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나는 마차에서 내려 곧장 짐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숲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어느새 모이기라도 했는지, 아까보다 병력이 더 늘어난 상태였다.
코르넬은 빠른 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아마 그는 계속 내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려는 생각인 듯했다.
나는 더는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내 목적은 노아의 상태를 살피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참 웃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코르넬의 동정이라니. 알베르트의 명령으로 그가 죽인 사람이 몇 명일까. 아마 손발을 전부 사용해도 다 셀 수 없을 것이다.
짐마차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들도 용병들도 전부 마차에서 내린 후 한데 모여 불을 피우고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다.
“노아.”
나는 노아를 부르며 짐마차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문에 달린 천 같은 것을 젖히자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노아였다.
고개를 들 기력조차 없어 보이기는 했으나 의식을 차린 상태이기는 했다. 상처가 보이는 것만큼 깊지는 않았는지 어느새 피가 멎어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상태로 있으면 상처가 덧날지도……. 나는 고개를 돌려 코르넬을 바라봤다. 그는 내 시선을 맞받아치듯 즉각적으로 말했다.
“포박을 푸는 건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왠지 그런 말을 할 것 같았습니다.”
……물론 코르넬의 말은 사실이었다. 왠지 속내가 꿰뚫린 느낌이라 기분이 영 좋지는 않았다.
“사람을 순식간에 기절시키는 이상한 향 따위를 가지고 다니는 놈입니다. 그 향에 당한 저희 측 기사들도 한둘이 아닌지라.”
그러고 보니 숲에서 내가 뒤늦게 노아를 쫓는 용병들의 뒤를 쫓아갔을 때도 이미 두 명이 쓰러진 후였지.
하여튼 코르넬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결론은 안 된다는 거였다. 그를 설득해 보려고 아무리 여러 말을 지껄여도 그는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코르넬의 저 딱딱한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코르넬의 비겁하고 값싼 동정도 이제 슬슬 끝을 보이는 듯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코르넬을 따라 순순히 마차로 돌아갔다.
마차의 문은 철컹, 하고 다시 굳게 닫혔다. 코르넬은 나를 이곳에 가둔 채 어딘가로 걸어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코르넬과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전하께 전해 드려라. 스텔라를 찾았다는 전보다.”
아직 알베르트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었구나. 나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곳에서 긴 휴식을 취하려는 건 아니었는지, 곧 출발하라는 코르넬의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마차가 출발하고 곧이어 길 위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정확히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아리안이 우리를 찾아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대로 달려 모니카 공작저에 도착할 것이다.
정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구나. 그곳에서 겨우 도망쳐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는데 결국에는 다시 그곳으로.
나는 아직도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데 일조한 노아가 원망스러웠다. 네가 마탑에 가만히 있었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제 발로 떠났을 뿐인데 그냥 떠나게 두면 될 것을, 나는 왜 어리석게도 노아를 따라왔을까.
하지만 노아를 찾아 길을 나서기 전으로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내 선택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도 노아를 따라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마차가 거친 흙길 위를 달리자 크고 작은 충격들이 전해졌다.
***
“이런 젠장. 여기에도 없잖아.”
아리안은 신경질적으로 나무를 걷어찼다. 희미하지만 나무에는 분명 스텔라의 향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아주 잠깐이라도 스텔라가 이곳에 머물렀었다는 의미였다.
아리안은 스텔라가 머무른 흔적 따위를 쫓고 있다기보다는 그녀에게서 나는 향이 가리키는 방향을 하염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스텔라가 떠난 지 꽤 오래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향은 점점 희미해졌다.
급하게 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면 적어도 편지 한 장 정도는 남겨 놓지 그랬어. 그래야 내가 너를 찾으러 갈 수 있었을 텐데. 아리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치아가 닿는 부분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피를 흘려보낼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가벼운 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에, 무거운 물체에 눌린 듯한 흔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생긴 지 며칠이 지나 스텔라의 향만큼이나 희미해져 버린 웬 자국이었다. 아리안은 미간을 좁히고 가까이에서 자국을 관찰했다.
……마차. 마차의 바퀴가 굴러갈 때 생기는 자국이었다. 적당히 두꺼우며 적당히 가느다란 바퀴의 자국.
이런 울창한 숲에서 굳이 걸리적거리게 마차를 사용하는 미친놈들이 있나.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순간 행동을 멈췄다.
스텔라는 이곳이 소설 속의 세계라고 말했었다.
물론 당시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미 한때 그녀와 함께했던 마법사들이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겠다며 머저리 같은 짓을 한 전적이 있는데, 무엇을 믿지 못하겠는가.
스텔라가 자란 수도원은 트리센 마을에 있었다. 하지만 아리안은 그녀를 국경 지대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보통 제국민들은 거주지를 잘 옮기지 않는다. 처음으로 나고 자란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는 게 제국민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스텔라도 그랬어야 했다. 그녀도 어렸을 때부터 자란 트리센 마을에서 평생 살다가 그곳에서 눈을 감았어야 했다. 아니,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스텔라는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신전까지 왔던 걸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왜 성기사 단장에게 그런 짓을 당했으며 왜 국경 지대에서 성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걸까.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르비아는 어땠더라……. 스텔라와 르비아, 둘 다 그 망할 향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으니 비슷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아리안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르비아도 그렇게 괴롭게 살았는데, 과연 스텔라라고 달랐을까? 과연 그녀가 만난 미친놈이 성기사 단장이라는 그놈뿐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리안은 곧바로 트리센 마을로 방향을 바꿨다. 마침 마차의 바퀴 자국도 트리센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스텔라가 자란 마을. 그리고 아마도 꽤 최근까지도 그녀가 머물렀을 마을. 그러나 아마도 의도치 않게 떠나야 했을 그 마을.
“젠장, 스텔라. 너 때문에 내가 지금 개새끼같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니까, 다시 만나게 되면 이 마법을 포기해서라도 그 향을 없애 줄 테니까……. 아리안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다시 만나게 되면…….
아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트리센 마을을 향해 나아갔다.
***
마차는 몇 번이고 멈추고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마차가 멈출 때마다 코르넬은 마차의 문을 열고 잠시 동안 나를 내보내 줬다. 나는 그때마다 노아의 상태를 살피러 짐마차로 달려갔다.
또한 마차가 멈출 때마다 코르넬은 내게 먹으라며 수프를 건넸는데, 수프는 기사들이 식재료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끓이기만 한 건지 맛은 굉장히 형편없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계속된 여정 속에서 도저히 허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독을 넣은 것처럼 역겨운 향의 수프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날 나는 배를 부여잡고 속을 다 비웠다. 정말 수프에 독이라도 넣은 건가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수프에 들어간 식재료들이 상하거나 더러운 상태였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맛이 문제였던 것 같다.
코르넬은 속을 비우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강물에 깨끗하게 씻은 사과를 새로이 내게 건넸다. 나는 사과 한 알로 겨우 배를 채웠다.
나는 코르넬이 음식을 가져다 줬으니 그렇다 쳐도 노아를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함께 데려가라고 명령을 내렸던 코르넬마저도 노아를 외면했다.
그래서 나는 코르넬이 준 수프를 대신 노아에게 먹였다. 의식이 또렷하지 않아서 그런지 노아는 그 역겨운 걸 잘도 받아먹었다.
숲에서 출발한 지 이틀 정도가 지나자 노아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피는 멎었으나 그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릴까 고민했으나 곧 포기했다. 이마에 올리는 조그마한 물수건 따위로 해결될 만한 열이 아니었다.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웠다.
이러다 정말로 죽는 거 아니야?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계속 옆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정말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마차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코르넬에게 잡혀 마차로 질질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