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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79화 (완결) (7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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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없으면……. 나는 마탑에 있을 때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노아는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나를 떠났었다.

    없으면, 없으면. 어떨까. 나는 노아가 없어도 되는 걸까?

    아니, 안 된다. 안 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보고 다시 생각해 봐도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미 나는 네가 곁에 있는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으니.

    그럼 이게 사랑인가? 겨우 이런 별것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있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좀 더 방대할 줄 알았다. 노아가 하도 사랑, 사랑. 혀에 사랑이라는 말을 새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굴길래 사랑이 그만큼 위대한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자각했으나 온몸이 울릴 만큼 심장이 거세게 뛰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빠를 뿐, 나는 꽤 평온했다. 그래도 평소보다 감정이 고조된 건 맞았다.

    오래전, 오두막에서 노아를 향해 심장이 뛰었었던 것은 아주 찰나였다. 그가 나를 구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심장을 울렸었다.

    그 이후로 그를 보며 심장이 콩콩 빠르게 뛰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그의 손을 잡고 끌어낼까? 그리고 따스한 양 뺨을 쥐고 내가 느낀 것, 생각한 것, 확신한 것에 대해 주절주절 말해 버릴까?

    안타깝지만 그런 짓을 벌일 만큼 충동적이지는 못했다. 갑자기 행렬을 무너뜨리고 빠져나가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음악에 맞춰 빙빙 돌다가 노아를 만날 때까지 기다렸다.

    가볍게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묵직한 피리 소리를 따라갔다. 노래 한 곡이 끝났을 때쯤 나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노아를 만났다.

    “안녕, 노아.”

    나는 살갑게 웃고 발을 구르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보통은 남자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노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을 노아의 등에 얹었다.

    내가 먼저 춤의 종류를 바꿨고 노아는 묵묵히 나를 따라왔다. 정해진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추는 춤이라기보다는 넓은 공간을 무대로 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추는 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광장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광장에서 벗어난 데는 춤의 특성이 그러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우리가 추고 있던 춤은 축제에서 추는 일반적인 것과는 조금 거리가 먼 춤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어 봤자 방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춤을 어디서 배웠더라…….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수 년 전에 억지로 알베르트에게 배운 춤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불쾌해서 더 이상 춤을 출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불쾌해서라기보다는 이미 너무 많이 춰서 질려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벗어나자 우리의 춤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이다가 고개를 드니 분수대 앞이었다. 똑같은 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좋아 보이더라.”

    “좋았지. 사람들 틈에 섞이는 건 재밌으니까.”

    “나도 좋았어. 누나의 그 표정이.”

    “…….”

    “좋아해.”

    그리고 노아가 짧게 덧붙였다. 사랑한다고.

    너는 항상 같은 말만 한다고 지적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항상 같은 말이라도 듣기에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뭐?”

    노아는 꽤 놀란 듯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랑할지도 모르지. 미운 정이든 뭐든 결국은 애정이니까.”

    “…….”

    “이러면 좀 말이 애매한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사랑이 맞는 것 같아.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는 있으면 좋은 거고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없으면 안 되는 거래.”

    나는 광장에서 춤을 추며 생각했던 것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래?”

    “근데 지금의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거든.”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공간만큼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분수대에 고여 있는 물의 표면을 쓸면서 만지던 노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네가 매일 하는 말이잖아.”

    “그건…….”

    노아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내가 마탑을 떠났을 때를 기억해?”

    “당연하지. 네가 저지른 최고로 멍청한 짓인데.”

    나는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당시에는 힘들고 막막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니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과연 시간의 힘이란.

    “그럼 누나는 내가 그 멍청한 짓까지 저지르면서 떠났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낮게 가라앉은 노아의 목소리에 내 웃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누나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 아니까 떠난 거였어. 그 결정을 내리는 데 얼마나 나를 누르고 또 눌렀는지 알아?”

    “아니.”

    “그래, 모르겠지. 알았으면 나를 찾으러 따라오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분수대를 응시하다가 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주친 노아의 눈동자가 빛났다. 바다처럼, 깊고 깊은 심해처럼 공허한 눈동자가 조명을 받고 빛났다.

    그 눈동자가 오래전 그의 것을 닮아 있었다. 오두막에서, 내게 자신의 정체를 들켰을 때와 비슷했다.

    “근데 누나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누나를 쳐다보는 놈이 있으면 눈동자를 파 버려도 된다는 뜻이고 누나랑 어깨가 닿은 놈은 어깨를 아작내 버려도 된다는 뜻이야.”

    “……어떻게 하면 내가 한 말을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어?”

    “그래도 돼?”

    “그러지 마. 그러면 이 감정이 사랑인 것 같다고 했던 말 취소할 거니까.”

    “언제는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야?”

    “죄를 무작정 감싸 주는 건 사랑이 아니야.”

    갑자기 대화를 하다 말고 노아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한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다가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노아의 표정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노아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노아가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을 뻗어 그 남자를 가리키며 섬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새끼가 방금 누나를 쳐다봤어.”

    “……하지 마. 그리고 나를 쳐다본 게 아니라 분수대를 본 거잖아.”

    ……응. 노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툭 대답을 뱉었다.

    나는 물기에 젖은 노아의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잡고 들어 올렸다. 아직 손등에 묻은 물이 마르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문질러 닦았다.

    그 위에 입술을 비볐다. 노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완전히 접었다. 어느새 그의 매끈한 손등이 붉어져 있었다.

    “……반칙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거 해 준 적 없으면서.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했던 게 전부였잖아.”

    “그래서 싫은 건 아니잖아.”

    노아가 나머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목조목한 작은 얼굴은 한 손에도 다 들어갔다.

    “……가자. 돌아가자, 누나. 이 기분으로는 축제를 더 즐기지도 못해.”

    “그래.”

    축제는 며칠씩이나 계속됐지만 우리는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사토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노아가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겠다며 방을 하나 더 잡은 뒤 종일 방에 박혀 있던 탓이었다.

    돈을 아껴야 하니 방은 하나만 잡자고 할 때는 언제고.

    ***

    “노아.”

    쿵쿵. 나는 가볍게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이제 다음 마을로 가야 하거든? 마차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 빨리 안 나오면 나 혼자 출발할 거니까.”

    그제야 안에서 짐을 챙기는 듯이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노아가 숨을 몰아쉬며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왔다. 그는 여전히 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다음 목적지는 델로네 마을이야. 이번에는 더 열심히 조사했어. 다행히 축제 같은 건 안 열리더라고. 여관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야.”

    “……다행이네.”

    “……너 뭐해?”

    마차에 올라타는가 싶더니 그는 가방만 마차에 태우고 자신은 벽이 없어 뻥 뚫린 짐칸에 대충 앉았다.

    “조금 더워서.”

    “곧 겨울이야. 벌써 입김이 나오는데 더운 게 말이 돼?”

    “옷이 두꺼워서 괜찮아.”

    하나부터 열까지 앞뒤가 안 맞는 소리였다. 노아는 겨우 바람만 막아 주는 얇은 옷 한 장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오라고 설득을 해도 노아는 짐칸에 앉아 고집스럽게 버텼다. 추울 것이 분명한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우직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네가 앞에 타지 않겠다면야……. 나는 천천히 다가가 노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도망치기 전에 얼른 마부를 불러 말했다.

    “출발해 주세요.”

    그제야 노아가 짐칸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마차는 이미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마차를 멈춰 달라고 하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매섭게 물었음에도 노아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짐칸에 올라탄 그 순간부터 그는 쭉 반대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문제야. 그냥 내 얼굴 보기 싫어서 그래?”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제일 최근에 내가 노아한테 한 행동이 뭐가 있었지.

    설마 분수대 앞에 앉아 노아의 손등 위에 입술을 비볐던 게 문제인가? 갑작스럽게 깨달은 감정에 사로잡혀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는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게 기분 나빴나?

    처음은 걱정이었다. 내 행동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나, 하고. 하지만 그 이후 느껴진 것은 분노였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답답함이 확 치솟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곧바로 노아의 얼굴을 잡고 돌려 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여기 봐. 고개 돌리지 마.”

    “…….”

    “뭐가 문제야? 저번에 내가 허락 없이 손등에 입술을 비벼서 그래? 그런 거면 사과할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 뭐야.”

    노아가 꾹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얼른 말하라니까. 나는 노아의 손을 잡고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싫다고 도망쳤었으면서 어쩌자고 다시 걸어들어와.”

    “어쨌든 내가 직접 온 거잖아.”

    “나는 분명 놓아 줬는데 누나가 다시 들어온 거야.”

    “그래.”

    “확실히 대답해.”

    “그래, 맞아. 맞다고. 이제 됐어?”

    응. 그의 짧은 대답이 꽤나 진중하게 울려 퍼졌다.

    노아는 같은 질문을 집요하게 반복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그가 원하는 확신을 선물했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됐는지 그는 꽤 침착해 보였다.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돌리며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이쯤이면 됐겠지. 나는 이제 슬슬 잡고 있던 노아의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다만, 되려 노아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긴 덕분에 나는 오히려 그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시야에 노아의 얼굴이 가득 찼다. 마차 짐칸에서 이게 무슨. 싸구려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구식의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분위기에 취해 바보같이 눈을 감았다. 이마부터 시작해 점점 내려오며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덜컹덜컹, 마차가 힘차게 달리는 바퀴 소리가 조용한 들판 위로 울려 퍼졌다.

    -도망치세요, 아가씨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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