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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에 돌아온 후 나는 먼저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아리안에게 알렸다. 엉망이 된 도서관을 본 아리안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뭐라고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어쨌든 도서관을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건 나였다. 심지어 어떤 책들은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책장들이 저한테 쓰러졌어요.”
“…….”
“……미안해요, 아리안.”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인지는 충분히 알겠으니까. 책들이 너한테 심술이 났었나 보지.”
책들이 심술이 났다는 특이한 표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대충 끄덕였다. 아리안은 원래 특이한 사람이니까.
아리안은 나를 향해 활짝 웃어 주며 도서관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리며 문에 마법을 걸었다. 나는 그 후로 도서관의 문이 다시 열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한데 모여 노아가 아무도 모르게 마탑을 떠났던 이유를 물었다.
노아의 말을 요약해 보자면 대강 이러했다.
자신이 떠나는 게 내가 더 행복할 것 같아서 떠났다고, 말을 하지 않고 나온 이유는 미리 알리면 내가 가지 못하게 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아마 평생 내 옆에 남아 사죄하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코르넬과 만난 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숲을 가로질러 가다가 코르넬과 마주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본 코르넬이 바로 기사들과 용병들에게 자신을 잡도록 명령했다고.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결론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평생 내 옆에서 사죄하라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고 평소에 자기가 뭐 얼마나 나를 배려했다고 감히 내 행복에 대해 논하는지.
성인식을 치렀으면 무엇하나, 한때 암흑가의 주인이었으면 무엇하나. 내가 생각하기에 노아는 어딘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어리숙했다.
아리안은 그 말을 듣고 거의 뒤집어질 뻔했다. 겨우 그딴 이유로 그런 짓을 벌여서 일을 이렇게 키워? 아리안이 소리를 지르며 노아의 멱살을 잡았으나 노아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물러난 것은 아리안이었다. 아리안이 노아를 잡고 있던 손을 털어 내며 말했다.
“네 존재가 스텔라의 인생에 방해가 될 때는 아주 죽여 버릴 줄 알아.”
그리고 그다음으로 노아는 나와 그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리안에게 말했다. 이후에 그 일에 대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봐도 노아가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아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서운 눈빛으로 노아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도 충분히 네 존재가 스텔라의 인생에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해.”
으르렁대는 아리안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아리안을 쳐다봤다. 알베르트를 볼 때처럼 차가운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리안을 말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말리지 않았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괜찮겠지. 아리안 성격에 때리면 때렸지 팔다리를 잘라 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아리안이 천천히 노아에게 다가가는 모습까지만 보고 위층으로 올라간지라 그 후에 노아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방은 노아를 찾으러 나서기 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며칠간 관리할 사람이 없었던 탓에 먼지가 조금 쌓인 것뿐이었다.
노아를 데리고 숲을 미친 듯이 달린 탓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침대 위에 앉으려다가 부슬비에 젖은 옷을 보고 슬그머니 나무 의자 위로 자리를 옮겼다.
아, 그리고 방에 쌓인 먼지를 제외하고도 또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아리안의 책상 위에는 커다란 자루가 올려져 있었다. 처음 본 것이라 궁금증이 일기는 했으나 굳이 아리안의 허락 없이 열어 볼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리안의 몸에 피가 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노아의 팔다리는 멀쩡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두르고 있던 망토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는 소파 위에 늘어졌다.
“스텔라, 나 잠깐만 자고 일어날게.”
굳이 잠을 잔다는 사실을 보고할 필요가 있나. 물론 잠을 거의 자지 않는 아리안이 잠을 자겠다는 말은 꽤 새로웠다. 적어도 나는 그녀가 잠을 자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원래 한 달 정도는 잠을 안 자도 멀쩡한데…… 이번에는 부쩍 피곤하네…….”
“…….”
“나도 이제 늙었나 봐.”
저렇게 젊은 겉모습을 하고서 저런 말을 해 봤자 전혀 와닿지 않았다. 내 생각이 떨떠름하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아리안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고 일어났을 때 너한테 줄 게 있어. 금방 일어날게. 이따 보자.”
아리안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았다. 곧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하지만 금방 일어나겠다는 아리안의 말과는 달리 그녀는 이틀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닌가 하고 거칠게 깨워 보기도 했으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마침내 아리안은 쭉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참고로 아리안이 일어난 시간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낮이었다.
아리안은 몸이 뻐근한지 몇 번이고 허리를 비틀며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이틀이나 잤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아리안이 자고 일어났을 때 나한테 줄 게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리안. 저한테 줄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그렇지.”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자루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멀뚱멀뚱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더니 나에게도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아리안은 나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방이었다. 또 이상한 마물이나 마법진이 있을까 봐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것들은 없었다.
“어디 보자.”
아리안은 바닥을 두드리며 적당한 자리를 찾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커다란 원을 몇 개 그리더니 그 안에 이상한 문자도 몇 개 적어넣었다.
“그게 뭐예요?”
“마법진.”
아리안은 짧게 대답한 후 다시 마법진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마법진을 그리는 데 나를 왜 데리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 옆에 앉아서 아리안이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중간에 일이 막히는지 무언가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며 끙끙거리기도 했다. 그 위에 이상하게 생긴 재료들을 올려놓기도 했는데, 복잡해 보여서 그냥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미안 스텔라. 괜히 따라오라고 했네.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예의상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다리가 너무 저려서 차마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따라오라고 한 건지라도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때였다. 아리안은 마침내 쾌재를 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됐어! 드디어 됐어!”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됐다는 말이냐고. 아리안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내 의문에 답해 줬다.
“좋은 거야. 아주 좋은 거. 너한테도, 나한테도…… 는 아닌가. 하여튼 너한테 좋은 거야.”
하지만 그것마저도 명쾌한 답은 아니었다. 좋은 거, 그것도 아주 좋은 거라고? 아리안이 하고 있는 말은 전부 두리뭉실했다.
“스텔라, 마법진 위로 올라가. 그럼 내가 바로…….”
아리안이 신나서 떠벌리다가 한순간 말을 멈췄다.
“아니, 아니야……. 스텔라. 정말 미안한데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급한 일이 생각나서 말이야.”
“네, 뭐…….”
“미안, 정말 미안해. 위층에 올라가서 침대에서 쉬고 있어. 금방 올게.”
드디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나에게는 오히려 기쁜 일이었다. 오랜 시간 앉아 있느라 다리가 잘 펴지지도 않았다.
아리안은 마법을 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아리안이 사라진 곳을 잠시 쳐다보다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노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후로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리안처럼 한 번도 깨지 않고 쭉 자는 것은 아니었으나, 깨어 있는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고문실에서 얻은 상처가 꽤 큰 것 같았다. 외상은 아리안이 전부 치료해 줬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모니카 저택의 고문실에서 삼켜야 했던 온갖 약으로 인한 내부손상이 꽤 심하다고 했다. 아리안은 자신의 마법이나 약으로도 쉽게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노아는 이틀간 최소한의 생활만 하며 내리 잠을 자는 중이었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말고 노아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방의 풍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창문은 열려 있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며 그 아래에는 노아가 누워 있다.
쭉 아리안이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더니 벌써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창문을 통해 붉은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손을 뻗어 노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의 몸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심장은 콩콩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노아를 내려다보다가 창문을 닫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밤의 찬 공기에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다.
아리안의 그 급한 일이라는 건 마법진을 그리는 일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리안이 어딘가로 사라진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그녀는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