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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58화 (5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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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때문이야?”

짧은 한마디였음에도 그 안에 무슨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를 괴롭히던 노아를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환영이 사라졌다. 붉게 물들었던 손바닥은 이제 새하얀 색을 되찾았다.

이제 괴롭고 미쳐 버릴 만큼 환영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활에 지장이 가며 거슬린다는 것은 분명했다.

꿈속의 테오필에게서는 이제 스스로 도망칠 수 있는데 손에 묻은 핏자국이라는 환영은 스스로 없앨 수 없다니.

반듯하게 침대에 누워 있던 노아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노아가 머무는 방은 커다란 창문이 있어 밤마다 달빛이 쏟아졌다.

노아가 몸을 꼿꼿이 세우자 방안으로 쏟아지던 달빛이 그의 등 뒤를 비췄다. 그의 표정은,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노아는 의미 없는 질문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허투루 쓸데없는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일단 구석에서 작은 의자를 꺼내 방 한가운데에 두고 앉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노아와 얼마나 떨어진 거리지? 세 번 정도 다리를 크게 벌려 걸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이 늦은 밤에 촛불 하나 없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애초에 이 방에는 초가 없기는 했다. 아리안이 노아에게도 어두운 밤에 쓰라고 초를 몇 개 줬지만 그는 받지 않고 거절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이 방에서 대화할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이 방에 초를 가져다 둘 걸 그랬다. 방을 밝히는 빛이라고는 미약한 달빛밖에 없었다.

커다란 창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정말 어두웠고, 달빛은 노아의 등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노아가 조금씩 얼굴을 움직일 때만 간간이 흰자위가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도 어두워서 나는 그가 입을 벌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누나랑 장미꽃을 겹쳐 보고 있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장미꽃이라고? 사람도 아닌, 고작 꽃을 나랑 겹쳐 보고 있었다고?

장미꽃, 장미꽃이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수도원의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꽃이 떠올랐다.

그 꽃 역시 장미꽃이었다. 피처럼 붉은 탐스러운 색의 장미꽃.

그때의 노아가 몇 살이더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오래전이었다는 사실만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부터 너는 나를 아이의 시점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 그 이상으로 보고 있었던 걸까.

정원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장미꽃들이 왜인지 광적으로 느껴졌다. 그 의미를 모를 때에는 예쁘게만 느껴졌었는데.

“그렇구나.”

나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러자 노아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음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뭐야, 왜 웃는 건데. 이게 뭐가 웃긴 거야?

“내 딴에는 생각을 많이 해 본다고 해 봤어. 아직 충분한 것 같지는 않지만.”

노아는 애매모호한 말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답답해져서 말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본론이나 말해.”

다시 말하지만, 어두운 환경 탓에 나에게는 노아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안 그럴게. 욕심 안 낼게.”

“뭐? 그게 뭔 소리야?”

“쓸데없는 간섭, 안 할게. 누나가 어딜 가든 뭘 하든 누나가 원치 않으면 따라가지도 상관하지도 않을게. 누나가 원한다면 이곳을 떠날 거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났다는 것까지는 좀 과장이고. 몸을 크게 뒤트는 바람에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가 덜컹,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일단 진정하자.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앉았다.

“네 거짓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

“여기를 떠나서, 암흑가로 돌아가면 될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네 세상이라며.”

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쪽으로 고개만 고정했다. 마치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내가 지금 떠나라고 하면 정말 떠나는 건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나를 지치게 만들어 놓고는 이렇게 쉽게?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동안 노아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이 억울해서, 그리고 이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이었구나, 하고 화가 나서.

“……아리안이 올 때까지는 이곳에서 기다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위층으로 돌아갔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설마 노아가 떠나기를 바라지 않는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손을 저어 그 목소리를 없애 버리고 문을 세게 닫았다.

***

노아는 지금까지 스텔라가 장미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녀를 보고 장미꽃을 연상했던 이유는 붉은 눈동자 때문이었다. 어린아이가 루비와 같은 보석을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에서 붉은색을 가진 가장 아름다운 물체는 장미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의 욕심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었다. 그녀가 한 곳에 박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장미꽃을 연상한 것이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장미꽃. 한 곳에 박혀 바람이 불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장미꽃. 그것이 노아가 바라는 스텔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가슴에 쌓여 있던 모든 것을 밖으로 뱉어냈다. 그동안의 그녀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은 것처럼 무감각했고 덤덤했다. 아리안을 만난 후로 조금 변하긴 했지만.

아리안이 자리를 비운 그날, 스텔라는 숨도 쉬지 않고 노아를 몰아붙였다.

징징거리지 마. 너는 어린애가 아니야, 그리고 나도 네 신이 아니야. 네 어리광을 들어 주는 건 지겨워. 구원, 구원. 그놈의 구원.

왜인지 그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려고 했다. 스텔라가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해서 나오는 눈물인가?

그게 아니었다.

다행히 스텔라의 앞에서 꼴사납게 우는 건 피했지만, 머리가 멍하고 가슴이 빠르게 뛰어서 노아는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했다.

전부터 스텔라는 쭉 그에게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그러니 구원 따위를 바라지 말라고 말해 왔었다. 그가 듣지 않았을 뿐.

평소였다면 이번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축제에서 밝게 웃으며 춤추던 스텔라를 봐 버린 후였다.

맞아. 누나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 광장에서 스텔라를 바라보며 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제야 스텔라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노아는 지금까지 쭉 그녀를 그만의 신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자신은 망가지더라도 스텔라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며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힘든 일이 닥치면 망가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

신전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완전히 너덜너덜 망가진 상태였다.

스텔라, 그녀는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며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가 노아의 신이기 때문에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선의로 쓰러져 죽어가던 어린아이를 구해 준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무지는 수십 년이었고 깨달음은 한순간이었다.

늦게도 알았다. 십수 년간 도대체 어떤 바보 같은 생각만 하고 살았던 건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망쳐 버린 건지.

얼마나 많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되뇌었던가. 어리석어서, 그것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범위 안에서의 말일 뿐이었다.

차라리 그녀를 찾으려고 하지 말걸. 차라리 그녀를 애타게 찾던 알베르트를 방해할걸. 만약 그랬다면 스텔라의 눈동자가 텅 빈 것처럼 공허해지지 않았을까.

사실 그녀는 장미꽃이 아니라 들꽃이었다. 오래전 그들이 수도원에서 지낼 때, 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작은 노란색 꽃. 바람이 불면 하늘을 날던 그 들꽃.

아니, 노아가 아는 스텔라라면 아예 자신을 꽃에 비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스텔라가 들어왔다. 그녀가 늦은 밤에 노아를 찾아올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환영. 왜 환영을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자신뿐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전에서부터 그녀는 환영을 없애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스텔라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갑자기 노아가 눈을 뜨자 그녀는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노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스텔라를 마주 보며 앉았다. 그녀에게 하려고 하는, 아니,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그는 등으로 달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를 장미꽃과 겹쳐 보고 있었다고 말했을 때 스텔라는 입술을 살짝 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노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 모습이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 똑같아서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힐끗 스텔라의 얼굴을 훔쳐보니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손으로 턱을 괴었다.

노아는 다시 입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나가 어딜 가든 뭘 하든 누나가 원치 않으면 따라가지도 상관하지도 않을게. 누나가 원한다면 이곳을 떠날 거고. 여기를 떠나서, 암흑가로 돌아가면 될까?

끝내 그녀는 노아에게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스텔라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희망이 있다고 기대했을 그런 말. 그는 더 이상 억지스러운 기대를 하지 않았다.

스텔라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워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사실 암흑가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알베르트가 이미 암흑가를 없애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설사 암흑가가 멀쩡하다고 해도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갔다가 범죄자들한테 돌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노아는 작게 실소했다. 아마 스테판이 가장 커다란 돌을 던질 것이다.

결국 또 스텔라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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