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노아의 놀란 얼굴이었다. 그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상대의 손을 놓고 홀로 춤을 추는 차례였다. 나는 노아의 손을 놓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발로 바닥을 두드리듯이 춤췄다.
오늘처럼 기분이 좋은 날에는 노아에게도 웃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계속 바닥만 쳐다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노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춤추는 것도 잊고 바보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해 보였다.
평소였다면 얘가 갑자기 왜 이러냐며 혀를 찼겠지만 오늘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의 바보 같은 얼굴마저도 지금은 즐거웠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보며 힘차게 웃었다. 일부러 신경 써서 웃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단순히 즐거워서 나온 웃음이었다.
나는 멍하게 서 있는 노아의 팔에 팔짱을 한 바퀴 돌았다. 그 후로는 계속 춤이 삐그덕거렸다. 노아가 춤을 제대로 추지 않고 멍하게 서 있기만 한 탓이었다.
***
아리안은 매섭게 판을 살피다 말고 뻥 뚫린 테라스를 통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광장을 바라봤다.
높게 세워진 건물들 때문에 광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는 없었다. 아리안은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빤히 응시했다.
그때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아리안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어이, 당신 차례인데 빨리 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아, 아아. 맞다. 까먹을 뻔했네.”
아리안의 옆에는 돈뿐만 아니라 값비싼 패물들도 가득 쌓여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눈앞에 놓인 카드를 뒤집었다.
또다시 남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리안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남자 옆에 놓인 돈을 손으로 쓸어 가져왔다.
남자는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아리안은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 주고는 다시 광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멀지만 스텔라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
춤을 추던 곡이 끝나고 새로운 곡이 시작됐다. 아까 아리안을 기다릴 때 들었던 노래와 비슷한 빠른 박자의 경쾌한 춤곡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을 보니 노래가 바뀔 때마다 한 칸씩 옆으로 이동하는 것이 규칙인 것 같았다. 옆에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나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한 칸 이동하기 위해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손을 잡으려던 것도 잊고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옆을 돌아보니 노아가 멍한 얼굴로 내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인상을 쓴 채 그를 쳐다보자 그는 놀란 듯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마을의 친숙한 분위기에 휩쓸려 노아의 그 이기적인 성격까지 잠시 잊어버렸다. 그가 내 손을 놓을 리가 없는데.
나는 노아가 내 손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으니까, 그리고 쭉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내게 손을 뻗었던 남자는 무슨 일이냐고 묻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며 고개를 까딱였다.
노아를 데리고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규칙을 지키지도 않고 둘이서만 춤을 추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민폐였다.
그때, 내 손을 잡고 있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일단 남자의 손을 잡고 한 칸 옆으로 이동했다. 남자가 아르엘 왕국 특유의 어조로 반갑다고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급하게 노아를 돌아봤다. 노아는 다른 여자와 춤을 추면서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노아는 시선을 돌렸다. 딱딱하게 춤을 추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붉은색의 장미꽃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다시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제야 나도 눈앞의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손뼉을 치고 춤을 췄다.
음악은 계속 끝나고 다시 시작됐다. 여러 사람을 거쳐 다시 노아를 만났음에도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여기서 입을 연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지? 네가 내 손을 놔 준 게 의외였다? 아니면 왜 내 손을 놔 줬냐고 물어보나?
무슨 말을 하든 좋은 선택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음악이 끝날 때쯤 노아를 데리고 광장에서 빠져나왔다.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춤을 췄던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우리는 다시 아리안을 기다리던 그 장소로 돌아갔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밤의 거리는 아직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노아를 뒤에 두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노아도 내 속도에 맞춰 걸어오고 있는 건지 뒤에서 들려오는 걸음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인파 사이에 묻혀 있어도 노아의 걸음 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걸음 소리가 멈췄다. 나는 걸음 소리가 멈추고도 몇 걸음 더 걸어가다가 노아를 따라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자 노아는 발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왜인지 복잡해 보였다.
다시 걸음을 옮길 생각이 없어 보이길래 나는 노아의 손을 잡고 끌고 갈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으려던 그의 왼손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는 아까 노아가 샀던 장미가 들어 있었다.
“…….”
얇은 꽃잎들이 노아의 손안에서 마구 구겨져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찢어진 부분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노아의 시선은 손안의 장미를 향하고 있었다.
왜 표정이 복잡한가 했더니 장미가 찢어져서 그랬었나 보다. 내가 그를 너무 모르고 있었나 보다. 장미가 찢어져서 침울할 정도로 노아가 세심한 성격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불어 노아의 손 위에 올려져 있던 장미가 하늘로 날아갔다. 아직 높게 날아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노아가 빨리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하지만 노아는 가만히 서서 장미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바람이 멎자 장미는 천천히 가게에 걸려 있는 등불 위에 앉았다. 장미는 노아의 손안에서 거칠게 찢어졌음에도 등불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아는 잠시 장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장미 다시 사러 갈래?”
꽃을 팔던 아이는 여전히 거리를 누비며 꽃을 팔고 있었다. 아이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아직도 활짝 핀 장미가 많았다.
“……아니.”
계속 장미를 소중하게 손안에 쥐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모순적인 대답이었다. 아니면 그새 장미에 질려 버린 걸까.
이런 걸 보고 변덕스럽다고 하는구나. 나는 아직도 노아의 생각이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어려웠다.
“스텔라! 이거 봐!”
거리에 아리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나를 향해 열렬히 손을 흔들고 있 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나를 한 번씩 힐끗거리고 지나갔다. 윽, 이게 뭐야.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내 이름을 광고할 셈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흥분해서 나를 부르나 했더니, 도박장 겸 꼬치 가게에서 딴 돈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아리안의 옆에 쌓여 있던 돈은 금화 두세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열 배가 넘는 양을 품에 안고 있었다.
나는 그때 진심으로 아리안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도박이 아리안의 주요 돈벌이는 아닐까.
아리안은 한 손에는 금화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꼬치를 들고 후다닥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준 꼬치는 다 식어 차가웠다.
“잘 놀다가 왔어?”
신나게 통통 뛰며 춤을 추던 순간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안도 금화를 자랑하며 자신도 잘 놀다가 왔다고 말했다.
“근데 쟤는 또 왜 저래?”
아리안이 말하는 ‘쟤’는 노아였다. 노아는 아까의 복잡한 표정 그대로였다.
“글쎄요. 샀던 장미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이후로 계속 저러고 있더라고요.”
“진짜? 쟤가? 꼬맹아, 너 생각보다 감수성이 풍부하구나.”
확실히 노아는 그런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미가 날아가서 마음이 아픈 노아라니. 생각만 해도 어색했다. 장미가 마음에 안 든다며 찢어 버린다면 모를까.
아리안도 나와 생각이 같은지 내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근데 쟤랑 장미라니 진짜 안 어울린다.”
나는 아리안과 동감이라는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 보면 아리안은 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특히 노아에 관해서는 이보다 더 잘 맞을 수가 없었다.
“광장에서 재밌었어?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리던데.”
“거리가 저렇게 먼데 그게 들린다고요?”
“당연하지. 내 이름도 걸 수 있어.”
“제가 아리안 이름 가져서 뭐하게요.”
그건 그렇긴 하지. 아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자 나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이제 그만 가자. 내일도 갈 데가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아리안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왜인지 광장에서 함께 춤을 춘 갈색 머리의 남자와 겹쳐 보여 나는 선뜻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아리안이 내민 손을 잡은 후 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았듯이 노아가 내 손을 잡을 차례였다.
노아는 멀뚱히 내 손을 쳐다봤다. 그리고 느릿하게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노아의 둔하고 느린 행동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리안이 속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하는 것이 보였다.
노아가 내 손을 잡자마자 우리는 아리안의 탑에 도착했다.
마차를 타도 한참이 걸릴 그 긴 거리를 굳이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니. 새삼 아리안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물론 노아와 아리안은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으며, 아리안은 침대가 아니라 그녀의 딱딱한 나무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노아는 끝까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계속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잠시 노아가 열고 나간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언제부터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장미가 날아갔을 때? 아니, 그보다 이전부터 저런 표정이었다. 그럼 나랑 춤을 출 때부터인가.
흠. 나는 침대 위에 앉아 노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노아의 감정 변화를 읽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특히 지금의 노아는 더더욱 그랬다.
그나저나 아리안이 약을 가져다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축제에서 여기저기 쏘다녔던 탓에 피곤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아리안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감기는 눈 사이로 놀라 달려오는 아리안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