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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공작가의 기사 몰살 사건에 대해 사람들에게 아무리 물어도 결국 이곳은 마르주 왕국이었다. 제국에서 일어난 일을 마르주 왕국에서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묻고 물어 겨우 들은 소식 중에는 공작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공작의 호위기사인 코르넬 스테인 또한 실종됐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아리안이 과연 순순히 알베르트가 도망치도록 뒀을까. 손가락 한 번 튕기면 사람의 목을 꺾어 버릴 수 있는 아리안이?
진실은 아리안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리안에게 묻고 싶어도 그녀에게는 편지조차 보낼 수 없었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다고 해도 마탑의 주소를 아는 배달원은 없을 테니까.
오늘따라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이 길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알베르트는 죽었을까. 후계자가 없었을 텐데 그럼 모니카 공작가는 이대로 멸문하는 건가.
하지만 방에 들어오자마자 알베르트에 관한 생각들은 전부 사라지고 아리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에 관한 생각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아리안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나는 그 밖의 쓸데없는 생각들은 전부 던져 버리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
돈을 아껴야 한다며 마르주 왕국을 여행하는 내내 옆에서 귀찮게 군 노아 때문에 결국 여관 방은 하나만 잡게 됐다.
각자 방을 쓸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딱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밤이 되면 나는 침대에 눕고 노아는 소파에 눕는다. 그러나 도중에 불편해 잠에서 깨어나면 노아는 어김없이 침대에 누워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노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직접 노아의 팔을 떼어내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노아의 이름을 불렀다.
“노아.”
“…….”
“노아.”
“…….”
“……야.”
“…….”
진짜 잠든 거 맞아? 잠든 사람이 이렇게 힘이 세다고?
잠든 거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끙끙거리며 몸을 반대로 돌렸다. 노아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매끈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고 가는 속눈썹은 아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참 예쁘게 생겼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수도원의 사람들은 모두 친근하게 말을 거는 예쁘장한 그를 좋아했었다.
애니카와 함께 청소를 하다가 고아원을 지나치며 대강 봤을 때 또래들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하여튼.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나지막이 노아를 부르며 아프지 않게 그의 뺨을 두드렸다.
“노아, 일어나. 나 답답하단 말이야.”
“…….”
“노아.”
“…….”
“노아!”
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노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노아의 얼굴은 잠에서 막 깨어나 비몽사몽 한 얼굴과는 거리가 있었다. 마치 진작에 일어나 있었던 것처럼 그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혹시 깨어 있는 건 아닌가 했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눈을 뜬 노아가 배시시 웃으며 여전히 허리에 팔을 두른 채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았다. 목덜미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노아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스스로 뺨을 두드렸다. 노아의 미소를 보고 잠깐 정신을 놓을 뻔했다. 그는 자신이 예쁘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너 안 자고 있었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오히려 오기가 나서 두 손으로 단단하게 그의 뺨을 잡아 고정하고 다시 물었다.
“너 안 자고 있었지.”
“응.”
심지어 그는 당당했다. 좋게 말해 당당하고 나쁘게 말해 뻔뻔한 그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시 자라고 말하며 그의 눈을 가렸다. 그럴수록 노아는 더욱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창문 밖을 보니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나는 노아가 나를 끌어안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창문 밖이 조금 더 밝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몸을 뒤척거렸다.
마르주 왕국에 도착한 뒤 몇 번 지역을 옮겨 다녔다. 이번 마을은 마르주 왕국을 여행하며 방문한 네 번째 마을이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우리의 계획은 여행이었으니.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짧게 여러 곳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 마을에는 유명한 거리가 하나 있었다. 베이커 거리. 빵을 맛있게 굽기로 유명한 여행지였다. 베이커 거리가 얼마나 유명하냐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트리센 마을에서도 베이커 거리의 명성을 들어 봤을 정도였다.
나는 노아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허리에 둘러진 노아의 팔을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정말로 깊게 잠이 들었는지 힘을 쓰지 않고도 그의 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노아가 일어나기 전에 빵을 사 와서 아침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간단하게 겉옷만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잠들어 있던 노아가 내 손목을 잡았다.
깜짝이야.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일어났으면 기척을 내.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붙잡지 말고. 이러다가 어느 날은 정말 놀라서 기절할 것 같으니까.”
이어지는 잔소리에도 노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얼굴을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그런 노아를 보니 왜인지 며칠 전에 길거리에서 봤던 강아지들이 떠올랐다. 하는 짓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개였다.
“더 자.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나는 손을 털어 노아의 두 손을 뜯어냈다. 노아가 손에 힘을 주고 있는 탓에 쉽게 떼어지지는 않았지만 비몽사몽 한 사람의 손을 떼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아를 뒤로하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베이커 거리는 여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침 일찍 왔음에도 베이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과연 유명한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단 사람이 제일 적은 가게에 들어가서 줄을 섰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담백한 빵 냄새가 살포시 몸을 감쌌다.
“여기, 주문하신 빵 나왔습니다.”
주문한 빵이 나온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여관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바다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태양이 위로 떠올랐으니 한 시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나는 얼른 개별 포장된 빵들을 품에 안고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쯤이면 노아도 침대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악! 카른! 공을 어디에다가 차는 거야!”
그때 등 뒤에서 한 어린아이가 꽥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짚을 엮어서 만든 거칠거칠한 공이 데굴데굴 굴러 내 발치로 왔다. 굴러온 공은 통, 하고 내 다리에 부딪혔다. 나는 품에 빵을 가득 안은 채 그 공을 내려다봤다.
“카른! 또 헛발질을 해서 공을 이상한 데다가 차 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공이 굴러온 동선을 따라 한 남자아이가 총총 달려왔다. 뒤쪽에 아이 또래의 소년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것으로 보아 공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카른이 공을 잘 못 차서 자주 저렇게 헛발질을 하고는 해요.”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주절주절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공을 주워들었다. 아이는 시선을 공에 집중시킨 채 내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처음에는 아이가 내게 그렇듯 나도 아이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게는 품 안에 있는 빵들을 무사히 여관까지 옮기는 일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이의 빛나는 은발이었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세상에서는 명도가 낮은 색상의 머리카락이 가장 흔했다. 그와 반대로 명도가 높은 백발이나 은발이 가장 희귀한 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소설 속에서 알베르트가 특히나 더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머리카락이 천사의 그것을 닮은 백색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곳에서 은색 머리카락을 보게 되다니. 완전히 새하얀 백발과는 달리 은발은 햇빛을 받고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서 빨리 여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멍하니 바보처럼 아이를 쳐다봤다. 어쩐지 아이의 은색 머리카락이 익숙했다.
마침내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아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순간 팔에 힘이 빠질 뻔한 것을 겨우 지탱했다. 한참을 기다려서 산 빵을 전부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마주친 아이의 보라색 눈동자와 은발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어쩐지 단검에 박혀 있던 자색 보석과 비슷했다. 나는 홀린 듯 멍하니 아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쩌면 내가 그냥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검이 생성되는 것과 동시에 몽마의 자아는 사라진다고 하지 않았나. 애초에 이 아이는 인간이었다. 같은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본질까지 같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니 조급해졌다. 나는 얼른 친구들을 향해 달려가려는 아이를 불러세웠다.
“저기, 얘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신경 하나 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어서 그런지, 아이는 나를 돌아보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나는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을 뿐 겁을 먹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저 발에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닮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아이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관찰했다. 관찰당하는 듯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텐데, 아이는 오히려 눈을 크게 뜨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