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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미소가 제 고유의 표정인 듯 여유롭게 웃고만 있던 알베르트의 표정이 저렇게나 일그러지다니.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저놈 표정 좀 보라며 마음속으로 깔깔 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놈이 강요하덥니까? 혹은 협박하덥니까, 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무르라고?”
나는 찬찬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옆에 있으라고 강요한 건 노아가 아니라 저예요.”
쩌적. 그때 두꺼운 와인 병이 알베르트의 손안에서 갈라졌다. 알베르트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박혀 있었으나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와인 병 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기사만큼 힘이 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악력만으로 저 두꺼운 병을 깨다니.
알베르트가 병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쳤다. 날카로운 조각이 그의 손바닥을 길게 그었는지, 일자로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잠시 상처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테이블을 손으로 쓸며 내게 다가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우리는 어느새 가까워졌다.
그는 상체를 숙여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혼잣말하듯이 말을 건넸다.
“당신이 코르넬에게 그랬다는데.”
밑도 끝도 없이 저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그 안에 숨은 뜻을 알아듣는단 말인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화법이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는걸요.”
“내가 당신에게 입 맞추면, 내 혀를 깨물어서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그러니 주의하라고 코르넬이 충고해 주지 뭡니까.”
정말 스쳐 지나가듯 짧게 한 말인데 그걸 또 기억해 놓고 알베르트한테 가서 전부 밀고하다니. 나는 코르넬의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멍청하고 충성심만 가득한, 아무것도 모르는 개처럼 행동할 거였으면 나한테 사소한 자비는 왜 베풀었는지.
알베르트는 먹이를 탐색하는 뱀처럼,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생은 나에게 너무나도 거슬립니다.”
“…….”
“나는 분명 코르넬에게 놈을 발견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놈의 숨을 끊고 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요즘 말을 듣지를 않는 건지.”
그렇게 말하는 알베르트의 표정은 서늘했다. 천사 같았던 첫인상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마치 뱀 같았다. 그를 보고 있자니 나는 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코르넬이 베푼 자비를 보고 사소하다고 칭했던가. 알베르트의 말을 들어 보니 코르넬은 사실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알베르트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노아를 살려 준 거였다니. 게다가 그는 기사들을 시켜 노아를 치료해 주기까지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코르넬이 목숨을 걸고 나를 위해 준 것이라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거기에 고마움을 못 느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거면 차라리 나를 도망치게 도와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그곳에서 죽었더라면 이렇게 기분이 나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알베르트는 계속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알베르트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나에게는 이렇게도 박한 당신이, 왜 놈에게는 그렇게 너그러워지는 건지…….”
“……?”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헛소리를 들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겁니까?”
이런. 알베르트가 내 표정 변화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대놓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할 테다.
자기한테는 박하고, 노아한테는 너그럽다라.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알베르트는 언제쯤 돌아가려는 생각인지.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저는 노아를 용서한 적이 없다고. 제 욕심에 의해서 옆에 두는 것뿐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제가 노아에게만 너그러운가요?”
그리고 하나 더.
“그리고 공작님께서 아셔야 하는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공작님이 저지르신 짓들은 노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베르트가 한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습니까.”
“…….”
“용서하지 않았음에도 놈을 곁에 두겠다라…….”
톡, 톡. 침묵 속에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나도, 그놈도 똑같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놈만 옆에 두는 이유가.”
그러던 중 순간 테이블을 두드리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부드럽게 내 뺨을 쓸었다.
알베르트의 손이 뺨을 지나 목덜미를 타고 쇄골까지 내려왔다. 손길이 퍽 농밀했으나, 동시에 거칠었다. 그는 조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리고 알베르트는 미간을 좁히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말 진지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막상 알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놈과 잤습니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알베르트의 그 갑작스러우며 이상한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칭하는 ‘놈’은 분명 노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고민해서 생각해낸 게 고작 그거야? 꼭 생각을 해도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을 한다.
나는 그냥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해서 대답하지 않은 것뿐이었는데, 알베르트는 이를 질문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놈을 변호할 리가 없지.”
“아닌데요.”
그제야 얼른 부정의 답변을 내놓았으나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알베르트의 눈동자가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처럼 매섭게 타올랐다.
“차라리 그때…… 그래, 차리리 어렸을 때 그 두 눈을 파 버렸어야 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뭐라는 거야? 설마 두 눈을 파 버렸어야 한다는 게, 열세 살 때의 노아를 말하는 거야?
“그게 무슨…… 어린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으시네요. 그리고 공작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다니까요?”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는다. 원래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그러게 왜 혼자 물 마시듯 와인을 입에 털어 넣어서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베르트를 노려봤다.
그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감정 변화 따위의 특별한 이유가 있어 얼굴이 붉어졌다기보다는, 술에 과하게 취한 탓인 듯했다.
그는 아기가 옹알이하듯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당신한테 이렇게까지 미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한 번만 쓰고 버리려는 게 전부였는데.”
“…….”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따지려고 해도, 당신의 얼굴만 보면 하려던 말을 전부 잊어버리고…….”
한 번만 쓰고 버리려고 했다라. 그것도 참 그거대로 쓰레기 같은 말이었다. 정말 나를 물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정말 그의 말대로 한 번만 쓰고 버렸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목덜미 주변을 쓰다듬던 알베르트의 손이 밀가루를 반죽하듯 내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알베르트의 눈은 이미 완전히 풀려 버린 후였다.
또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 신전에 있을 때, 그러니까 테오필 때와 다른 게 뭐지?
또 나는 이렇게 고통받다가 테오필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처럼, 알베르트를 죽이기로 마음먹나? 그렇게 내가 상처를 입혀 놓으면 노아든 누구든 와서 나 대신 그들을 끝장낼까?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테오필 대신 알베르트가 꿈에 나와서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테오필의 흔적에서 벗어났는데 또 그 끔찍한 악몽을 꾸면서,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살라고? 아니, 싫다. 다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알베르트가 점점 나를 뒤로 밀어붙였다. 이러다가는 의자와 함께, 그리고 알베르트와 함께 뒤로 넘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의자가 휘청거리는 걸 눈치챈 알베르트가 의자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아 의자가 넘어가지 않도록 고정했다.
의자와 함께 넘어지지 않았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의자가 고정된 덕분에 뒤로 도망갈 수도 없게 됐으니.
알베르트는 내 귀에 대고 꼬인 발음으로 속삭였다. 이제 그의 몸에서는 시원한 향과 달콤한 향이 동시에 풍겼다.
“수도원에서도 당신은 수치스럽다며 엉엉 울곤 했었죠.”
“…….”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수치스럽습니까?”
알베르트가 그렇게 물었다. 수치스럽냐고.
수치스럽냐고? 나는 몇 번이나 입안에서 그 문장을 굴려 봤다. 글쎄. 이전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당신인데 왜 그 대가는 전부 내가 받아야 하는 건지.
“수치스러워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공작님 아니에요?”
알베르트가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잘살고 있던 저한테 접근하셔서 제가 이 꼴이 났는데, 그 행위에 대해 수치를 느껴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공작님이죠.”
“못 본 사이에 대담해지셨군요.”
“당연하죠. 공작님의 혀를 깨물어 버릴 용기도 생겼는걸요.”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죽을 생각도 해 봤는데, 알베르트 혀를 깨문 대가로 죽는 것 정도야 뭐.
……물론 아직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살 수 있다면 살고 싶다. 알베르트에게 해를 끼치고도 살아남을 방법이 있기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