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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괴상한 마법진부터 괴이한 마물까지. 하도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 그런지 나는 덜컥 겁부터 먹었다.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들이 붉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핏빛 책들이 사람 같은 끔찍한 신음을 질렀다.
다리가 굳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책장이 내가 앉아 있던 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쓰러지는 책장을 피했다. 책장은 다른 책장과 함께 먼지를 피우며 쓰러졌다.
지금 이 상황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것만은 충분히 알겠다. 일단 이 미친 곳에서 도망쳐야겠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쿵. 계속해서 책장이 쓰러지며 나를 쫓아왔다. 젠장, 아리안이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한 게 아니라 저 책들이 갑자기 나를 죽이려고 쫓아왔다고 하면 믿어 줄까?
아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안은 이 미친 곳에 사는 장본인이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쓰러지는 책장을 피해 도서관 밖으로 몸을 날렸다. 넘어지는 바람에 계단에 무릎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야……. 계단에 주저앉아 욱신거리는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데, 등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책장이 전부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책들은 여전히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책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무릎에서 피가 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도망치는 게 제일 중요했다.
도서관에서 빠져나오자 책이 내 목숨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꼭대기까지 올라와서 문을 잠근 후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책장들도 갑자기 내가 있는 쪽으로 쓰러질까 봐 무섭기는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꼿꼿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나저나 도서관에서 아리안의 일기장을 가져와 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가져다 놓기는 무서운데. 아리안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모르겠다.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괜히 일기장을 다시 가져다 놓으려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보다는…….
커다란 소란이 있었기 때문에 한 번쯤 나와 볼 법도 한데 노아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방에만 박혀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창고의 음식도 그대로였다. 내가 가져가는 음식을 제외하면 창고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설마 식사를 거르고 있는 건가?
지난번에 노아가 떠나겠다는 말을 한 후 우리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도 일부러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고도 벌써 사흘 정도가 흘렀다. 그런데 음식이 줄어들지 않았다니.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경 쓰지 말자고 아무리 스스로를 세뇌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나는 결국 빵이 담긴 그릇을 들고 노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나무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탑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자고 있는 건가 싶어 몇 번이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끝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쳐들어갔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간 바람이 부드럽게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그곳에는 노아가 없었다. 커튼만 바람을 받고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잠깐 어딘가 나갔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의자 위에 앉아 빵을 들고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노아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노아의 침대 위에 누워 천천히 빵을 씹어먹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노아는 방에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노아를 찾아 탑을 뒤지기 시작했다.
괴상한 마법진이 그려진 방도, 괴이한 마물이 갇혀 있는 방도, 나를 죽일 듯이 쫓아오던 책장이 있는 도서관도 다시 가 봤다.
각 방의 문을 열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리안은 지금 탑에 없었다. 그리고 탑을 다 뒤져 봤지만 노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 탑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갑자기 마물이 탈출해서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면 어떡하지? 마법진이 발동돼서 나를 끌어당기면 어떡하지? 책들이 이곳까지 쫓아오면 어떡하지?
노아는 어디에서 마음 편하게 쉬고 있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맛이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혼자 계속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면 곧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달려 탑의 1층까지 내려갔다. 무작정 문을 열고 탑에서 빠져나왔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멍청하게 그냥 뛰었다.
마탑은 인적이 드문, 아니, 주변에 사람이 아예 없는 들판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다. 그 말은 즉 아무리 뛰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뛰다 보면 이전에 아리안과 노아와 함께 갔던 마을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계속 뛰었다.
내 체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높이 떠 있던 해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지쳐서 뛰지도 못하고 천천히 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걷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하늘의 암흑과 빛이 오묘하게 섞였을 때쯤 나는 멀리에서 빛을 발견했다. 마을에서 축제 기간에 밝히는 빛이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바스라질 듯 힘들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갈증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마을에 가면 우물이 있을 것이다. 일단 갈증부터 해결하고 노아를 찾을 생각을 하자.
시끌벅적한 마을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우물이 보였다. 그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얼른 우물로 달려가 두레박으로 물을 떴다. 빨리 입을 대고 마시려는데, 옆에서 물을 기르던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쓰는 두레박에 내 입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두레박에 담긴 물을 다시 손에 담아 마셨다.
그중 절반 정도는 손바닥에 담기지 못하고 넘쳐서 바닥에 흘렀다. 옆에서 물을 기르던 여인들이 힐끗힐끗 나를 쳐다봤다.
와중에 나는 그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봤다. 한참을 뛰어서 냄새도 날 테고 땀도 났을 것이다. 그리고 허겁지겁 물을 마시는 꼴이라니…….
그만 상상해 보도록 하자. 나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우고 두레박을 내려놓았다.
나는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앉아서 생각을 정리할 만한 곳이 필요했다.
마침 지난번에 아리안을 기다리며 잠시 엉덩이를 붙였던 나무 상자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위에 주저앉았다.
며칠 만에 다시 왔음에도 이 거리는 변한 것이 없었다. 저번과 똑같이 꼬치 가게 위층에서는 도박판이 열리고 있었고 길에서는 작은 소녀가 돌아다니며 꽃을 팔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 많은 사람 중에 노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설마 한 명도 없으려나.
물론 이 마을에도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 상인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공짜로 정보를 줄 만큼 호구 같은 정보 상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아리안이 도박으로 떼돈을 벌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돈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노아 그 멍청이는 어디로 간 거냐고.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푹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내 무력함이 너무 원망스러워졌다. 차라리 나도 아리안처럼 힘이 있었더라면 노아를 찾을 수 있었을까.
이제 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달이 떠올랐다. 마을은 어둠으로 가득 찼으나 곧 마을 사람들이 밝힌 불빛을 받고 밝아졌다.
해가 지자 어둠을 뚫고 붉은빛이 뻗어 나갔다. 나는 그 빛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시만, 붉은빛?
그 빛의 시작은 내가 목에 걸고 있는 붉은색 목걸이였다.
처음에는 이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빛이라니.
목걸이에서 나왔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다음은? 왜 갑자기 목걸이에서 빛이 나오는 거지?
어느새 나는 멍하니 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빛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빛이 사람의 몸을 뚫고 지나가도 그들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빛은 사람과 건물을 뚫고 이어졌다. 나는 길을 따라 걸었다. 넋이 빠진 것처럼 걷다가 사람과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마을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빛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넓은 들판 위로 빛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더 이상 걷지 않고 그 빛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빛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걸까. 빛은 내가 마탑에서부터 걸어온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목걸이의 돌을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자 빛이 향하는 각도가 조금 변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빛은 미세하게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먼 곳을 가리키며.
나는 유심히 빛을 응시했다. 빛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최대한 멀리 내다봤다.
그때 나아가던 붉은 빛에 얼핏 푸른색의 빛이 섞여서 보였다.
빛의 끝부분에서 얼핏 보인 푸른색의 빛, 그리고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와 어떠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붉은 빛.
설마. 나는 이전에 아리안과 바다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아리안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며 난파선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보여 줬었다.
나는 각각 붉은색과 푸른색 돌이 달린 목걸이들을 골랐었다. 그중 붉은색은 내가 갖고 푸른색은 노아에게 줬었지.
정말 그런 걸까. 정말 이 빛의 끝에 노아가 있는 걸까.
평소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마침 주운 목걸이에 그런 놀라운 기능이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런 우연이 있겠느냐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판단할 정도로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다면 무작정 탑에서 뛰쳐나오지도 않았겠지.
나는 다시 내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서, 그리고 붉은 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너를 찾으러 가는 걸까. 이제는 악몽도 자주 꾸지 않고, 환영도 더 이상 나한테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설마 그새 정이 들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새는 아니지. 정은 아주 오래전, 십수 년 전부터 들었을 테니까.
게다가 그 녀석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데 고작 며칠 동안 함께 지낸 것 가지고 모든 걸 용서하고 정이 들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설마 나는 환영을 핑계로라도 너를 보러 가고 싶은 건 아닐까.
……아,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 나는 머리를 털어내고 생각을 비웠다. 그냥 지금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내 행동의 이유는 노아를 만나고 그 후에 생각해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