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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62화 (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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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콜록. 아리안은 텅 빈 탑 내부를 둘러보며 작게 기침을 했다.

    젠장. 추운 곳에 오래 있었더니 감기라도 걸린 건가. 그녀는 따끔거리는 목을 따듯한 손으로 천천히 주물렀다.

    “스텔라?”

    한 번.

    “스텔라? 나 왔는데 어딨어?”

    두 번.

    두 번이나 스텔라를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이상하다. 보통 두 번 정도 부르면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잠들었나?

    그러나 옥탑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를 덮고 있는 이불도 걷어 봤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은빛의 먼지뿐이었다.

    혼자 있기 심심해서 꼬맹이랑 같이 있는 건가?

    똑똑. 아리안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가볍게 방문을 두드렸다.

    “스텔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스텔라는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잠깐 외출한 건가? 필요한 게 있어서 마을에 갔나?

    대신 아리안은 노아에게 스텔라의 행방을 물을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꼬맹아, 스텔라가 방에 없던데 어디 갔는지 혹시 아는…….”

    하지만 스텔라뿐만 아니라 노아도 방에 없었다.

    이게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스텔라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녀석이 그녀가 외출하는 데 따라가지 않을 리가 없으니.

    그렇다면 정말로 마을에라도 간 모양이지.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스텔라가 돌아오기 전까지 책이라도 한 장 더 보고 있어야지.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아리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스텔라가 마을에서 재미있는 동물이라도 발견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 들판을 떠도는 개들마저 집으로 돌아갈 때쯤.

    아리안은 삐딱하게 앉아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밤이 깊었음에도 여전히 스텔라와 노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뭐야.”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들 여행이라도 간 거야?

    ***

    나는 곧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곧바로 빛을 따라 길을 나선 것을 후회했다. 밤길은 너무나도 어두웠고 험했다.

    심지어 이곳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들판이었다. 언제 갑자기 들짐승을 만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걷다 보면 언젠가 강이나 호수가 한 번쯤은 나오겠지. 나는 그 생각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계속 걸었다.

    실제로 내 생각처럼 쭉 걷다 보니 넓은 강이 하나 나오기는 했다. 나는 강을 발견하자마자 지친 것도 잊고 얼른 달려가 물을 마셨다.

    나뭇잎이 떠 있는 강의 물을 마시다가 문득 내 행동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종일 숲에 처박혀 사는 사냥꾼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자 물을 마시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들과 숲에 둘러싸여 있는 강이라 그런지 물은 맑았다. 사람들이 발을 담그거나 빨래를 하는 탓에 뿌옇게 변한 여느 마을의 강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 다 좋았다. 강을 발견한 것도 좋았고 마침 발견한 강이 맑은 것도 좋았다. 뿐만 아니라 갈증이 해소된 것도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목걸이에서 나온 빛이 강의 건너편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젠장.”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껏 강을 찾았더니 이번에는 그 강을 건너야 한다니.

    생각해 보니 빛이 가리키는 길은 직선거리였다. 책 밖 세상의 내비게이션처럼 가장 가깝고 편리한 길을 알려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 아리안. 갑자기 손가락만 살짝 튕기면 한 번에 강을 건널 수 있는 아리안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나는 머릿속에 아리안의 얼굴을 그리며 푹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을 건널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강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좁은 폭이 나올 수도 있고, 그곳에는 강을 건널 만한 다리가 있을 수도 있다.

    달은 하늘 높이 떴다. 정처 없이 걸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는 일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걱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대로 걷다가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지면 어떡하지? 이러다가 노아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어떡하지? 아니, 애초에 이 목걸이가 가리키고 있는 게 노아가 아니면 어떡하지?

    나는 너무나도 무모하게 그를 찾아 나섰다.

    그렇다고 그 이유가 완전히 노아를 걱정했기 때문인가? 아니, 나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길을 나선 것이다.

    마탑의 모든 것이 나를 저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붉은빛을 띠는 책들은 나를 죽이려는 듯이 쫓아왔고 용도를 모르겠는 마법진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물건을 던졌다.

    “…….”

    누군가 내 귀에 겁쟁이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

    커다란 숲이 보였다. 강의 건너편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숲의 끝자락이 나를 반겼다. 숲 너머에는 또다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그 끝에는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사람의 움직임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였다. 그들을 자세히 보려면 인상을 찌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들이 백색의 갑주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색의 갑주. 테오필이 항상 착용하고 있던 갑주와 같은 색이었다.

    이는 곧 그들이 테오필과 같은 성기사들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신전. 저곳은 신전의 근처에 위치한 국경 지대였다.

    마탑과 신전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단 말이야? 나는 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거지?

    사실 마탑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에는 마탑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래전부터 아리안이나 다른 마법사들이 마탑에 무슨 조처를 해 놓은 것 같았다. 하긴. 수가 많지도 않은 마법사들인데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치는 않았었겠지.

    하여튼 노아의 행방을 찾더라도 국경 지대 방향으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높은 다리 위에서 빛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살폈다.

    ……놀랍게도 빛은 눈앞에 보이는 숲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목걸이에서 나온 빛이 푸른색 돌을 가리키고 있다면, 이 커다란 숲의 어딘가에 노아가 있다.

    나는 다리의 난간을 잡고 천천히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숲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입을 벌리는 것만 같았다. 숲이 왜인지 불쾌한 기운을 뿜어냈다.

    노아가 근처에 있다는 건 당연히 다행인 일인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국경 지대에서 처음으로 테오필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때처럼 온몸이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두 손으로 뺨을 두드리며 생각을 털어냈다. 테오필은 이미 죽었어. 테오필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긴장한 몸을 풀기 위해 다리를 몇 번 두드리고 숲으로 들어섰다.

    최대한 한눈팔지 않고 빛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간간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탐스러워 보이는 열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식사를 한 때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구나. 노아를 찾는 데만 집중하느라 배고픈지도 모르고 있었다.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나자 갑작스럽게 허기가 찾아왔다. 이제는 붉은빛보다 나무에 매달린 과일에 더 신경이 쏠렸다.

    얼핏 보기에는 사과처럼 생긴 과일이었다. 정말로 사과인지, 혹은 독이 있는 다른 열매인지는 과일이 손에 들어온 후에 판단할 생각이었다.

    팔을 조금만 더 뻗으면 될 것 같은데……. 나는 과일을 향해 팔을 최대한으로 뻗었다.

    마침내 손가락 끝이 과일의 표면을 건드렸다. 아, 됐다. 조금만 더…….

    그리고 그 순간,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며 검은 물체가 내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헉, 깜짝이야. 나는 과일을 따는 것도 잊고 얼른 나무와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동물, 동물인가? 하긴 이렇게 커다란 숲에 동물이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긴 숲의 끝자락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노아를 찾기도 전에 짐승에게 물려 죽게 되는 건가?

    하지만 곧이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그쪽을 쳐다봤다.

    “저쪽, 저쪽으로 갔다!”

    그들은 어두운 숲속을 밝히기 위해 커다란 횃불을 들고 있었다. 아마 조금 전에 빠르게 지나간 그것을 쫓고 있는 듯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서 사람들이 전부 지나갈 때까지 수풀 뒤에서 나오지 못했다. 곧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지나갔나……? 나는 그제야 수풀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이런 숲에 노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었던 건가?

    뒷모습을 보니 오래전 마을에서 가끔 봤던 용병들의 뒷모습과 비슷했다. 용병들이 이런 숲에는 무슨 일이지. 짐승이라도 잡으러 왔나.

    뭐, 용병들이 숲에서 뭘 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는 용병들에 대한 관심을 지워 버리고 다시 노아의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목걸이를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용병들을 피하기 위해 숨었다가 다시 본 빛의 방향은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똑바로 앞을 가리키던 빛이 갑자기 방향을 바뀌었다. 이제 빛은 앞이 아니라 옆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빛의 방향은 지금도 순간마다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살짝 위로 기울어졌다가 왼쪽으로 심하게 꺾이기도 하고, 아래로 쏠리기도 하고…….

    불안한 기분은 이것 때문이었나. 방금 전에 사람들이 분명 이쪽으로 지나갔었지. 나는 흙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바라봤다.

    젠장. 빌어먹게도 빛은 그들이 향한 방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나는 제발 용병들에게 쫓기던 그 들짐승 같은 물체가 노아가 아니었기만을 빌었다.

    짜증 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고 바닥에 찍힌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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