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64화 (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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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망설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알베르트의 명령에 따라 나를 공작저로 데려갈지, 혹은…… 나를 그냥 놓아줄지.

나는 코르넬에 대한 소설의 서술을 한순간 의심했다. 공작의 명령에 따라 사람을 학살했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내용들.

저렇게 멍청하고 순진한 사람이 사람을 학살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 서술이 전부 실제이기 때문에 알베르트의 기사로서 일하고 있는 거겠지만.

“단장님……?”

코르넬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의 옆에 서 있던 한 기사가 재촉하듯 코르넬을 불렀다. 코르넬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

“단장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합니다.”

“단장님?”

“미안, 합니다…….”

그 말은 옆에 서 있는 기사에게 한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마차에 모셔라. 공작저로 돌아간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코르넬보다 순진하다고 해서 공작의 사냥개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우리를 붙잡았다.

“윽.”

기사들에게 강하게 붙잡힌 팔이 아팠다. 의식이 없는 노아조차 무의식 속에서도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단장님. 이 녀석은 어떻게 합니까?”

코르넬은 곧바로 노아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망설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노아를 죽이기를 망설인다기보다는,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보고 있기 때문에 노아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참 이상한 일이다. 코르넬이 왜 내 눈치를 본단 말인가. 나를 알베르트에게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 주제에.

나는 입술을 악물고 코르넬을 노려봤다. 노아를 쫓던 용병이 그를 죽이려고 하던 것도 겨우 막았다. 나무토막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내려치기까지 하면서.

내가 어떻게 저 녀석을 구했는데, 감히 노아를 죽이겠다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절대 코르넬 그를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그에게 해가 되는 것도 없었다. 내 증오는 이렇게나 무력한 것이었다.

코르넬과 내 시선이 중간에서 부딪혔다. 왠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코르넬의 눈매가 순해진 것 같다고, 나는 이 상황에서 잠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함께 공작저로 데려가라.”

“예……? 아, 알겠습니다.”

기사는 당연히 코르넬이 노아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사는 곧 신속하게 노아를 포박하고 짐마차에 물건을 던지듯 태웠다.

“콜록.”

노아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나왔다. 칼에 찔린 부상자를 거세게 포박하고 아무렇게나 짐마차에 던져 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코르넬은 잠시 노아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나는 기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코르넬은 나를 포박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나무가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진 마차에 갇혔다.

덜컹. 문이 닫히고 밖에서 문을 굳게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발로 차 보기도 하고 무에 몸을 부딪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차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결국 나는 마차의 문을 열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단단한 문과 대비되게 의자는 고급스러운 소파처럼 폭신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했다.

기사들이 노아의 상처를 치료해 줬을까? 짐마차에라도 태운 걸 봐서는 죽이려는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아리안은? 아리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가 마탑을 떠난 사이에 마탑에 돌아왔을까?

그러다가 문득 아리안이 처음에 노아와 나를 마탑에 데려왔던 이유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몽마의 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검은 지금 마탑에 있다. 그것도 눈에 아주 잘 띄는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올려져 있지.

아리안은 마탑에 돌아왔을 때 바로 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연구하고 싶어했던 그 검을.

만약 아리안이 순수한 의도로 노아와 나를 거둔 것이었다면 그녀는 우리를 찾으려고 들 것이고, 몽마의 검이 그녀의 목적이었다면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리안의 성격상 그녀가 우리를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리안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글쎄다. 내가 아리안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원래 어떤 사람이라느니 뭐라느니 판단하는 건 잘못된 일이려나.

그냥 나는 또 희망을 가질 뿐이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기를 바라며.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두 뺨을 손으로 때렸다.

괜히 이런 생각을 해서 무력해지면 안 된다. 도움만 받으면 뭐 어때. 스스로 해낼 수 없는 게 없으면 도움이라도 받아야지.

물론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한다고 해서 울적했던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온몸을 감싸고 있는 무력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아리안을 기다렸다. 모니카 공작저로 다다르기 전에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

마차의 문이 굳게 닫혔다고 해서 밖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기사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하지만 밖의 상황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창문이 있기는 했으나 아주 작았다. 심지어 높은 곳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맑고 푸른 하늘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애초에 마탑을 나올 때부터 계획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기는 했지만, 노아를 찾으면 어떻게 해야겠다, 정도의 간단한 설계는 존재했다.

그런데 코르넬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알베르트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다.

마탑은 그 위치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마탑에만 있었다면 코르넬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다. 그렇다면 이건 노아의 탓이 되려나.

이러다가는 끝없이 누군가를 탓하고만 있을 것 같아서 이 상황의 원인을 밝혀내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한참 거친 길 위를 달려가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곧 마차는 완전히 정차했다.

작게 소근거리는 수준이었던 대화 소리는 어느새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마 말을 타고 달리던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다고 했지?”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대체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 공작저까지 남은 거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듯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기 위해 최대한 가까이 벽에 귀를 붙였다.

그때 누군가 내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 풀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어서 가볍게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크 소리를 듣고 헛웃음을 뱉었다.

어차피 문을 열 수 있는 건 안에 있는 내가 아니라 바깥에 있는 사람인데 노크는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곧 문이 열렸고 나는 노크를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코르넬이었다. 그의 손에는 묽은 수프가 들려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상황에 수프를 먹을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짐마차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을, 말도 안 듣는 그 미운 녀석이 더 중요했다.

“식사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아를 만나게 해 줘요.”

“안 됩니다.”

코르넬은 단호했다. 그러나 그의 단호한 대답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부분이 멀쩡한지만 보겠다는 거잖아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또 거짓을 말하고 도망칠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 또라니? 그러고 보니 시장에서 코르넬을 속여 도망친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거였나. 그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그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노아를 데리고 도망칠 수도 없어요. 걘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요. 정신도 못 차리는 거 봤잖아요?”

수프 위로 피어오르던 증기가 점차 희미해졌다. 나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코르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코르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도 그랬다. 어느 기사가 그에게 노아의 처분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부디 내 추측이 옳았기를 빌었다. 그래야만 잠시라도 노아의 상처를 살필 시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더 간절하게 애원했다.

“잠깐만 보내 줘요. 이렇게 애원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까지 코르넬이 보인 행동들을 생각하면 그는 분명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불쌍하지도 않아요? 내 말을 들은 코르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나를 동정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랬는데, 저 눈빛을 보니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던 게 맞긴 맞나 보다. 그렇다면 노아를 짐마차에 함께 태운 것도 나를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이겠지.

생각해 보면 비겁한 행동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내가 그동안 무슨 일을 당했는지 쭉 봐 왔으면서 알베르트를 저지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동정이라니.

그저 동정만 하는 것은 쉽다. 동정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결국 코르넬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시선 끝에는 아마도 노아가 타고 있을 짐마차가 보였다.

바보 같고 순진한 코르넬. 나는 숲에서 마음속으로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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