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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72화 (7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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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성한 데가 없던 노아는 부축하는 손이 사라지자마자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주저앉았다기보다는 쓰러졌다는 말이 더 맞겠다.

노아의 얼굴에는 수많은 감정이 한데 섞여 있었다. 의문, 당황, 절망, 뭐 그런 것들.

나는 노아와 시선을 맞추는 대신 알베르트를 쳐다봤다. 노아도 체념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아가 체념하는 모습이라니, 어쩐지 새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새로운 모습에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내 행동이 알베르트에게 보이지 않게 조심히 발로 쓰러진 노아를 건드리며 속삭였다.

노아가 축 처진 얼굴을 들어 올려 나를 쳐다봤다. 이제는 굳이 그게 무슨 표정이냐고 묻지 않아도, 그냥 대충 보기만 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베르트에게 가려는 거구나. 그래서 나를 버리려는 거구나. 그럴 거면 애초에 나를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아마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가 마음속으로 던지고 있을 질문에 반문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그를 버릴 거였으면, 애초에 내가 이 고생을 하며 그를 여기까지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노아에게는 향이 있고, 알베르트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하면 그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알베르트가 갑자기 쓰러지면 기사들이 당황해서 그사이에 도망칠 틈이 생길지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향, 공작이 가까이 다가오면 향을 꺼내.”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아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가 지켜보고 있는 탓에 표정 관리를 했는지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표정이 방금 전보다는 밝았다.

“……당신은 너무나도 친절합니다.”

그때 알베르트가 잘 들리지 않는 크기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내가 노아의 손을 떼어내는 모습을 보고 그를 저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함께 온 기사들에게 가만히 자리를 지킬 것을 명하고 홀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너무 친절해서, 그래서 저런 것 따위에게도 사랑을 줄 만큼.”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결국 노아를 경시하는 말이었다.

나는 알베르트가 다가올수록 절벽의 끝에 다가섰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할 만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알베르트가 더 가까이 다가올 것만 같았다.

내가 저 까마득한 곳으로 떨어질까 걱정이라도 됐는지 알베르트는 천천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이 손을 잡으십시오. 이곳은 너무 위험하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

“……공작님이야말로 어쩜 그렇게 친절하실 수가 있는지.”

나는 알베르트의 말을 중간에 끊고 말했다. 알베르트는 가만히 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의 부드러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너무 친절해서 제가 몇 번이고 도망치고 몇 번이고 거짓말을 했는데도 또 저를 믿으셨잖아요. 그만큼 저를 믿어 주셨는데 어떻게 친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나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노아.”

내가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노아가 품에서 향을 꺼내 들었다. 그는 많이 지쳐 보였으나 남은 힘을 전부 쥐어짜 알베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알베르트가 내 손을 뿌리치고 도망칠 새도 없었다. 애초에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위험한 절벽의 끝이었다. 쉽게 몸을 움직이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을 것이다.

노아가 알베르트를 향해 향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나와 노아는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노아가 다시 향의 마개를 덮었을 때, 나는 몽롱한 얼굴의 알베르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닿아 있던 그의 손을 무정하게 놓아 버린 지 오래였다.

“여기까지 와서 노아를 저버릴 거였다면 애초에 노아를 데리고 저택에서 도망치지도 않았겠죠.”

“…….”

“공작님이 말한 그 향에 코가 비뚤어져서 제대로 된 판단도 안 되나 봐요.”

당신이 말한 대로 머릿속까지 향에 중독돼 버렸나 보지. 거짓말에도 쉽게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해져 버렸나 보지.

역시나 향은 효과가 좋았다. 다른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베르트는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친 뒤에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해 봤자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알베르트는 끝까지 내게 시선을 고정하다가 눈을 감았다.

알베르트의 뒤로 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들이 모시는 이가 갑자기 가파른 절벽 끝에서 향에 취해 쓰러져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노아는 알베르트가 눈을 감는 순간 바닥에 쓰러졌다. 지혈했던 상처가 벌어졌는지 옷 위로 붉은 핏자국이 스며들었다.

나도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알베르트를 절벽에서 밀어 버린 후에 어떻게 해야 그의 기사들을 뚫고 도망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알베르트를 유인하기 위해 절벽 끝에 서 있던 게 문제였다. 알베르트는 하필 내 쪽으로 쓰러졌고, 나는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함께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비를 맞아 몸을 가누기 힘든 탓도 있었다.

함께 넘어가던 알베르트는 그를 구하기 위해 뒤에서 달려온 그의 기사들이 잡아 줬다지만, 나는? 나를 잡아 줄 사람은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절벽의 끝에서 뒤로 넘어가고 있는데 잡아 줄 사람이 없다니. 그건 곧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중 가장 또렷한 것은 노아의 얼굴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나온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노아의 거짓 눈물에 속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보며 울 때는 거의 항상 거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눈물이 거짓일 것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노아의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마저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나마 코르넬이 나를 붙잡기 위해 절벽 너머로 손을 뻗었으나 그도 나를 잡지 못했다. 누나. 나를 부르는 노아의 목소리가 그의 입을 떠나자마자 나는 뒤로 넘어갔다.

한참을 떨어진 것 같은데도 아직 강물에 빠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강물이 아니라 바위에 부딪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알베르트를 다시 만난 이후로 한순간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새가 아니니 다시 날아서 저 위로 올라갈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그냥 가만히 눈을 감고 곧 느껴질 통증을 기다렸다.

하지만 바위에 부딪히기 직전에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노아도 알베르트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

“스텔, 라…….”

“아리안…….”

아리안. 나를 붙잡은 것은 아리안이었다.

아리안은 다급하게 뛰어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마법사니까, 굳이 발로 뛰어온 게 아니더라도 어쨌든 다급하게 온 건 맞는 것 같았다.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아리안이 나를 찾으러 와 줄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었다. 마탑을 떠난 지 몇 주나 지났었으니까.

아리안은 숨을 몇 번이고 몰아쉬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걸 보니 할 말을 정하고 있는 듯했다.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결국 아리안이 한참의 고뇌 끝에 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그녀는 내 허리를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내 뺨을 움켜쥐었다.

바보 같은 아가씨. 평소에도 아리안에게 종종 들었던 그 상냥하면서도 모진 말이 지금처럼 반갑게 느껴지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아. 순간 마음을 조이고 있던 긴장이 끈이 툭 풀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니 잠깐. 왜 우는 거야. 이렇게 되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냥 울었다.

아리안은 허둥지둥하다가 결국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줬다. 그 다정한 손길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나는 뭐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크게 놀란 탓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다.

“아, 아리안…….”

“……그래, 스텔라.”

“저 아리안이랑, 노, 아랑 다시 축제도 가고 싶고…….”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지난번에 갔던 바다도 또 가고 싶고…….”

“그래. 파도가 위험하긴 하지만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다줄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더듬더듬 말했지만 아리안은 참을성 있게 내 말을 전부 들어 줬다.

“……그리고 그냥. 돌아가고 싶어요. 이곳에 있는 건 너무 싫고, 끔찍하고…… 알베르트, 그러니까 공작이 있는 이곳이 너무 싫어서…….”

“그래, 돌아가자, 돌아가자. 네가 오기 싫으면 다시는 오지 않아도 돼.”

나는 소매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 닦았다. 어느새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비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 돼 버리긴 했지만.

아리안은 나를 데리고 절벽 위로 올라갔다. 기사들에게 양팔이 잡혀 있던 노아가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아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알베르트의 기사들도 아리안을 보고 놀란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세상에 남은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본 마법사는 아리안이 유일했을 것이다.

그중 코르넬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는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리안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돌아가자 스텔라.”

아리안은 짐을 챙기듯 다른 한 손으로 노아를 들어 올린 후 짧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돌아가서 들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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