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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75화 (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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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너 아직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차마 이런 간질거리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혹은 여전히 사랑한다고 답하면? 나는 그 말에 대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나?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햇빛을 등진 노아의 의아한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탓에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곧 비가 올 것임을 보여주는 바람이었다.

    바깥에 오래 나와 있다 보니 추운 건지 노아의 마른 팔목이 잘게 떨렸다. 나는 그의 팔목을 빤히 쳐다봤다.

    신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꽤 건장하던 몸이었다. 지금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때보다는 야윈 상태였다.

    몸이 약해져 있다는 뜻이겠지. 이렇게 추운 곳에 더 있다가는 노아가 감기로 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들어가자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노아는 순순히 내가 끄는 대로 따라왔다.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열자 내부로부터 따듯한 열기가 올라왔다.

    일단 노아를 내려보내기 위해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노아가 나지막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를,

    “먼저 내려가.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지금 누가 누구를 잡아 주겠다는 건지. 몸 안의 독이 완전히 해독되지 않아 창백한 노아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으나 노아는 내가 먼저 내려가지 않으면 계속 이곳에 있겠다는 듯이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나였다. 나는 네모난 문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나는 아래로 향하는 사다리에 발을 올리면서도 계속 노아를 주시했다.

    아리안은 지금 자고 있으니 노아가 발을 헛디뎌 떨어져 버리면 그를 구해 줄 사람도 없었다. 노아가 너무 태평할 뿐이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 칸, 한 칸, 발을 움직이며 문 위로는 얼굴만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돌연 노아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 끝을 손에 움켜쥐었다.

    “……노아?”

    노아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고생의 흔적으로 생기 없이 메마르고 거칠거칠한 입술이 퍽 간지러웠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속삭이듯 조용히 물었으나 거센 바람 소리에 묻혀 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노아는 닿지 않은 물음에 답하는 대신 밝게 웃었다. 앞니까지 보이며, 아주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노아가 열세 살일 때까지만 볼 수 있던 밝은 웃음이었다. 그 후 5년 동안은 만나지 못했었으니까.

    “좋아해.”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마치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는 간단하게 답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온 대답은.

    “……싫어하지는 않아.”

    모호한 말이었으나 그는 용케 내 말뜻을 알아듣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손에 뺨을 비볐다. 어쩐지 커다란 개가 생각나는 행위였다.

    우리는 그대로 지붕에서 내려왔다.

    “사랑해 주지 않아도 돼.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노아의 말에 대충 호응해 준 후 그를 아래층으로 내려보냈다. 이곳에서는 아리안이 숙면을 취하고 있으니 조용히 해야 했다.

    아리안은 여전히 소파 위에 퍼질러져 괴상한 자세를 취한 채 자고 있었다. 혹시 아리안이 깨어났을 때 침대로 기어 올라갈 것을 생각해 나는 침대 대신 책상 위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배려가 무색하게도 다시 일어났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소파가 텅 빈 것을 보니 아리안은 이미 깨어난 것 같았다.

    아리안이 어디로 간 건지 알아보기 위해 방에서 나오니 아래층에서 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깨어난 아리안은 손봐야 할 곳이 있다며 마탑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나 아리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리안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마법 문외한인 내가 쉽게 도울 수 있을 만한 일들은 아닌 듯했다.

    아침 해가 막 뜨기 시작할 때부터 마탑을 돌아다니던 아리안은 점심이 되어서야 꼭대기 층으로 돌아왔다.

    “으으, 스텔라. 배고프지 않아?”

    아리안은 배를 움켜쥐며 중얼거리다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가져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평소와 다른 아리안의 모습을 지켜봤다.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테이블 위에 음식이 나타나는데 굳이 아래층까지 걸어가야 하나?

    아리안은 평소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계단을 오르내리며 손수 음식을 날랐다. 마탑에 돌아온 후 아리안은 어쩐지 전과 달라졌다.

    또한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기름이 가득한 고기 요리들을 먹어 치웠다. 아, 며칠까지는 아니어도 잠을 오래 잤으니 꽤 오랜 시간을 굶은 건 사실인가.

    평소의 아리안은 사람이 고작 저것만 먹고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소식했었고, 또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했었다. 물론 아리안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의 기준과 많이 다르기는 했지만.

    뭐, 그래도 배부르게 잘 먹는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겠지. 나는 안일하게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걱정을 지워 버렸다.

    포크로 접시에 담긴 샐러드를 찍을 때마다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 밖의 다른 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았다.

    왜인지 이 엄중한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애꿎은 샐러드만 집요하게 괴롭혔다.

    “스텔라, 있잖아.”

    아리안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덩달아 그녀를 따라 진지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제 향도 없어졌으니까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아. 나는 포크로 열심히 샐러드를 찍어누르던 행동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말을 잃었으나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아……. 그래야죠. 계속 아리안에게 신세만 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스텔라. 네 표정을 보아하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절대 떠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야. 그냥…… 마탑은 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거든. 내가 항상 지켜 줄 수는 없잖아.”

    “그건 이미 직접 경험해 봐서 잘 알고 있어요.”

    책장이 내 쪽으로 쓰러지던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입에 넣은 샐러드를 씹다 말고 으으, 하고 몸을 떨었다.

    “네가 원하면 너랑 저놈 둘 다 넉넉하게 살 집 정도는 쉽게 구해 줄 수 있어. 어때?”

    “아, 아니요. 집은 괜찮아요.”

    그렇게 하기에는 아리안한테 너무 신세만 지는 것 같고 해서…….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눌러 뭉개며 웅얼웅얼 말했다.

    “괜찮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너한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뿐이니까.”

    “아리안이 저한테 무슨 빚을 졌나요?”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있기는 있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

    “정확히 말해 줄 수 없다면 그냥 없는 일로 쳐도 되잖아요. ……그리고 굳이 떠나야 하나요? 아리안이 도서관에 마법도 걸어 줬으니 괜찮을 것 같은데…….”

    그때 아리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두운 흑색 눈동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떠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아리안답지 않은 미소였다.

    아리안다운 미소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저런 자애롭고 포근한 미소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그 미소를 보고 나도 모르게 내가 뱉었던 말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냥. 그냥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스텔라 네가 어리광부리는 건 처음 보네. 아, 그렇다고 네 어리광이 밉다는 건 아니야.”

    “아리안이야말로 오늘따라 평소랑 다른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평소의 장난스러운 기색이 오늘따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갑자기 떠나는 건 어떻냐는 말부터, 지켜 줄 수 없다는 말까지. 아침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나는 포크를 꾹 쥐다가 결국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이라면 무슨 생각이 있는 거겠지. 내가 떠나야만 하는 일이 있는 거겠지.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니까. 보이는 것보다는…….

    “……아리안이 그렇다면야.”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리안은 빈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구니 안에 든 비스킷을 하나 집어들고는 오독, 하고 씹었다.

    곧 아리안이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꼭대기 층에는 노아와 나만 남게 됐다.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꾹 짓누르며 마탑에서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아갈 때를 머릿속에 그려 봤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마탑에서 십수 년을 산 것도 아닌데, 벌써 아리안과 헤어져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 그나저나 노아의 의견은? 그에게도 떠날 것인지 혹은 이곳에 남을 것인지 의견을 물을 필요성이 있었다. 나를 따라오겠다고 할 것 같기는 하다만. 아리안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고.

    “노아. 너는 어떻게 할래? 나랑 같이 떠나고 싶어? 아니면 여기에 남을래?”

    “누나가 가는 곳으로 따라갈래.”

    내가 예상했던 답변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굳이 물어볼 필요 없었던 질문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짧게 대답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상하게 음식이 더는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

    아리안이 떠나는 게 어떻냐는 말을 꺼내고 나흘 정도가 흘렀다.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떠날 준비를 마쳤다. 아니,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기보다는 애초에 챙길 게 별로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살로스가 남기고 간 것이 분명한 단검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남아 있었다. 나는 단검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것도 가방에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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