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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63화 (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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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걸으면서 그들을 따라잡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걸을수록 그들의 소리는 멀어졌다.

    이러다가는 놓칠 것 같은데. 차라리 뛰어야 하나? 저쪽이 하도 시끄러워서 나한테는 신경도 안 쓸 것 같은데.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뛰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밟지 않도록 발아래를 주의하며 조금씩 속도를 가했다.

    정신없이 뛰다가 보니 마구 방향을 바꾸는 빛이 어느 순간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박힌 불안감이 빠르게 몸집을 키웠다.

    나는 발에 나뭇가지가 밟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어느새 내 손에는 방망이를 닮은 두꺼운 나무가 들려 있었다.

    무거운 나무를 들고 달리기에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헉, 헉. 숨이 차오를수록 목걸이에서 나온 빛도 점점 선명해졌다. 푸른 빛도 이제는 완전히 선명하게 보였다.

    드디어 사람의 형체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때부터 나는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늦었겠지만 지금이라도 노아가 쫓기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용병들이 그렇게 우르르 쫓을 정도라면 비싼 보석을 훔치기라도 했으려나.

    용병들이란 욕심이 많은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정말 값비싼 보석을 훔치기라도 했다면 잡혔을 때 노아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망할 새끼! 정말 끈질기기도 하군, 바퀴벌레처럼 말이야.”

    드디어 용병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엉망이 된 광경을 눈에 담았다.

    용병 중 두 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한 명은 노아의 머리카락을 세게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피. 분명 남자의 손에 묻어 있는 것은 피였다. 똑같은 색의 피가 노아의 머리에도 묻어 있었다.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노아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피가 미친 듯이 흘러나오는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라는 것을 알아챘다. 남자의 손에 들린 칼에는 노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가 묻어 있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노아를 찌르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번뜩이는 칼날은 노아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아, 안 돼. 긴 시간이 흐른 듯했지만 실제로는 아주 순간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심장이 북을 울리는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나는 쭉 손에 쥐고 있던 두꺼운 나무토막을 내려다봤다. 이걸로, 저 남자를 세게 치면, 남자는 쓰러질까?

    테오필을 찌르고도 한동안 악몽과 환영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잖아. 극복한 척해 놓고 이제 와서 다시 사람을 해치겠다고? 또 누군가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나무토막을 꽉 쥔 손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떨어서는 안 됐다. 저 남자가 노아를 죽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기를 몇 번 반복하자 떨림은 금방 멎었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두 번째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 이런 걸까. 나무토막을 세게 잡았더니 거친 나무껍질에 손바닥이 긁혀 따가웠다. 나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나무토막을 세게 휘둘렀다.

    첫 번째 공격은 제대로 남자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남자는 욕설을 지껄이며 뒤를 돌아봤다. 아니, 돌아보려고 했다.

    나는 남자가 뒤돌아보기 전에 다시 한번 나무토막을 휘둘렀다. 이번 공격은 정확히 남자의 머리에 꽂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앞으로 쓰러졌다. 남자가 쓰러지자 노아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손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남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남자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고 속을 게워 내거나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나무를 휘두른 나는 테오필을 찔렀을 때보다 훨씬 무덤덤했다. 오히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보다 나무에 기대고 앉아 있는 노아가 훨씬 걱정스러웠다.

    “노아.”

    나는 노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내 손등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 있었다. 노아의 머리에서 떨어진 피인지, 혹은 쓰러진 남자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손톱만큼 작았던 핏자국이 점점 크기를 키우더니 손등을 전부 채울 정도로 넓어졌다. 나는 바로 눈치챘다. 아, 또 환영이구나.

    핏자국에 뒤덮인 손으로 노아의 손을 세게 잡자 노아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을 뒤덮고 있던 핏자국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이곳까지 노아를 찾아오며 내가 굳이 그를 찾아내려고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동안 마음속으로 그를 욕하기도 많이 욕했다.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바보라고.

    하지만 이 미운 얼굴을 본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왜 너에게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평소 내가 바라던 대로라면 당장 너에게 떠나라고 윽박을 질러야 맞는데.

    내가 노아를 찾으려던 이유는 결국 이거였던 걸까? 이제 환영 따위는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그를 찾으러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유.

    “…….”

    나는 이 상황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노아는 피를 흘리다가 의식을 잃은 듯했다. 지혈은 어떻게 하는 거지. 나는 칼로 끔찍하게 벤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보통 지혈을 이렇게 하던데……. 나는 입고 있던 치마에서 그나마 깨끗한 부분을 찢어 상처를 세게 묶었다. 노아가 무의식 속에서 신음을 흘렸다.

    “…….”

    그러게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나와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나는 갑자기 치솟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노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물론 의식이 없어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노아를 마탑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과연 내가 노아를 부축하고 마탑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최대한 찢어진 배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그를 부축했다.

    마탑으로 돌아가면 왜 용병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추궁한 후에 몇 대, 아니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나뭇잎 같은 것들에 무언가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이번에는 정말 짐승인가?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고,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곧 그것이 한 곳에서만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우리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포위망을 좁히며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표정, 옷차림 하나하나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저 익숙하고도 지긋지긋한 남색 제복, 그리고 가슴에 황금색 실로 바느질되어 있는 독수리 자수.

    그들은 알베르트의 기사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기사들 사이사이에 용병들이 섞여 있었다. 이제야 왜 노아가 용병들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노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네가 아무 말 없이 마탑을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온 거지. 도망쳤던 당시 마차나 배 같은 기록이 남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 아리안의 마법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행방을 찾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을 텐데.

    아리안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주변에 성기사들이 몇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의 행방을 물어봤자 ‘갑자기 사라졌다’ 혹은 ‘마법사의 장난이다’ 따위의 두루뭉술한 말밖에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제국의 공작씩이나 되시는 몸이니 일반인들보다는 훨씬 정보를 모으기가 쉬웠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빨리 나를 찾아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젠장. 저 두껍고 치밀한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방법이 전혀 없으려나?

    그때 낯선 얼굴들 사이로 그나마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붉은 머리칼의 기사, 모니카 공작의 충직한 사냥개.

    “코르넬.”

    대화를 해 본 횟수도, 이름을 불러 본 횟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꽤나 어색한 일이었다.

    그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코르넬은 딱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또 공작님의 명령을 충직하게 수행하기 위해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해 줄 필요까진 없잖아.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와 대화를 시작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공작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해야 대화를 받아 주려나.

    음. 생각해 보니 그거 꽤 좋은 것 같은데.

    “우리를 보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의 주인을 죽일 거예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나는 역시나다. 알베르트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자 코르넬은 곧바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는 빠르게 그 말에 대꾸했다.

    “왜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역겨운 혀를 내 입안에 넣었을 때 콱 씹어 버리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텐데.”

    실행하기만 했었다면 진작 지옥 같던 시간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왜 진작 실행하지 않았었나 의심이 갈 정도로.

    테오필을 찔렀을 때처럼 알베르트의 혀도 씹어서 죽여 버릴걸. 왜 그때는 알베르트를 해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일찍 마음을 먹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좀 더 모든 걸 일찍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입술을 꾹 깨문 채 입을 다물고만 있던 코르넬이 입을 열었다.

    “알고 보면 그분께서도 불쌍한 분이십니다.”

    불쌍? 누가? 설마 내가 아는 알베르트가? 지금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헛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불쌍하지도 않아요.”

    알베르트 따위 혼자 불행하고 불쌍하게 죽어가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당신의 주인께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알면서도 나를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모니카 공작의 충실한 사냥개라느니 뭐라느니,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건 소설의 표면적인 서술일 뿐이었다.

    내 말을 듣고 코르넬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작의 사냥개는 무슨. 바보 같고 순진한 코르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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