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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56화 (5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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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잠들고 나서 주변이 온통 어둠이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해 보니 잠들기 전에 차를 마시지 않았다.

오늘 마을에 다녀온 것도 테오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잊을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아리안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차를 마시지 않고 자다니. 이러다가 또 꿈속에서 테오필을 보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과연 오늘은 테오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저번보다 더 끔찍해졌을까? 이번에는 얼마나 고통받아야 노아가 나타나고 테오필이 사라질까.

마침내 어둠 속에서 끈적한 무언가 붙었다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온몸에 피를 둘러쓴 테오필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몰골이었다. 아마 테오필의 저 모습은 평생 봐도 익숙해지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역시나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기어 나와 내 발목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저번과 똑같은 전개라서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놀라는 것과 두려운 것은 별개였다. 나를 붙잡고 있는 검은 손들은 두렵지 않지만 테오필이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은 두려웠다.

지루함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테오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똑같은 전개가 지겹다는 생각은 저 멀리로 사라졌다.

테오필과의 거리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떤 저주를 퍼부을까. 이번에 그는 어떻게 나에게 고통을 줄까.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듯 떠들썩했다. 야시장에서 본 것과 같이, 사람들은 노래를 연주하고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저곳으로 가면 누군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검은 손들을 걷어차고 달렸다. 왜인지 조금 전과 달리 검은 손들은 쉽게 나가떨어졌다.

내 뒤에 누군가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그냥 빛을 바라보며 힘껏 달리고 또 달렸다. 테오필이 나를 따라잡을 수 없도록.

조금 여유가 생겨 뒤를 돌아봤을 때, 테오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빙긋 웃었다. 노아와 춤을 추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유도 모른 채 웃음이 나왔다.

일어나면 아리안에게 이야기해 줘야겠다. 이제는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악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럼 친절한 아리안은 좋은 일이라며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기뻐해 줄 것이다. 나는 밝은 빛 아래에서 아리안의 반응을 기대하며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막상 일어나자마자 들은 말은 바보라는 소리였다.

“예……?”

“내가 잠깐 내려간 사이에 잠들어 버리면 어떡해! 괜찮아? 또 악몽 꾼 거지? 지금 가서 쟤 데려올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아리안이 더 호들갑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자고 있는 노아를 끌고 올 기세였다.

“아니, 아니요. 아리안. 일단 진정하고…….”

아리안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그녀는 허둥지둥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아리안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그녀는 소란스럽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저 악몽 안 꿨어요.”

꿈속에서도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깨어나면 아리안에게 내가 꿈속에서 어떤 놀라운 일을 겪었는지 말해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막상 꿈속에서 겪은 일을 말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테오필과 검은 손들을 피해 빛을 향해 달려가니 악몽이 사라졌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기도 했고 내가 생각해도 입으로 뱉기에는 오글거리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조금 돌려서 말했다. 축제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악몽을 꾸지 않았다고.

빙 돌려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기쁨은 온전히 전달이 되었나 보다. 아리안은 호들갑을 떨었던 모습은 완전히 지워 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봐. 역시 내 말대로 놀러 가기를 잘했지?”

나는 한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훨씬 가벼운 듯했다.

축제에서의 기억을 계속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테오필이 나오는 악몽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리안은 나를 광활한 바다가 펼쳐진 곳으로 데려갔다. 물론 노아도 포함해서.

축제에 갈 때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던 노아도 이제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얘가 하루 사이에 철이 들었나.

그나저나 날이 더운 여름이니 바다를 즐기는 사람이 아주 적어도 한두 명쯤 있을 법도 한데 해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리안은 아르엘 왕국의 남쪽에 있는 이 해변은 파도가 험해 사람은 물론 배들도 다니기 힘든 곳이라고 말했다.

그런 곳에 지금 우리를 데려온 건가……. 어쩐지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들이 날카롭게 깎여 있더라.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안을 쳐다보자 그녀는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분명 잠깐 내 시선을 피했던 것 같은데. 혹시 아무 생각도 없이 데려왔던 건 아니겠지.

바다에 도착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한곳에 모여 바다를 구경하던 우리는 시간이 지나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바위 사이에 희귀한 광물이 보인다며 갑자기 곡괭이로 바위를 캐기 시작했다. 근데 아리안이라면 괜한 고생할 필요 없이 그냥 마법으로 간단하게 광물만 꺼내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흥분해서 바위를 캐는 아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파도가 험하다고는 하나 바다 자체는 정말로 예뻤다. 이런 걸 보고 에메랄드빛 바다라고 하는 거구나.

노아는 해변에 있던 난파선들을 구경하다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광물을 채굴하는 데 성공한 아리안은 곧장 난파선으로 향했다. 안에서 무언가 발견했는지 흥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는 악몽 안 꿨다며?”

“어떻게 알았어?”

“저 이상한 여자가 말해 주던데.”

새삼 노아와 아리안이 서로를 격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남달랐다. 꼬맹이, 그리고 이상한 여자.

“그럼 이제 손에 환영도 안 보이겠네.”

나는 곧 노아의 목소리가 어딘가 서운한 것처럼 들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계속 환영을 보기를 바라는 거야?”

노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은 곧 긍정을 뜻했다.

“……아니.”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노아는 내 질문을 부정했다.

“이것도 거짓말이야?”

내 머릿속에서 노아는 동화에나 나오는 피노키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속은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고. 이 정도의 의심은 타당했다.

노아에게도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리안은 마법사니까 아리안한테 좀 부탁해 볼까.

노아가 내 질문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없어도 되겠네.”

노아는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쥐어짜듯 말을 뱉었다.

나는 아직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 게 싫다는 건가.

“그래서 아쉬워?”

“…….”

여기서 그렇다고 답하면 정말 용서 못 할 호래자식이었다. 나는 그가 무어라고 대답하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만약 그렇다고 답하면 몇 대 때려 줄 생각이었다.

거기에 더해 인연을 끊는 건 덤으로. 내가 끊고 싶다고 해서 끊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끊고 싶다고 마음대로 끊을 수 있으면 이미 끊었겠지.

“미안 누나.”

“…….”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에이, 설마.

“정말 아닌데, 진짜로 아닌데……. 누나가 환영 같은 건 더 이상 안 보면서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하기는 하는데.”

“…….”

“이제 내가 누나한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아니라고 대답을 못 하겠어…….”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노아가 한 말이 순간 내 머리를 세게 때리는 것만 같았다.

“행복?”

노아의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오니 굉장히 어색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노아가 내 행복을 빌어 주는 말이라니.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이란 장미만큼 노아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았다. 아니, 않았다기보다는 못했다는 말이 더 맞겠다. 행복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다음 말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항상 이랬다. 갑작스럽게 시작하고 갑작스럽게 끝난다. 이런 형식은 노아가 나를 오두막에 가두고 손에 철쇄를 채웠을 때부터 계속 똑같았다. 그때부터, 쭉.

침묵이 깨진 것은 난파선을 뒤지던 아리안이 돌아왔을 때였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우리 둘을 보며 아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너희. 싸웠어?”

아리안은 난파선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나침반, 돌돌 말린 파피루스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중에서 내 눈에 띄던 것은 붉은빛을 띠는 돌과 푸른빛을 띠는 돌이었다. 둘 다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였는데, 끝에는 작을 고리와 줄이 연결되어 목걸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화려해 마치 보석처럼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거 마음에 들면 가져도 돼.”

아리안은 난파선에서 가져온 물건이 자신의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기꺼이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붉은빛의 돌과 푸른빛의 돌이라니.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푸른빛을 띠는 돌을 노아에게 건넸다.

돌은 막 건네받은 그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돌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제나 오늘이나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건 네 거.”

나는 노아가 들고 있는 푸른빛의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내 거.”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들고 있는 붉은빛의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복잡한 이유는 없었다. 붉은빛의 돌은 내 눈동자와 같은 색이길래 내가 가진 것이었고 푸른빛의 돌은 노아의 눈동자와 같은 색이길래 그에게 준 것이었다.

돌에 달린 줄을 목에 걸어 봤으나 돌치고는 가벼웠다. 활동하는 데 큰 지장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벗어 손 위에 올렸다. 난파선에서 나온 목걸이이니 시체가 사용하던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리안은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그건 상자에서 찾은 거야. 깨끗해.”

그렇다면야. 나는 목걸이가 깨끗하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다시 목에 줄을 걸었다.

목걸이를 차고 다시 노아를 쳐다보니, 그는 목에 걸라는 목걸이는 걸지도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다.

그렇게 목걸이가 마음에 드나. 내가 구해온 목걸이는 아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왜인지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지려고 한다. 저런 표정은 어렸을 때 이후로는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파도가 거칠었고, 노아와 진부하고 익숙하며 의미 없는 말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꽤 괜찮은 날이었다. 어렸을 때의 노아 같은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은 걸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노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거칠지만 에메랄드빛의 아름다운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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