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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78화 (7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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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뻗은 손은 천천히 아이의 정수리를 향했다.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는지. 놀라는 얼굴, 웃는 얼굴, 당황한 얼굴.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전부 똑같았다.

아이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 미안. 내가 허락도 받지 않고…….”

“아니요, 괜찮아요.”

아이가 눈동자만 굴려 힐끗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내 머리카락 부드럽죠? 우리 부모님도 내 머리 쓰다듬는 걸 제일 좋아해요. 우리 가족 중에 은발을 가진 건 나뿐이거든요.”

아이는 한 손으로는 공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구불구불 꼬며 쫑알쫑알 수다스럽게 말했다.

“……너는 이름이 뭐니?”

“미셸. 미셸이에요.”

미셸. 상당히 중성적인 이름이었다.

“……누나는요?”

자꾸만 나를 힐끗거리며 내 반응을 살피기만 하던 미셸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아마도 내 이름을 묻는 듯했다.

“스텔라야.”

미셸은 입안에 내 이름을 넣고 이리저리 굴리며 발음해 봤다. 마르주 왕국 특유의 높낮이가 적은 억양으로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들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그래요. 그럼 안녕, 스텔라 누나. 나는 이제 친구들한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늦게 가면 나한테 잔소리를 할 게 분명하거든요. 특히 카른이 잔소리가 제일 심해요. 공도 제일 못 차는 게.”

속닥속닥 비밀을 말하듯 제 친구를 깎아내리는 모습이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셸은 나를 따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스텔라 누나. 만나서 반가웠어요.”

“안녕, 미셸.”

멀어지는 미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

주저앉아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미셸이 공을 가지고 오기만을 기다리던 카른이 돌아온 제 친구를 보며 꽥 소리를 질렀다.

“미셸! 저기서 도대체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네가 올 때까지 놀지도 못하고 한참을 기다렸잖아.”

“갑자기 저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서 그래. 그리고 애초에 공을 이상한 데에 찬 건 너잖아.”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너랑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이냐고? 미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여자를 쳐다봤다. 그가 카른과 말다툼을 하는 사이 이미 그녀는 너무 멀리 가 버려 점만큼 작아져 있었다.

아니. 일평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른이 옆에서 뭐라고 말을 걸었으나 미셸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어쩐지 고개를 쉽게 돌릴 수가 없었다. 미셸은 여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여자가 서 있던 그곳을 응시했다.

***

어느 날 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더 이상 환영이 보이지 않느냐고.

그 질문을 받고 나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어느 순간부터 환영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안 보여. ……최근까지는 그랬어.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노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도 과거에 나를 괴롭혔던 환영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새 다음 마을로 떠나는 날이었다. 이전에 베이커 거리에서 만났던 미셸이라는 아이가 자꾸 떠오르기는 했지만 미셸에 대한 생각을 꾹 누르고 마차에 올라탔다.

“내일 사토르 마을에서 축제가 열린대.”

“축제? 축제가 열린다는 말 들어 본 적 없는데.”

“축제가 열리는 걸 모르고 계셨습니까?”

앞에서 얌전히 마차만 몰던 마부가 갑자기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토르 마을의 축제는 화려하기로는 마르주 왕국에서 가장 유명합니다. 축제 때에 딱 맞춰 사토르 마을을 방문하신다니, 방이 남은 여관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부는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자 괜히 불안감이 들었다. 방문객이 많은 축제 때는 여관을 찾는 손님들도 많은 게 당연했다.

어떡하지? 행선지를 바꿔야 하나? 아니면 길바닥에서 노숙을 해야 하나?

“이다음에도 저희 마차를 이용하신다면 여관을 알아봐 드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사토르 마을에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여관이 하나 있는지라.”

그제야 나는 우리의 대화에 끼어든 마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하실는지요?”

“저는 사토르 마을에서 사흘간 머무르다가 델로네 마을로 이동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나는 이다음 마차비까지 합한 가격을 마부에게 건넸다. 그러자 마부는 활짝 웃으며 밝은 얼굴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사흘 후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여관방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애초에 우리에게 불리한 제안도 아니었고. 따로 마차를 잡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우리는 사토르 마을에 도착해 소개받은 여관을 찾아갔다. 마부의 이름을 대니 여관 주인은 반갑게 우리를 맞아 줬다.

그뿐인가. 여관 주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제국의 것임을 눈치채고 기꺼이 마르주 왕국의 옷을 한 벌씩 기부해 줬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제국의 옷과는 달리 마르주 왕국의 옷은 무릎보다 살짝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특징이었다. 활동하기에는 마르주 왕국의 것이 훨씬 편했다.

남성의 바지도 제국의 것보다 기장이 조금 짧았다. 제국의 바지가 발목을 전부 덮는 것이 특징이었다면 마르주 왕국의 바지는 발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았다.

“이제 갈까.”

어느새 해가 지고 축제가 시작될 시간이 됐다. 벌써부터 마을에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켜지고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아는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가 어색한지 광장으로 향하던 도중에 이따금 멈춰 서서 맨땅에 발을 굴렀다.

나는 노아의 손을 잡아끌며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고소한 음식 냄새를 풍기는 가게들과 사람들이 늘어났다.

“노아, 잠깐. 저거.”

나는 지나가다 어느 가게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노아는 내 소매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멈춰 서면 노아도 자연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손가락 끝은 닭을 통째로 굽고 표면에 양념을 발라 파는 가게를 향하고 있었다. 노아는 내 뜻을 알아채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이지만 맛은 최고였다. 벤치에 앉아 축제를 구경하며 음식을 먹고 있으려니 아리안이 떠올랐다.

아마 아리안이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그녀는 또 도박을 할 수 있는 가게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았을 것이다. 나는 음식을 입에 넣고 혼자 쿡쿡, 하고 웃었다.

둘이 먹으니 닭 한 마리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고된 마차 여행을 끝내고 처음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특히 더 맛있었다.

“손이나 씻으러 가자.”

사람들은 종종 분수대에서 손을 헹구고는 했다. 우리는 냅킨으로 먼저 대강 손을 닦아낸 후 분수대에 손을 집어넣었다.

먼저 손을 헹궈낸 노아가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뭐가 있나? 고개를 쭉 뻗고 기웃거렸으나 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아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광장이야.”

“그건 나도 알아. 근데 광장이 왜?”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데.”

노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뛰었다.

정말이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는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젊은 남녀가 빙글빙글 돌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어쩐지 멀리서부터 흥겨운 음악이 들리더라니.

“들어가자. 들어가자, 노아.”

“잠시만, 나는…….”

노아가 뭐라고 따지려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얼른 노아를 데리고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갑작스럽게 끼어든 불청객이 달갑지 않을 법도 하건만, 사람들은 방긋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고는 함께 빙글빙글 춤을 췄다.

음악의 한 파트가 끝나고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가야만 할 때가 왔다. 나는 노아의 손을 놓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또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노아는 기꺼이 내 손을 놓아 줬다. 뜻밖의 일이라 조금 당황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내가 다음 남자의 손을 잡은 것과 동시에 한 여자가 노아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노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노아와 손을 잡고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노아의 시선은 쭉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음에도 노아 쪽에 쓰이는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딱딱한 얼굴로 삐거덕거리며 흥겨운 춤을 추는 모습이 웃겼으나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몸이 왜 그렇게 딱딱한 통나무 같냐며 놀렸을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는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발을 헛디뎌 다리끼리 꼬일 뻔한 것을 겨우 피했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의 차이는 있으면 좋은 것과 없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눈을 감고 춤을 췄음에도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쪽이 더 긴장감이 넘쳐서 좋았다.

여행하는 내내 노아는 꽤 훌륭하게 동료 역할을 해냈다. 확실히 곁에 있으면 좋았다. 적어도 함께 있으면 외롭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기본적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은 깔린 것이었다. 그럼,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감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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