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애들같이 의미 없는 말싸움이나 하자고 저를 끌고 오신 게 아니잖아요.”
“그럼, 제가 무슨 의도로 당신을 데려온 것 같습니까?”
그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베르트가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의 눈동자는 탐욕에 찌들어 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일단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내가 한 걸음 물러나면 알베르트는 두 걸음 더 다가왔다.
알베르트가 가진 그 특유의 향이 물씬 풍겼다. 바다를 닮은 시원한 향. 그 순간 그를 제외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기사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조차도 지금 이 순간에는 멀게 느껴졌다.
“…….”
바다를 닮은 향이 갑작스럽게 다가오자 순간적으로 나는 숨을 들이켜는 것마저도 잊어버렸다. 알베르트의 향은 매혹적인 동시에 너무나도 위험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서 바로 알베르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어느새 내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
“…….”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같은 자세로 동상처럼 딱딱하게 서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알베르트가 이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알베르트에 대해 모르던 예전의 나였다면 이 화사한 미소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해사한 미소를 보며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는 사이 알베르트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냈다.
나는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마에서 알베르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옷으로 이마를 문질러 닦았다.
“장난이 너무 짓궂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에 비해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인데.
“하여튼, 스텔라.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긴 거리를 달려오느라 피로할 테니 몸이라도 녹이십시오. 하녀를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니. 알베르트의 말은 마치 내 집이 이곳 모니카 공작저라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알베르트가 천장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겨 종을 울렸고, 즉시 코르넬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공작저에 돌아온 코르넬은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공작저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묻는 말에 곧잘 대답을 했었는데, 이제는 노아의 상태를 묻는 말에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코르넬.”
나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가만히 코르넬을 불렀다. 역시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쉬십시오.”
그게 코르넬의 입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나를 어느 방 앞까지 데려다준 후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덩그러니 문 앞에 서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알베르트의 말대로 방안에는 하녀들이 몇 명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인사하며 나를 극진히 대우했다.
이전에 모니카 공작저에 머물렀을 때와 똑같았다. 그때도 하녀들이 나를 귀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히 다뤘었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알베르트의 손님이라고 해서 그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귀한 귀족 집 아가씨 같은 게 아닌데.
시설이나 대접이 호화스러워서 부담스럽기보다는, 그냥 이곳 자체가 싫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는데. 이런 호화스러운 저택보다 수도원의 작은 방이 나는 훨씬 좋았다.
이제 애니카는 수도원을 떠났으니까 이 마을에 없겠지.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알베르트가 내보내 줄 리도 없지만.
나는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창밖을 내다봤다. 해는 지고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푸른색과 붉은색, 그 중간의 애매한 색으로 물들었다.
그 색이 내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과 푸른색 빛이 서로 섞인 것과 비슷해서, 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 풍경을 지켜봤다.
이제 곧 밤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팔을 감싸 안았다.
***
밤이 되자 착실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하녀들은 뿔뿔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침내 나는 넓은 방 안에 완전히 혼자 남게 됐다.
째깍, 째깍. 시계는 규칙적으로 돌아가며 조용한 방 안을 소리로 채웠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계와 문을 번갈아 봤다.
차라리 자는 척을 할까? 그러면 알베르트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아니, 자는 척 침대에 누워 있어 봤자 알베르트를 더 자극할 뿐이다. 알베르트라면 아마 자고 있던 상대를 그대로 범하면 범했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둥근 테이블 앞에 앉아 알베르트를 기다렸다. 알베르트가 나를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애써 스스로에게 희망을 심어 주며.
그러나 내 희망을 깡그리 밟아 무시하듯 밤이 깊어 달이 높이 떠오르자 누군가 정갈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렸다. 그것으로 보아, 문을 두드린 상대는 알베르트가 분명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공작저는 어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상대는 알베르트였다. 그의 손에는 투명한 유리잔과 와인 병이 들려 있었다.
귀하신 공작님께서 하인을 시키시지 않고 손수 잔과 와인을 들고 오시다니요. 나는 속삭이듯 나지막이 빈정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알베르트에게도 분명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빈정거림에도 굴하지 않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왔다.
잔에 붉은 액체가 빠르게 채워졌다. 알베르트는 싱긋 웃으며 먼저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물론 나는 와인을 단 한 모금도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와인에 이상한 약이라도 탔을지 모르는 일이다. 알베르트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에 비해 알베르트는 새로운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때는 뻘쭘해서라도 상대한테 좀 마셔 보라고 권하지 않나. 정말 남의 눈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구나.
어느새 알베르트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새 취한 모양이었다. 혼자서만 무식하게 연거푸 잔을 기울일 때부터 알아봤다.
“취하신 것 같은데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는 건 어떠신지.”
그래. 차라리 술에 취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때 어떻게든 돌아가도록 설득시켜 보자.
“새장에 가둬 놓아도, 다리를 잘라도 도망치려고 한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 소중한 동생의 목숨을 인질로 잡을까.”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알베르트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는 노아의 목숨을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테오필의 경우와 비슷했다. 테오필, 그 쓰레기 같은 것도 나를 협박하는 데 노아를 사용했지. 나는 결국 협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에게 굴복했었고.
도대체가 왜 다들 나를 협박하는 데 노아를 못 써먹어서 안달들인지. 오랜만에 테오필이 떠오른 탓에 불쾌해졌다. 나는 얼른 머리를 털어내서 테오필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정말, 이제 이런 인질극은 지겨울 정도다. 그래, 항상 똑같은 패턴이 지겹다. 하지만 아무리 지겨워도 노아에 관련된 일인 이상 쉽사리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최대한 알베르트가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을 하는 것뿐이었다.
“……노아를 가지고 협박하시는 이상 이건 제가 질 수밖에 없잖아요…….”
나는 두 손을 서로 맞잡았다. 손의 온기가 정확히 가운데에 머무른다. 나는 말을 끝내고 두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알베르트에게서 말이 없길래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 당신이 이 협박에 넘어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당신은 지금 그토록 아끼는 동생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겁니까?”
알베르트는 아마 내가 암흑가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는…… 데요.”
노아를 들먹이며 협박을 한 건 알베르트인데 당황한 것도 알베르트였다. 술에 취해 살짝 꼬인 발음으로 대화를 나누던 그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평소의 또렷한 발음으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놈이 당신에게 저지른 짓을 아는데도 여전히 그가 소중합니까? 믿음에 배신을 당해 놓고서는,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저는 용서한 적이 없는데요.”
내 말에 알베르트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알베르트가 참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노아를 용서한 적이 없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노아가 죽기 직전까지만 죽도록 패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용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용서 타령이야.
“저를 멍청이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알겠지만, 믿었던 동생한테 발등을 찍히고도 바보처럼 허허 웃으며 넘어갈 생각은 아니에요.”
“……아니, 아니. 잠시. 그럼 도대체 왜…….”
“그리고 용서니 뭐니 그런 말이 공작님 입에서 나오는 것도 웃기네요. 마치 자기는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
“전 노아를 용서하지 않았고,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평생 저에 대한 죗값을 치르며 살아가라고 할 거예요.”
그리고 나는 강조하듯 덧붙였다.
“……제 옆에서.”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벼랑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던 알베르트의 얼굴이 종이가 구겨지는 것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