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71화 (71/100)
  • 71-

    “이거, 아직 쓸 수 있는 거 맞지?”

    노아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번처럼 또다시 옷을 찢어 노아의 상처를 지혈했다. 그리고 최대한 상처가 있는 부분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살이 덜렁거리는 광경이라니. 다시 그쪽을 봤다가는 먹은 건 없지만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굳이 아프냐고 묻지는 않았다. 살이 덜렁거리는데 아프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처음 봤을 때 약에 취한 듯 눈동자가 몽롱해 보였으니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우리는 당장 도망쳐야 했다. 알베르트가 저택에 돌아오기 전에.

    노아가 정말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완전히 기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아를 찾은 이상, 그리고 그가 향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지금 당장 나가는 것이 이익이었다.

    “가자. ……조금 힘들겠지만.”

    노아는 끔찍하게도 벌어진 상처 위를 손으로 감싸고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조용히 계단을 딛고 지하에서 올라왔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으나 노아가 비틀거린 탓에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구간 앞을 지키는 기사는 우리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게 아니면 기척을 느꼈음에도 노아가 빠져나왔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돌아보지 않고 있거나. 기사들은 기척에 예민하니 이쪽이 더 현실성 있게 들렸다.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노아가 품 안에서 향을 꺼냈다.

    “숨, 참아.”

    노아가 힘겹게 한 마디를 뱉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소매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노아는 자신까지 입과 코를 틀어막은 후 무색의 향을 마구간을 지키고 있는 기사를 향해 흘려보냈다.

    기사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콜록거렸다. 이전에 내가 그 향을 맡고 쓰러졌던 것을 생각하면,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쓰러졌을 시간이었다. 아마 기사라도 일반인보다는 조금 더 오래 버티는 것 같았다.

    뒤늦게 노아가 고문실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가 뒤를 돌아봤으나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기사의 무릎이 앞으로 꺾였다. 눈빛은 이미 몽롱했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기사는 독기를 품은 눈으로, 쓰러지는 와중에도 마구간의 입구에 달려 있던 종을 울렸다. 저 종이 저런 용도로 달려 있던 거였나.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두드리는 수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종소리를 들은 기사들이 우리를 잡으러 달려오고 있을 테다. 그 수가 얼마나 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게 기사들의 가장 피곤한 점이었다. 한 명이 도움을 요청하면 나머지가 전부 몰려오는 모습이 얼마나 개미 떼 같은가.

    “가자, 노아. 힘들겠지만 최대한 속도를 내 봐.”

    정문으로 나가다가는 도망치다가 되려 알베르트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우리는 후문으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후원이 하도 넓어서 마구간에서 후문까지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됐다. 이쯤이면 내가 노아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것까지 밝혀졌을지도 모르겠다.

    후문과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곳에는 그리 크지 않은 숲이 하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만에 돌아왔다고는 하나 모니카 저택은 트리센 마을 근처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이곳 지리에 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숲으로 가자, 노아. 숲으로 가서 숨으면 알베르트가 우리를 찾기 힘들어질 거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노아는 내가 이끄는 대로 묵묵히 따라왔다. 벌어진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데도.

    후문으로 빠져나올 때 언뜻 알베르트의 얼굴을 봤던 것 같기도 했다. 제발 내가 정문으로 도망쳤을 것이라고 여기기를. 나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살면서 이보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최근에 비가 왔었던 걸까. 땅은 물을 머금은 것처럼 질척거렸다. 발을 휘감는 징그러운 감각에도 우리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높다란 나무들 사이로 먹구름이 보였다.

    나는 노아를 물건처럼 끌어당기며 발이 움직이는 대로 도망쳤다. 커다란 나무가 나오면 방향을 틀었고 바위가 나오면 바위 위로 넘어 도망쳤다.

    그리고 마침내 숲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아래에 강물이 흐르는 높은 절벽에 다다랐다. 나는 순간 돌처럼 굳어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이런 소설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하필 이런 상황에 높은 절벽이라니.

    말을 탄 알베르트와 그의 기사들은 금방 우리를 쫓아왔다. 우리가 도망친 숲은 그리 넓지 않았고, 게다가 그들은 말을 탔다. 이렇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발 그가 우리를 찾지 못하기를 바랐었다.

    나무 하나 없는 절벽 위로는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눈을 뜨는 것마저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스텔라.”

    두꺼우면서도 부드럽고,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미성이 들려왔다.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에도 도망가겠다고 하더니 정말이군요.”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그 말에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노아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오로지 알베르트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부 알베르트에게 달려 있었다.

    “놈을 죽이겠다는 협박에 정말 포기한 줄 알았는데. 순한 양처럼 복종하고 순응한 줄 알았는데…….”

    알베르트의 시선이 노아를 향했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고 얼른 노아를 끌어당겨 노아를 내 뒤에 숨겼다.

    테오필이 했을 법한 말을 알베르트가 하니 끔찍하면서도 기분이 오묘했다. 물론 오묘하기보다는 끔찍한 기분이 더 컸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물이 세찬 바람을 만나 이리저리 꺾였다.

    “놈을 이용하면 당신을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스텔라. 오히려 저놈이 살아 있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도망칠 겁니다.”

    “…….”

    “놈을 죽일 겁니다. 당신이 놈을 데리고 도망치며 희희낙락거리는 모습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겠고.”

    희희낙락은 도대체 어느 부분이 희희낙락이란 말인가. 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친 기억밖에 없는데.

    갑자기 마음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정말 빗방울인지 알 수도 없었다.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쥐어짜듯 억지로 말을 뱉었다.

    “이…… 멍청아. 네가 말도 않고 마탑에서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

    “이건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내뱉는 비난에도 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미안.”

    지금 이런 사과가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데. 나는 노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알베르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알베르트의 표정은 항상 오묘했다. 예를 들면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덤덤해 보이는, 뭐 그런 표정들. 물론 표정을 보지 않아도 화가 나면 그의 온몸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지금 매우 분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베르트의 저 사나운 표정을 보아하니, 노아는 분명 죽을 테고…… 나는 어떻게 될까. 죽을까. 아니면 노아가 죽는 광경을 지켜본 채 살아남을까.

    그러다가 나는 문득 이전에 노아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종종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었다.

    당시에는 그게 징그럽게 느껴졌다. 내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감히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하지만 지금 이게 노아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설마 마탑에서 도망쳤던 게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렇게 증오했으면서도 이제는 그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답을 듣고 싶어 하다니! 나도 그와 함께 미쳐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물을까 말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론은 아니, 였다. 나를 사랑하든 말든 곧 그의 모든 것이 멎어 버릴 것이다. 초의 심지에 붙은 촛불이 꺼지듯 순식간에.

    나를 쭉 응시하던 알베르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면, 저택에서 당신의 옆을 지키던 하녀들을 죽이는 건 어떨까요.”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아를 죽이겠다며 으르렁거리다가 갑자기 하녀들의 목숨을 들먹이는 이유는 뭐지?

    “어떻습니까, 스텔라. 당신 때문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죽어야 하는 이들이 얼마나 안타까운가요.”

    아아, 알겠다. 그는 나를 성녀쯤으로 생각하고 있나 보다.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기꺼이 희생하는, 뭐 그런 사람 정도로. 이전에 내가 테오필을 찔렀다는 말은 기억이 안 나는 건가.

    “누나, 그러지 마.”

    내가 스스로를 희생할까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옆에서 노아가 내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노아가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할 때마다 왜인지 모를 찝찝한 기분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너는 끝까지 네가 이기적이었던 순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네 과거의 행동이 나도 내 마음대로 이기적이게 너를 내 옆에 둘 이유가 될 테니까.

    일단 알베르트가 생각하는 대로 맞춰 주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간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노아의 손을 떼어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