 때려 터뜨린 듯이 늑대의 대가리는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뭐지? 도대체 뭐지? 아리안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빛이 느껴졌고…… 그 앞에는 늑대가 머리가 터진 채로 죽어 있었다.
아리안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설마 내가…….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에슨을 등에 업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이미 하늘에는 달이 떴고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흐으……. 흐, 흐윽…….”
“에슨, 쉿. 울지 마. 네가 울면 늑대들이 더 몰려들 거야. 그것들은 전부 우리를 쫓아올 거고.”
에슨이 울지 않는다고 하여 늑대들이 그들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리안은 에슨을 달랬다.
에슨은 훌쩍이다가 잠들었다. 늑대에게 먹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가득한 순간에 잠이 들다니.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그때 아리안은 자신의 것을 제외한 다른 발소리를 들었다. 가볍지만 동시에 무겁고, 빠르지만 동시에 묵직한.
맙소사. 희망이 없었다.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이들을 물어뜯어 죽이기 위해 수많은 늑대가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안은 이를 악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제발 죽어, 쫓아오지 말고 그냥 죽으란 말이야!
미세한 소리였으나 오감이 곤두선 아리안은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늑대들이 가득 숲에서 감히 방심하고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숲의 끝이 보였고 언덕 아래로 마을이 보였다. 아리안은 아무렇게나 팽개쳤던 책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마을을 향해 달렸다.
마을의 울타리는 굳게 닫혀 있었으나 단순히 늑대들의 침입을 막는 용도의 것이었기 때문에 아리안이 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리안! 에슨!”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들의 부모가 울먹이며 그들을 끌어안았다. 아리안은 제 부모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부모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했다. 농사일을 하는 것이 티가 나는 진한 흙냄새.
“도대체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니! 얼마나 걱정했는데!”
“에슨이 심심해하길래 숲에 잠깐 데려갔다가 그만…….”
“맙소사, 아리안. 너희 둘은 괜찮은 거니? 늑대를 만나지는 않았고?”
아리안은 어떻게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늑대를 만났고 에슨은 늑대에게 물려 죽을 뻔했다고. 그런데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늑대가 죽어 있었다고.
설마 제가 한 짓은 아니겠죠……? 아리안이 조용히 속삭였다.
아리안이 다시 그 능력을 사용하고자 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능력을 다시 사용해 보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리안이 어렸을 당시는 주신 렌다를 믿는 사제들은 물론이고 신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성력을 가진 이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능력을 사용하게 되다니.
심지어 보통 능력이 아니었다. 손만 뻗었는데 늑대의 대가리를 터뜨릴 수 있는 능력이라니. 에슨과 아리안의 생명을 구한 능력이긴 하나 반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리안의 부모는 아무 말 없이 아리안을 안아 줬다. 만약 그 섬뜩한 능력이 네 것이라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듯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리안은 제 어머니를 끌어안으며 훌쩍였다. 바쁜 농사일 때문에 자식들에게 소홀하기는 해도 어쨌든 그들은 제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리안, 진정하렴. 너는 에슨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네가 조심하기만 한다면 누군가를 해칠 일도 없을 거야. 너는 착한 아이니까…….”
그날 아리안은 동생들이 모두 잠든 어두운 방에서 훌쩍이며 부모와 약속을 했다. 절대 그 능력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기로.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되, 그 능력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을 지켜 주기로.
***
열다섯의 아리안이 얻은 능력은 생각보다 쓸모가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들 수 없는 통나무를 번쩍번쩍 들기도 했고 원하는 곳을 떠올리기만 하면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기도 했다.
아리안은 이 신기한 능력을 두고 마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리안은 자신이 축복받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이런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은 그녀 자신밖에 없었으니.
그리고 그녀는 스물다섯 살 생일이 지날 때부터 점점 그 생각을 지워 갔다. 축복받은 능력? 아니, 그것은 사실 그녀에게 저주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리안의 시간은 항상 능력을 얻은 지 10년이 지난 스물다섯 살의 그해에 머물러 있었다.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아리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때 막내인 에슨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오히려 에슨보다 어려 보였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리안의 아버지가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 후로는 나이순으로 가르트, 네바에, 티타가 떠났다. 모두 빵을 꼭꼭 씹어먹듯 오랜 시간 생을 즐기다가 눈을 감았다.
티타가 눈을 감던 그때까지도 아리안은 스물다섯의 외양에 머물러 있었다.
눈물이 아리안의 뺨을 타고 떨어졌다. 가족이 떠날 때마다 한 번도 울지 않는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매번 그들의 손을 붙잡고 자신을 두고 떠나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마지막으로 에슨이 떠날 때 아리안은 자신이 축복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 저주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법을 사랑했다. 네바에의 생일이 되면 하늘에 불꽃을 터뜨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마법을 사랑했고, 태풍이 불어 나무가 밭에 쓰러지면 이를 해결하고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를 띄워 주는 마법을 사랑했다.
마법은 사랑했지만 마법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영원한 시간의 저주는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