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74화 (74/100)
  • -74-

    “아. 금방 왔네요, 아리안.”

    “응.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거든.”

    “근데 아리안, 얼굴에 뭐가 묻었는데…….”

    내가 그녀의 뺨을 가리키자 아리안이 놀라 몸을 퍼드득 떨었다. 마치 들키지 않아야 할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먼지가 묻었어요.”

    나는 소매로 그녀의 뺨을 닦아 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먼지만 묻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셔츠도, 두르고 있던 망토도 절반 정도 찢어져 있었다.

    맨손으로 암벽 등반을 하고 온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옷이 찢어질 수가 있나?

    “아…… 먼지. 난 또 뭐라고.”

    “그나저나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망토랑 옷이 되게 심하게 찢어져 있는데…….”

    “아, 그거……. 마법진을 발동시킬 때 필요한 재료가 부족해서 좀 구하러 갔다 왔어. 험한 산에서만 나는 재료라.”

    어느 날 모니카 공작가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에게 습격을 받았고, 공작은 기사 한 명만 대동한 채 어딘가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리 와, 스텔라. 이 위로 올라가.”

    다급하게 말을 돌린 아리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마법진 위였다. 아직 발동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법진은 푸른빛으로 옅게 빛나고 있었다.

    아리안이 마탑에 없는 동안 험한 꼴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마법진 위로 올라가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아리안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다독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스텔라. 지금은 내가 옆에 있잖아.”

    “……이게 무슨 마법진인지 말해 주면 안 돼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해 주기 곤란할 정도로 꼭꼭 숨겨야 하는 일인가. 나한테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뭐, 다 끝난 다음에 말해 주려고 했는데 궁금하다면야 말해 줘야지.”

    순간 아리안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아리안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향. 네 향을 없앨 수 있는 마법진이야.”

    이 말을 듣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향, 그놈의 향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노아도 그중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베르트부터 시작해 살로스까지.

    그런데 그 향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이 있다니. 차마 이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기쁨을 넘어, 그보다 훨씬 장대한 어떤 감정이었다.

    “나도 이런 마법이 있었다는 게 최근에야 생각이 났어. 네 동생이 가출만 안 했어도 훨씬 빨리 없앨 수 있었을 텐데…….”

    가출이라는 말에 나는 시원하게 웃었다. 아리안이 노아를 얼마나 어리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 거기에 서. 그렇게. 준비가 되면 말해. 바로 마법진을 발동시킬 테니까.”

    “저, 근데 아리안.”

    “응?”

    “…….”

    갑자기 오래전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마법진을 발동시켰다가 떼로 죽었다는 마법사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때처럼 마법진이 폭발하는 건 아니죠?’라고 물어볼 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어도 사실 아리안이 그 일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기는.”

    아리안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마법진의 끝부분에 손을 올려놓았다. 흐릿하던 푸른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빛은 순간적으로 반짝이고 다시 사그라들었다.

    “됐어, 스텔라. 이제 내려와도 돼.”

    “……?”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진에서 내려왔다. 내가 생각하던 마법진은 이런 게 아니었다. 뭔가 좀 더 웅장하고 화려하고…….

    그런 걸 기대했다고 하면 아리안이 비웃겠지? 나는 기대했던 바를 마음속에 꾹꾹 숨겼다.

    그때 별안간 아리안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얼굴빛을 보니 피곤한 것 같았다. 이틀을 내리 자고도 피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안녕, 스텔라. 나는 좀 더 자러 가야겠어.”

    “또요?”

    “지금까지 못 잔 잠을 몰아서 자야 하거든.”

    침대에서 자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아리안은 듣지 않았다. 그녀는 긴 팔다리를 소파 안에 구겨 넣고 잠을 청했다.

    아리안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내 팔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 봤다.

    애초에 나는 그 향이라는 걸 맡아 본 적이 없었다. 아리안이나 알베르트가 내게서 향이 난다고 말하길래 그렇다고 믿었을 뿐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아리안의 말대로 향이 사라진 걸까. 그럼 이전처럼 고생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걸까. 나는 다리를 모으고 그 안에 얼굴을 푹 묻었다.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아리안이나 노아가 깨어나면 물어볼 수밖에 없지.

    나는 그 후로 한동안 멀뚱멀뚱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아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리안은 방금 막 잠들었다.

    위험한 물건이나 마물이 들어 있는 방은 아리안이 전부 마법으로 막아 뒀기 때문에 위험에 처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혼자 남겨지면 괜히 불안한 게 인간의 심리였다.

    그래, 책. 책이라도 읽자. 도서관은 갈 수 없으니 나는 대충 책상 위에 놓인 책을 펼쳤다. 아리안은 내게 원하는 책을 마음껏 봐도 좋다고 허락해 줬었다.

    책의 제목은 아주 간단했다. 몽마. 수식어니 뭐니 그런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몽마, 그냥 그게 제목의 전부였다.

    몽마의 검에 관심이 많은 아리안이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몽마의 검에 관심을 보였었다.

    이 책 외에는 전부 제목이 어려워 보였다. 제목이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경우도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몽마에 관한 책을 펼쳤다.

    책에는 몽마에 대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인간을 유혹해 정기를 야금야금 빼먹는 악마라는 기본적인 정보부터, 몽마들의 자세한 습성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의자에 기대 몸을 까딱이며 이상한 자세로 책을 읽던 중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책이 바닥에 떨어지며 페이지가 아무렇게나 넘어갔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다시 내가 읽던 쪽을 펼치려고 마구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눈에 익은 단어가 보였다.

    [몽마의 검]

    나는 읽던 페이지를 찾는 것도 잊고 홀린 듯이 그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듯이 악마, 그중에서도 몽마는 특히나 더 이기적인 족속이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이 이기적인 족속, 몽마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바쳐 스스로를 희생하는 경우가 있다.

    몽마의 검은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몽마가 자신 스스로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찾았을 때.

    스스로를 희생한 몽마의 힘은 전부 검에 깃들고 몽마의 자아는 완전히 사라진다.]

    길지 않은 설명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주 짧았다고 할 수 있었다.

    누군가 의도한 듯이 그 순간에 적절하게 테오필을 찌를 검을 만들어 준 게 살로스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검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스스로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

    그렇구나, 그랬구나. 나는 천천히 책상 위에 놓인 단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 순간부터 나타나지 않길래 나를 떠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몰랐을 뿐, 그는 계속 내 옆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가 없는 검을 끌어안고 엉엉 울 정도는 아니었다. 고마운 마음만큼 살로스를 원망하는 마음도 컸으니까.

    나는 한동안 그냥 그렇게 검을 쳐다보기만 했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머리가 복잡했다.

    ***

    아리안은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일어났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맑게 웃고는 나를 보며 하는 말이,

    “제대로 잠을 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지금껏 살면서 처음 느껴 봐.”

    이틀 동안 잔 적도 있는데 이 정도 잔 걸로 뭘. 나는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리안의 성격은 항상 한없이 가볍기만 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노아는 그로부터 사흘 후에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몸 안에 독이 남아 있는지 간간이 마른기침을 하기는 했으나 며칠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일어났어?”

    “…….”

    거북이처럼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던 노아가 느릿하게 팔을 벌렸다. 말을 하지 않으니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안아 달라는 걸까.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 조심히 그를 끌어안았다.

    아마 이게 정답이었나 보다. 노아도 내가 그랬듯이 양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고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목에 얼굴을 박고 비비는 느낌이 퍽 간지러웠다.

    노아는 지금까지 내 향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과연 그는 향이 사리졌다는 사실을 눈치챘을까?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고, 향에 대해 빙 돌려서 물었으나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답하지 않자 나도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노아는 계속 침대에만 누워 있느라 답답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어디를 갔다 오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마탑의 지붕을 떠올렸다.

    이전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발견했었다. 아리안은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만, 몰래 조심히 갔다 오면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우리는 지붕 위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위로 올라갔다. 내가 먼저 올라간 뒤 몸이 좋지 않은 노아가 올라오는 것을 도와줬다.

    높이가 하도 높아 처음에는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까마득한 풍경을 내려다보느니 그냥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확실히 눈을 감고 있으니 뒤틀리듯 울렁이던 속도 평화를 되찾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쓸데없는 잡담을 할 정도로 여유를 되찾았다.

    “……공작이 암흑가를 없애 버린 건 알아?”

    “어떻게 알았어?”

    노아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공작 집무실에서 네가 가져간 보석을 봤어.”

    “그렇구나.”

    “거기에 네 소중한 사람도 몇 명 정도는 있지 않았어?”

    내 질문에 노아는 빠르게,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한테 소중한 사람은 누나밖에 없어.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래.”

    그때 갑자기 그에게 묻지 못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곳, 절벽에서 노아의 숨이 곧 촛불처럼 꺼져버릴 것이라고 믿어 굳이 묻지 않았던 그 질문.

    “노아.”

    나는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속이 울렁거릴까 봐 뜨지 않았던 눈도 지금은 뜰 수밖에 없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노아가 바로 나를 쳐다봤다. 나를 응시하던 그 푸른 눈동자가 하늘을 뒤덮은 색과 닮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