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57화 (57/100)

-57-

나는 바다에서 돌아온 후 아리안에게 노트를 한 권 받아 자세하게 일기를 썼다.

사람들이 가지 못하는 아르엘 왕국 남쪽 바다의 모습은 어땠는지. 암초와 난파선이 많았던 것부터, 아리안에게 예쁜 돌을 받은 것까지. 그리고 그중 하나를 노아에게 줬더니 그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아리안이 주는 약을 먹지 않고 자 보겠다고 주장했다. 아리안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고 끝내 약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테오필이 또 꿈속에 나와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또다시 테오필을 만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빛을 향해 달려가니 나를 쫓아오던 것들이 사라졌다. 심지어 오늘은 어제보다 더 쉽게 도망쳤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리안은 노아와 나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탑에 다시 돌아올 때마다 자세하게 일기를 썼다.

그럴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테오필의 힘은 약해졌다. 아홉 번째로 일기를 쓴 날에는 아예 테오필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흐응. 나는 일기장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웃었다. 뒤늦게 내가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입꼬리를 내렸다.

확실히 거울을 보니 신전에 있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졌다. 스스로가 봐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였다.

아리안을 만난 것에는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처음 봤을 때 그녀를 의심했던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아리안의 탑에서 머무른 지도 꽤 시간이 흘렀는데, 계속 이렇게 신세만 져도 되는 건지…….

이 말을 그대로 그녀에게 전하자 그녀는 오래 머물러도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몽마의 힘이 깃든 단검…… 너무 기니 줄여서 몽마의 단검이라고 부르자. 몽마의 단검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정말 단순한 호의뿐인 것 같았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냥 그것뿐인 호의.

침대까지 양보해 줄 정도의 호의라니. 정말 순수한 의도의 호의도 존재할 수 있구나.

신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심지어 아리안은 내가 몽마의 단검을 아무 데나 둬도 절대로 손대는 법이 없었다.

방심시키다가 갑자기 무슨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의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이 너무나도 편안한 분위기에 이미 녹아드는 걸 넘어 편안함과 한 몸이 되어 버렸다.

가능하다면 평생 이곳에서 아리안과 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전의 일을 떠올리고 흠칫 몸을 떨었다.

노아의 오두막에서도 나는 이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노아가 허락만 해 준다면 평생 그곳에서 노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편하게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편하다고는 해도 너무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널브러져 있지는 말자.

열다섯 번째 일기를 쓰던 날,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테오필이 나를 쫓아오기는커녕 눈을 감았다가 뜨니 아침이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몸이 개운했다.

아리안도 나를 보더니 다행이라며 함께 기뻐해 줬다. 긴장감을 완전히 풀면 안 되기는 하지만 아리안을 의심하기에 그녀는 너무 친절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리안은 먼 곳에 볼일이 있다며 탑을 떠났다. 돌아오는 날을 말해 주지 않은 채로.

집이나 마찬가지인 탑을 맡기고 떠나는 것을 보면 아리안에게 별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말을 하기는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리안은 그냥 친절한 바보였다, 바보.

그게 아니면 친절한 아리안을 마음 한편에서 계속 의심하고 있는 내가 바보이거나.

하여튼 아리안이 먼 곳으로 떠나자 탑에는 노아와 나밖에 남지 않게 됐다. 우리는 아리안이 알려 준 14층 창고에서 음식을 꺼내 식사를 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 많은 음식이 계속 나오나 했더니, 그 출처가 바로 여기였나 보다. 커다란 창고가 전부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리안은 떠나기 전 모든 방에 들어가도 좋으나 17층에 있는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다. 그걸 굳이 당부씩이나. 그냥 아리안이 문을 잠그고 가면 우리는 당연히 못 들어갈 텐데.

뭐, 하여튼. 하루, 이틀. 그렇게 계속 지루하게 시간은 흘러갔다. 아리안이 있을 때는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리안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으니까.

탑에 막 왔을 때는 왜인지 노아와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했는데 이제 전부 익숙해졌다. 트리센 마을의 수도원에서 지낼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노아는 가끔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아니, 사실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노아는 평소와 같이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기 애매한, 짜증 나는 질문을.

“누나는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그렇겠지.”

또 저 질문이다. 벌써 몇 번째인지. 나는 대충 대답했다. 애초에 그를 필요로 했던 건 그가 빌어먹을 환영을 없애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환영을 없앨 필요가 없고 환영을 보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노아를 데리고 다녀야 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 이쯤 되면 노아도 내 말을 대충 던지는 농담 정도로 생각하고 질문을 멈추곤 했다. 물론 저 농담에는 진담도 조금 섞여 있었다.

아까 말했듯이,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노아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내가 필요가 없어지면, 나를 두고 떠날 거야?”

질문이 한층 무거워진 건 같아서 이번에는 대답하기를 잠깐 망설였다.

노아의 질문에 흔들린 것이 아니라, 그의 표정이 한순간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잠시 말을 잃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 질문은 여전히 너무 진부했다. 그는 종종 나에게 자신을 두고 떠날 것이냐고 묻기를 반복했다.

평소에는 잘 참았는데 계속 쌓이고 쌓이던 것들이 폭발하려고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지겨웠다. 도대체 노아는 왜 나를 필요로 하는 거지?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기에?

“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노아의 보모도 아니고, 왜 그가 징징거리는 것까지 다 들어 주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만 좀 해. 더 이상 나한테 징징거리지 마.”

나를 향하던 노아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넌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벌써 열여덟 살이라고. 이제 네 어리광 들어 주는 것도 지겨워.”

지금까지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삼켰던 말들을 전부 토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구원, 구원. 그놈의 구원. 나는 신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말하는 나도 며칠 전까지는 손에 환영이 보인다는 이유로 노아를 억지로 옆에 두려고 했었다. 그에 노아는 오히려 기쁘다는 듯 반응하기는 했었지만.

“도대체 내가 몇 번을 말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지금 이곳에 아리안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이 난리를 피웠다가는 아리안 얼굴 보기가 창피할 뻔했다.

공간에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아였다.

“누나가 내 세상이잖아.”

한껏 노아를 밀어붙이고 숨이 차서 바닥을 보고 숨을 몰아쉬다가 노아가 뭐라고 중얼거리길래 다시 그를 쳐다봤다.

“십수 년 전에 오두막에서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의 시체와 함께 죽어가던 나를 구한 것도 누나고, 바실한테 맞아서 죽기 직전까지 갔던 나를 구한 것도 누나야.”

“…….”

“그런데 내가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모든 게 누나인데…….”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축축해 보였다. 노아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본다.

그러니까, 울 것 같은 얼굴을 처음 본다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또 그 짜증 나는 연기인지 진심인지 구별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그의 얼굴을 잘 살펴봐도 잘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노아가 쓰는 방에 함께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축축한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치듯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리안이 세탁해 준 향기 좋은 이불 안에 들어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당겼다.

이건 네가 잘못한 거잖아. 자꾸 짜증 나는 질문을 하니까, 자꾸 구원 따위를 강요하니까 내가 그렇게 말한 거잖아. 내가 항상 너에게 하던 모진 말인데 오늘은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한참 동안 머릿속으로 스스로를 변호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항상 내뱉던 모진 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늦은 밤이었던 탓에 잠들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이 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완전히 감기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악몽을 꿨다. 물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다시 붉은 환영이 보였다.

이제 환영이 두렵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꼴이 상당히 거슬렸다.

마치 나를 죄인으로 몰고 가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죄가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테오필인데. 어쨌든 당연한 말이지만 환영은 없는 편이 훨씬 좋았다.

다만 환영을 없애려면 노아에게 가야 하고, 나는 방금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노아에게 징징거린다며, 지겹다며 막말을 하고 갔었다.

끄응. 나는 한참 노아의 방문 앞에서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조심히, 아주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깨지 않게 조심히 들어갔다가 환영이 없어지면 바로 나와야지.

설마 아직도 깨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노아는 달빛을 받으며 아주 잘 자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노아에게 다가갔다. 자, 이제 노아에게 왔으니 환영만 없애고 가면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야 환영을 없앨 수 있는지 정확한 기준을 모르겠다.

지금까지 쭉 악몽에 시달리다가 노아가 나타나면 환영이 사라지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그냥 노아를 보면 환영이 사라지는 줄 알고 있었는데.

노아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홀로 끙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굳게 닫혀 있던 노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 깜짝이야. 나는 입만 뻐끔 벌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눈을 뜬 노아의 눈동자가 곧바로 나를 향해서 더 놀랐다.

역시 막말을 하고 도망쳐서 그런지 얼굴 보기가 어색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내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자 잠이 다 깨지 않아 피곤한 동태처럼 멍하니 눈만 뜨고 있던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