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다음날 해가 지자마자 아리안은 바쁘게 움직였다.
“축제는 열두 시까지야. 빨리 안 가면 상인들이 전부 들어갈 거라고.”
“열두 시까지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잖아요.”
“세 시간이면 부족한 거지!”
아리안이 흥분하며 꽥 소리를 질렀다. 노아는 그녀의 예민한 행동에 질린다는 듯이 혀를 쯧, 하고 찼다. 물론 아리안은 그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너 방금 혀 찼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노아는 자연스럽게 아리안의 말을 무시했다. 아리안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어우, 나이도 어린 게 진짜…….”
그렇지만 둘 다 제 나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노아뿐만이 아니라 아리안도, 그들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이 싸우는 것처럼 유치하게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다.
노아는 아리안을 노려보다가 주름진 옷을 가볍게 두드려 주름을 폈다. 감옥에서부터 입고 있던 흰색의 셔츠가 노아의 머리카락 색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색이라 그런지 특히 더 눈에 띄었다.
참고로 저 셔츠는 며칠 전 아리안이 마법으로 세탁해 준 것이었다. 물론 내가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리안 덕분에 청결한 상태의 옷을 계속해서 입을 수 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안이 말하는 축제가 열리는 마을은 아리안의 탑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법을 이용해 마을로 바로 가면 될 것을, 아리안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마법을 쓰면 괜한 이목을 끈다고 답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이야. 하여간 아리안은 이상한 데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는 하는 것 같다.
마을에 도착하자 아리안이 신나서 나를 끌고 앞장섰고, 노아는 질질 끌려가는 내 옷소매를 슬그머니 잡고 따라왔다.
아리안을 따라 한 바퀴 둘러본 마을은 여러 가지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소리,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연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의 단어를 속삭이는 소리.
“제니. 네 버터처럼 부드러운 눈동자에 파묻히고 싶어.”
“오, 피터. 동방의 비단같이 매끈한 네 머리카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니?”
연인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상했다. 계속 듣고 있자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귀를 막으며 듣기를 포기했다.
그 탓에 노아가 잡고 있던 옷소매가 툭, 노아와 떨어졌다. 노아는 다시 내 소매를 잡으려고 했으나 내가 그 손으로 귀를 막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원래 이쪽 세상 연인들은 저런 게 일상인가.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도 곧 지워지고 말았다. 아리안이 얼굴을 구긴 채 연인들을 바라보며 헛구역질하는 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쯧. 저게 도대체 뭔지. 미사여구 앞에 아무 물건이나 가져다 붙이면 칭찬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리안은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는 다시 나를 잡아끌었다. 걸어가다가 오른손이 허전해서 뒤를 돌아봤더니, 노아가 몇 걸음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꼬맹아, 빨리 와. 애도 아니고 무슨 걸음이 그렇게 느려.”
하여간 귀찮게 하네. 아리안은 툴툴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고 노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평소와 같은 아리안의 시비에도 노아는 울컥하여 화를 내지 않았다. 그냥 다시 슬그머니 내 소매 끝을 잡을 뿐이었다.
아리안은 노아를 보며 혀를 차다가 어딘가에서 풍겨 오는 노릇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각종 채소와 고기가 함께 꽂혀 있는 꼬치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만을 남기고 홀린 듯이 꼬치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덕분에 길거리 한복판에 노아와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길의 중앙에 서 있기에는 사람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 같아 한쪽으로 비켰다. 골목과 가깝고 나무상자들이 쌓여 있어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나는 상자 위의 먼지를 살짝 털어낸 후 그 위에 앉았다. 노아는 상자 위에 앉는 대신 그냥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건물들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광장에서는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 한동안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꽃을 파는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꽃들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를 들고 사람들에게 꽃을 팔고 있었다. 장미, 튤립, 백합…… 종류가 꽤 다양했다.
나는 멍하니 아이를 보다가 다시 꼬치 가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리안은 왜 이렇게 안 나오지? 가게에 사람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결국 아리안을 찾으러 가게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노릇한 냄새가 나는 가게 안에 들어가자 위층에서 아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치를 사 온다고 하지 않았나? 꼬치를 파는 곳은 1층인데.
의문을 갖고 2층에 올라가 본 결과, 우리는 테이블 앞에 앉아 카드를 섞고 있는 아리안을 볼 수 있었다. 건너편에는 아저씨들이 앉아 있었고, 옆에는 돈이 쌓여 있었다.
“아, 미안 스텔라. 한 판만 하려고 했는데 못 일어서겠어.”
그렇게 신나게 카드를 섞으면서 미안하다고 해 봤자 하나도 안 와닿는데요…….
그보다 카드 게임이라니. 아리안이 질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패가 나와도 마법으로 감쪽같이 바꿔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아리안은 이 아저씨들과 게임을 해야 하니 나가서 놀고 오라며 우리 손에 돈을 가득 안겨 줬다. 이 돈도 마법으로 만든 가짜가 아닐까 싶어 눈앞에 대고 흔들어 봤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웃고 있는 아저씨들의 안녕을 빌어 준 뒤 노아를 챙겨 꼬치 가게 겸 도박장을 빠져나왔다.
상황이 생각보다 난감했다. 애초에 아리안의 손에 이끌려 나왔기 때문에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건 노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꼬치 가게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우리 중 먼저 움직인 것은 노아였다.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 건가?
그러나 노아는 곧 멈춰 섰다. 그는 아까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꽃을 파는 아이에게서 꽃을 한 송이 구매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붉은 장미였다.
노아와 꽃이라니! 어렸을 때의 그라면 몰라도 지금의 노아와 꽃은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장미 정원을 만들 정도로 장미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취향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여튼 우리는 그것을 시작으로 축제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가게마다 달린 형형색색의 등불 때문에 눈이 부셨다.
마땅히 돈을 쓸 만한 가게가 보이지 않아 계속 걷기만 했더니 어느새 우리는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서는 젊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로 손뼉을 치며, 발을 통통 튀기기도 하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수도원에 있을 때도 마을의 축제 때마다 마을에 울려 퍼지는 음악이 수도원까지 들리고는 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애니카와 함께 통통 뛰며 춤을 췄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보니 그때의 일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장 뛰어 들어가 함께 섞여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를 힐끗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던 노아가 나와 광장의 사람들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고 싶어?”
물어보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당연한 말이었다. 다만 저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함께 춤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했고, 그건 곧 노아를 데리고 춤을 춰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꽤 진중하게 고민했다. 춤을 추지 않고 지루하게 구경만 하는 것과 노아를 데리고 춤을 추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을지.
하지만 내가 고민하는 사이 노아가 먼저 내 손을 잡고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광장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나는 중앙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통을 발을 튀기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리고 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뻣뻣하게 다리를 움직이더니 어색하게 내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몸이 뻣뻣한지, 통나무에 팔다리가 달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건 꽤 새로웠다. 노아가 못 하는 것도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굽이 있는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튀길 때마다 경쾌한 리듬이 되어 광장을 울렸다. 그에 비해 노아와 나는 신전에서 도망쳤을 때 신고 있던 신발 그대로였다.
이제 보니 내가 입고 있던 옷도 눈에 띄는 흰색이었다. 신전에서 준 옷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의 옷들 사이에서 특히 눈에 띄었다. 어쩐지 걸어 다닐 때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더라.
오랜만에 추는 춤은 정말로 즐거웠다.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 때마다 치마가 꽃처럼 피어나는 것도, 부드럽게 불어오는 시원한 밤의 바람도, 귀를 채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웃음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당연한 상황이 왜인지 너무나도 반가워서, 그래서 그냥 웃어 버렸다.
소리 내서 크게, 더 크게 웃었다. 모르는 사람도 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가 지금 얼마나 즐거운지 모두에게 알려 주고 싶으니까.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원하는 대로 팔을 뻗으며 몸을 움직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음악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빙글빙글 춤을 추다가 음악의 흥겨움이 가장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힘껏 웃으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