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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드디어 마탑을 떠나는 날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천천히 어두운색의 돌로 만들어진 거칠거칠한 벽을 쓸었다.
한껏 감성적으로 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스텔라, 준비는 다 됐어?”
“아, 네.”
“그럼 일단 마을로 가자. 마탑으로 마차를 부를 수는 없으니까……. 마을에서 마차를 불러 줄게.”
손을 잡자마자 한순간에 마을로 이동했던 지난번과 달리 아리안은 우리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바닥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마법진을 보고 주춤거리자 아리안이 안심하라는 듯이 내 손을 잡고 토닥거리며 나를 마법진 위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푸른색의 작은 돌멩이를 꺼내더니 표면을 두세 번 두드린 다음 마법진 위에 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멩이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작은 돌멩이에서 나온 빛은 곧 커다란 마법진으로 이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축제를 즐겼던 마을의 으슥한 뒷골목에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으나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안은 능숙하게 우리를 데리고 사람이 많은 큰길로 데려갔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마차를 잡았다.
마부는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개중 무거운 짐들을 짐칸에 싣기 시작했다.
“미안해, 스텔라. 여기서 더 배웅은 못 해주겠네. 다시 돌아오려면 꽤 고될 것 같아서 말이야.”
돌아오려면 꽤 고될 것 같다니.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원하는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으면서 그게 무슨 말이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아리안은 억지로 나와 노아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그녀는 마부에게 돈을 쥐여 주며 우리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짐은 뒤에 실어 드리겠습니다.”
마부가 많지 않은 짐을 마차에 싣는 사이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아리안.”
“그래, 스텔라.”
“우리 또 만날 수 있겠죠?”
아리안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먼저 찾아와 줘요.”
나는 가만히 서서 그때를 떠올렸다.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위협받고 있을 때, 갑자기 허공에서 아리안이 나타나 우리를 마탑으로 데려왔던 그때를.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리안에게 하려던 말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왜인지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트에 적어 놓기라도 할걸.
“그리고 이거…….”
나는 가방을 뒤져 새까만 단검을 꺼내 중앙에 박힌 보라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보석의 색이 살로스의 눈동자 색과 같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됐다.
나는 찬찬히 단검을 쓰다듬다가 그걸 아리안에게 건넸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몽마의 검을 연구해 보고 싶다고 조를 때는 언제고, 아리안은 단박에 단검을 거절했다.
“앞으로 쓸데가 많을 거야. 나한테 주지 말고 네가 가지고 가.”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가지고 있어 봤자, 그리고 쓸데가 많아 봤자 무슨 상관이에요. 쓸 줄도 몰라서 구석에 처박아 놓을 바에는 아리안이 연구해 주는 게 훨씬 낫지.”
아리안은 몇 번이고 거절했고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앞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큼큼. 마부가 계속 옥신각신 다투며 시간을 끄는 우리에게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줬다.
아리안은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단검을 받아들었다.
“이제 나한테는 쓸모가 없단 말이야.”
아리안이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잠깐 노아와 대화를 하느라 듣지 못했다. 다시 말해 주기를 부탁했으나 그녀는 양쪽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노아와 아리안은 간단하게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제 정말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내가 마차에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그때 노아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강하지 않은 힘이었지만 나는 마차에 올라타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노아가 아리안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아리안이 노아보다 아주 조금 키가 컸기 때문에 노아는 살짝 고개를 들고 아리안에게 다가섰다.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으나 노아가 작게 비밀을 속삭이듯 말한 탓에 그 내용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 아리안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노아가 그녀에게 속삭인 내용을 전부 나불나불 불었다.
“이걸 나만 듣게 되다니, 너무 아까워. 스텔라, 방금 얘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고맙대, 얘가 나한테 고맙다고 했다고!”
제 딴에는 하기 힘든 말을 조심스럽게 했을 텐데 아리안이 그걸 큰소리로 다 말해 버렸다. 노아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하지만 고개를 돌려 바라본 노아의 표정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아, 그래. 노아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왠지 실망스러웠다.
“……보통 이렇게 놀리면 쑥스러워한다거나 뭐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나.”
“기대하는 반응이 아니라 유감이네요.”
말을 유감스럽다고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노아는 무감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방금 아리안과 노아 사이에 대화다운 대화가 벌어졌다. 아니, 이걸 대화다운 대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신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리안이 일방적으로 노아를 놀리던 모습만 봐 왔던지라.
게다가 노아가 아리안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다니. 그 무엇보다도 노아가 아리안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는 게 놀라웠다.
노아는 먼저 마차에 올라탄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한결 수월하게 마차에 올랐다.
“진짜 안녕, 스텔라.”
투명하고 깨끗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리안이 하얀 치아가 보이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노아. 안녕.”
채찍을 휘두르는 마부의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의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리안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점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뚫어져라 그 자리를 쳐다봤다.
덜컹덜컹. 나무로 만들어진 딱딱한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조그맣게 마차 안을 채웠다.
***
마차는 달리고 달려 아리안의 마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도시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다가 유명한 항구 도시 카라하였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원한 바다 내음이 풍겼다. 과연 항구 도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마탑을 떠나기 전 노아와 나는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마탑을 떠난 후에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일단 우리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알베르트를 만났던 그 나라를 다시 방문할 생각도, 여행할 생각도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대신 아르엘 왕국의 옆에 위치한 마르주 왕국을 목적지로 택했다.
마르주 왕국으로 가는 배편은 내일 아침이었다.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전까지 기다릴 장소가 필요했다.
“방 두 개 주세요.”
나는 은화 두 개를 여관 주인 앞에 내밀며 말했다.
여관 주인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은화를 한번 쳐다보고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노아를 한번 쳐다봤다.
그러자 노아가 은화 두 개 중 하나를 가져오며 덧붙였다.
“아니, 방 한 개만 주세요.”
나는 다시 그의 손에서 은화를 빼앗아 여관 주인에게 건넸다.
“두 개 주세요.”
“누나. 굳이 돈을 낭비할 필요 없잖아.”
결국 나는 주먹을 쥐고 있는 힘껏 노아의 뒤통수를 갈겼고, 노아는 내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뒤에야 입을 다물었다.
굳이 돈을 낭비할 필요 없다는 그의 말은 옳았으나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뭐가 더 있기는 있으니까. 나는 출발하기 전 아리안에게서 받았던 가방을 내려다봤다.
아리안이 자신이 쥐여 준 돈이 부족하면 팔아서 쓰라고 말하며 준 가방이었다. 꼭 사람이 없는 곳에서 열어 보라고 했었지.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달리는 마차 안에서 가방을 흔들어 봤었지만 딱딱한 물체들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나는 여관의 방에 들어와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가방을 열어 볼 수 있었다.
가방 안에 든 것들의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 안에는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영롱한 보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보석 하나를 들어 올려 눈앞에 들이댔다.
아리안에게 보석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다. 아리안은 보석보다는 금화를 더 좋아했으니까.
그나저나 아리안이 준 보석들은 하나같이 모니카 저택에서 봤던 보석들과 세공 방식이 비슷했다. 보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쉽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강 느낌이 비슷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보석을 빛에 비춰 보는 등 혼자 장난을 치다가 금방 질리고는 다시 가방에 넣었다.
내일 아침 일찍 보석상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보석들은 마르주 왕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에 팔아 버릴 것이다.
***
사흘에 걸쳐 배를 타고 도착한 마르주 왕국에서는 카라하에서처럼 짙은 바다 냄새가 났다.
사람들의 발음이나 억양이 제국과 다르기는 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자주 대화를 하다 보니 더 빨리 익숙해졌다.
마르주 왕국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마르주 왕국의 길거리를 거닐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어느 마법사에 의해 모니카 공작가가 풍비박산이 됐었다는 소식이었다.
범인이 아리안이라는 것을 유추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법사임에 동시에 알베르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