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60화 (60/100)

-60-

“늙더니 성질만 괴팍해져서는.”

“뭐?! 빨리 안 가?!”

“예, 예. 이제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갈 겁니다.”

아리안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두막에서 몇 걸음 멀어졌다. 그녀는 벨라프에게서 받은 종이를 다시 한번 보고는 대충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

“나는 이렇게 해야 안 잃어버리는 거뿐이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시끄러워, 시끄러워. 어차피 이미 나한테 준 거잖아.”

아리안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능글맞게 웃었다. 그에 비해 벨라프는 답답해 죽을 맛이라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아리안은 소리 내 깔깔 웃었다.

“안녕 할아…… 아니 벨라프.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재밌었어.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보자고.”

“그래. 그때쯤이면 네놈이 이미 마법을 잃은 후겠군.”

“이 할아범이 끝까지…….”

아리안은 벨라프를 노려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 재미있기는 했다. 르비아도 같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리안은 잠시 텅 비어 있는 벨라프의 옆자리를 응시했다.

“이제 진짜로 갈 거야. 건강하게 지내.”

“괜한 걱정하지 마라. 네놈하고 어울려 지냈던 탓인지 죽고 싶어도 장수하고 있으니까. 정말 저주가 옮은 모양이로군.”

아리안은 벨라프에게서 받은 종이에 적힌 첫 번째 재료를 생각하며 머릿속에 이동할 위치를 떠올렸다. 머릿속이 정리됐을 때,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아리안은 모습을 감췄다. 벨라프는 아리안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혀를 차며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

아리안이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슬슬 그녀가 걱정됐다.

걱정하는 대상이 아리안인 만큼, 무슨 큰일을 당했을 거라는 걱정만큼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돌아오지 않으니 큰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말해 주지도 않고 훌쩍 떠나 버리다니. 말이라도 제대로 해 줬다면 걱정이 덜 됐을까.

……그리고 아리안이 돌아오면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조언을 들어 보려고 했는데.

달빛이 노아의 등을 환하게 비추던 그날. 그날 노아는 내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탑을 떠나 암흑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나 노아에게는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노아의 그 말이 그의 진심임을 깨달았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이게 바로 내가 아리안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 이유였다. 나도 내 생각을 잘 모르겠어서.

그날 이후 우리는 마주치는 일도 대화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아리안의 방에서, 노아는 그의 방에서, 이렇게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생활했다.

식사 시간도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음식 창고에 음식을 가지러 갈 때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사실 지금 나는 매우 지루하다.

아리안이 있을 때는 온 탑이 떠들썩해서 심심할 새가 없었고 그녀가 없을 때에는 노아와 의미 없는 말싸움을 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서 심심할 새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천장에는 금빛 물감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과 키가 작은 소녀의 그림이었다.

저게 저런 그림이었구나. 지금까지는 천장을 쳐다볼 일이 없어서 어떤 그림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천장을 구경하는 일마저 질려 버리자 나는 다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뭔가 할 만한 게 없을까.

그러다가 시야에 아리안이 연구할 때 사용하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심심함을 달래는 데는 책만 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 책들은 아리안이 연구를 하며 온갖 연구 결과들을 정리해 놓은 책들이었다. 내가 함부로 만지고 펼쳐 볼 수는 없었다.

그때 아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분명 탑 어딘가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고 말했었다.

문제는 그 도서관이 몇 층에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여간 이놈의 짧은 기억력이란.

그래서 나는 직접 한 층, 한 층 탑을 뒤지며 도서관을 찾아보기로 했다.

밖은 태양이 높이 떠 있는 낮이었지만 탑 내부는 창문이 거의 없어 어두웠다. 나는 길을 밝힐 수 있을 만한 램프를 들고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탑은 총 24층이었다. 그중 2층은 아리안이 약을 만들 때 쓰는 재료가, 그리고 14층은 음식들이 쌓여 있는 창고였다. 23층은 노아의 방이 있는 층이었다.

한 층, 한 층 탑을 내려가면서 느낀 건데, 탑은 정말로 위험한 곳이었다.

어떤 층에는 이상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기도 했고 어떤 층에는 사나운 마물이 갇혀 있기도 했다.

문을 열자마자 괴이하게 생긴 마물이 나를 향해 달려들길래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마물은 철창에 갇혀 있어서 나에게는 다가오지조차 못하는데도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도서관은 8층에 있었다. 나는 도서관을 찾았다는 기쁨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도서관은 어려운 제목의 마법책들로만 가득했다. 심지어 어떤 책의 제목은 처음 보는 언어로 적혀 있어서 읽을 수조차 없었다.

……도대체 나는 마탑의 도서관에서 뭘 기대한 거니.

그래도 나는 빼곡한 책장 사이로 천천히 걸었다. 아리안은 작은 도서관이라고 말했지만 그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책 중 유일하게 내 눈에 들어온 책은 남색 표지를 가진 책이었다. 그 책은 다른 책들 사이에서 홀로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남색 표지. 어쩐지 아리안이 생각나는 책이라 홀린 듯이 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책의 은은한 빛은 내 손이 닿자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제목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표지의 아랫부분에 정갈한 글씨로 아리안의 이름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아, 이건 책이 아니라 아리안의 일기장인 건 아닐까? 슬쩍 첫 장을 펼쳐 봤을 때 날짜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건 아리안의 일기장인 것 같았다.

수백 년을 살아온 아리안의 일기장이라니. 이거 완전 역사책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나는 일기장을 한 손에 들고 킥킥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아리안의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일기장을 펼쳐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양심의 가책도 잠시.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남이 읽기를 원치 않았으면 은밀한 곳에 숨겨 놓지 않았을까? 도서관에 꽂아 뒀다는 건 남이 읽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고…….

결국 나는 과한 자기 합리화와 함께 뻔뻔하게 일기장의 첫 장을 넘겼다.

과연 사람을 놀리는 것과 마법 연구를 좋아하는 아리안답게 첫 일기는 함께 마법 연구를 하다가 실패한 친구를 놀렸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고작 70년 전의 일기였다.

70년을 고작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아리안이 살아온 긴 세월에 비하면 ‘고작’이 맞았다. 나는 수백 년 전의 일기를 기대했는데 70년 전이라니.

그래도 나는 그녀의 일기를 계속 읽었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서 쓰는 것이 마치 소설 속 이야기 같아서 재미있었다.

다섯 번째 장, 여섯 번째 장. 계속 한 장씩 넘기며 일기를 읽었다. 내용은 대부분 일상 속의 소소한 것들뿐이기는 했지만 세세한 내용은 매일 달랐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이야기가 끊겼다. 더 이상 일기가 없길래 실망스럽게 마구 일기장을 넘겼다.

그리고 열다섯 번째 장을 넘겼을 때, 나는 새로운 일기를 발견했다. 마지막 일기로부터 8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일기의 내용은 이러했다.

[벨라프가 마법을 잃었다. 마법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녀석이었는데. 도대체 사랑이 뭐라고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지. 도대체 왜, 왜.]

벨라프? 벨라프라면 일기장 속의 아리안이 가장 자주 놀리던 상대였다. 가장 친한 사람 같았는데 그 사람이 마법을 잃은 걸까.

나는 다시 일기장을 넘겼다. 또 한동안 텅 빈 종이만이 일기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일기는 마지막 일기로부터 5년이 흘렀을 때였다.

[르비아는 생각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내가 그녀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거다. 그 이상한 향만 없었어도 르비아는 예전부터 행복했겠지.]

르비아? 처음 보는 이름이 나왔다. 앞으로 돌아가서 내용을 다시 확인해 봤지만 확실히 처음 나오는 이름이었다.

나는 잠시 그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일기장을 한 장 더 넘겼다. 중요한 인물의 이름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전 일기와 다음 일기 사이의 간격은 무려 30년이었다. 도대체 아리안은 일기를 쓰는 거야 마는 거야? 이쯤 되면 가끔 생각날 때만 일기를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르비아를 보고 다른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던 녀석들이 결국 연구를 시작했다. 다른 세상과의 연결이라니. 위험한 연구가 될 텐데, 빨리 그만둬 버렸으면 좋겠다.]

시기를 보니 아마 이때는 다른 세상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마법진을 발동시키다가 아리안을 제외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죽었다는 그때인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장을 넘겼다.

[이 미친놈들이 결국 웬 어린아이를 데려왔다. 결국 그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는 거야. 내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저 머저리들은 어린 생명에게 죄스럽지도 않은 건가?]

어린아이? 마법사들이 어린아이를 데려왔다고? 아리안이 그 일에 대해 말해 줄 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던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다.

[또, 또 나만 살아남았다. 마법진이 폭발하고 저주가 흘러나와 모두가 죽었는데 또 나만 유일하게 살아 있다. 이 영원한 저주는 언제쯤 끝나는 걸까. 도대체 언제…….]

[아니, 나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놈들이 데려왔던 어린아이도 살아남았다. 놈들이 저주에 걸려 서로 싸우던 순간에도 아이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부를 이름도 없으니 이참에 이름이나 붙여 줄까. 머리카락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니까 이름은…….]

그다음부터는 일기장이 찢어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찢어진 건가 싶었지만 누군가 고의로 찢은 흔적이 보였다.

유일하게 찢어지지 않은 페이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희가 너무 밉고 원망스럽고, 짜증 나. 그런데도 미워할 수가 없어. 보고 싶어.]

보고 싶다라. 죽은 마법사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까. 나는 다시 한번 그 문장을 눈으로 훑어보며 읽었다.

문장을 손으로 쓰다듬던 그때, 갑자기 책장들이 사람의 신음 같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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