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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53화 (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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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내가 깨어난 걸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아리안이었다. 그녀는 내가 눈을 뜨자마자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게 내가 잠깐만 기다렸다가 자라고 했잖아, 이 바보 같은 아가씨야!”

바보 같다니. 말이 거칠기는 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그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나는 무안해하며 웃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이상한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은 아리안 덕분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리안이 내 손을 세게 쥐었다.

그나저나 노아는 아까부터 말이 없다. 그가 있는 곳을 쳐다보지 않았더라면 그의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

“…….”

우리는 그냥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스텔라. 다시 잠들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얼른 약을 만들어 올 테니까.”

아리안이 긴 팔다리를 소란스럽게 움직이며 책을 여러 권 꺼냈다. 그녀는 가만히 놀고만 있는 노아가 아니꼽다며 창고에서 재료를 가져오게 했다.

“……그냥 당신이 마법으로 가져오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할 일도 없는 게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니? 스텔라를 위한 일인데 그 정도도 못 해?”

“…….”

노아는 작게 욕설을 지껄이다가 아리안이 준 쪽지를 가지고 창고로 향했다.

“꼬마야, 창고는 2층에 있어. 여기가 24층이니까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거야.”

뭐? 노아가 짜증스럽게 물었으나 아리안은 그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옥탑방 문을 굳게 닫고 잠가 버렸다.

일들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게 아니면 그냥 이상한 꿈을 꿔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리안은 방을 누비며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꺼냈다 꽂기를 계속 반복했다. 그녀가 찾는 책이 쉽사리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렇게나 책장에 처박혀 있는 책들을 보면 못 찾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 여��다. 책은 찾았고, 이제 꼬맹이만 돌아오면 되겠네.”

아리안은 책을 찾느라 지쳤다는 듯이 소파에 몸을 맡기고 쓰러졌다. 그녀의 다리가 소파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삐져 나왔다. 소파가 작은 건지 아리안의 키가 너무 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리안은 거의 눕다시피 편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스텔라.”

“네?”

그러던 아리안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그, 있잖아. 그거.”

그거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아리안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입을 우물거렸다.

“악몽…… 있잖아. 그걸 악몽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강요하는 건 아닌데 그냥 대강 무슨 일인지만 알려 주면 안 될까? 혹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고…….”

아리안은 정말 어렵게 질문을 꺼냈다. 질문하기에 어려운 내용일 뿐만 아니라, 대답하기에도 애매하고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걸 말해도 괜찮을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교황에게도 이미 말했던 내용이었다. 나는 한결 쉽게 입을 열었다.

***

뿌득.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리안이 쥐고 있던 소파의 팔걸이가 마침내 찌그러졌다.

무엇보다 저 소파, 나무로 만들어진 거 아니었나. 바깥쪽이 천으로 덮여 있기는 하지만 내용물이 부서지거나 찌그러졌다는 것은 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내 시선이 계속 부서진 팔걸이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괜찮아. 고칠 수 있으니까.”

소파가 걱정돼서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나무도 찌그러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보다, 그런 놈이 자기 입으로 직접 자기가 신의 축복을 받았으니 신이 널 저주할 거라고 말했단 말이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긴 놈이네. 지옥에 떨어져도 모자랄 놈이.”

“…….”

“근데 그놈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거 저 꼬맹이도 알고 있는 거야?”

이번에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저 꼬맹이도 은근 맹목적인 바보구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놈을 찔렀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너덜너덜하게 찔러 죽이다니.”

“…….”

“뭐, 하여튼. 아가씨는 그 죄책감 때문에 악몽을 꾸고 있다는 말이고…….”

듣다 보니 아리안이 나를 지칭하는 호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텔라, 너, 아가씨 등등 다양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방을 밝히고 있는 것은 작은 촛불 하나뿐인지라 아리안의 표정까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방을 가득 채운 침묵을 깬 것은 아리안이었다.

“근데 나한테 덜 말한 거 있지 않아?”

덜 말한 게 있다고? 아리안의 말은 굉장히 모호했다.

“처음 만났을 때 23년 전 일을 되게 궁금해 했었잖아.”

“어……. 그랬었죠.”

“뭔가 너랑 관련이 있으니까 그랬던 거 아니야?”

하지만 짐작일 뿐이었다. 마법사들이 다른 세계와 이곳을 연결하는 마법을 발동시킨 시점이 내가 태어났을 때와 비슷한 탓에, 홀로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말해도 괜찮아.”

나는 저 사람이 왜 자꾸 나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 단검이 그렇게 갖고 싶은 건가.

게다가 이건 잘못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아리안은 이미 다른 세상과 이 세상이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나를 그렇게 취급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그 말을 하기는 조금, 조금 어색하고 민망했다. 읽던 19금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리안의 눈빛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신뢰로 가득 차 있던 탓에, 나는 입을 열고 말았다. 19금 소설이라는 이야기는 빼고 말이다.

……그나저나 부담스러우니 이렇게 너무 신뢰로 가득 찬 눈빛으로 쳐다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아리안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완전히 나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쩐지 향이.”

순간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그녀를 쳐다봤으나 아리안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죄책감을 갖는 거야?”

그리고 아리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노아가 종종 내게 묻던 말과 비슷했다. 왜 죄책감을 갖느냐고.

물론 그사이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노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나를 두둔해 주기 위해 그 질문을 하곤 했다.

“결국 마지막에 숨을 끊은 건 저 꼬맹이였다며. 아니, 설령 네가 죽였다고 해도 그런 놈을 죽인 게 그렇게 죄스러워?”

“…….”

“뭘 착각하고 있구나. 죄를 지은 건 아가씨가 아니라 그놈인데.”

하지만 아무리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말을 들어도 꿈에는 테오필이 나왔으며 그를 만나고 나면 손에 환영이 보였다.

아무리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이미 죄책감은 머릿속에 박혀 벗어나지 못하도록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 스텔라, 축제에 나가자.”

“네.”

“내일 해가 지면 바로 가는 거야.”

“네……?”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가 뒤늦게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 것도 보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거야.”

“아니, 그…….”

“꼬맹이한테도 말하고 올게.”

아리안은 허공으로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말하고 왔어. 지금 9층에서 올라오고 있더라. 안 그런 척하면서 자기도 데리고 올라가라는 듯이 쳐다봤는데 그냥 왔어.”

곧이어 노아가 탑의 방문을 걷어차는 탑을 울렸다. 아리안은 시끄럽게 울리는 파열음이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참 재밌는 애야. 너를 너무 좋아하는 것만 빼면.”

그 재밌는 애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면 노아도 소파 팔걸이 꼴이 날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몇 분이 지나자 노아가 입술을 깨물며 옥탑방에 올라왔고, 아리안은 잘했다며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창고에서 가져온 재료를 거칠게 빼앗았다. 물론 노아는 아리안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 닿자마자 벌레가 앉은 것처럼 거칠게 뿌리쳤다.

아리안은 노아의 거친 행동에도 굴하지 않고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잠들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스텔라. 금방 다시 올 테니까.”

노아는 흐느적거리며 내 옆쪽에 와서 앉았다. 안 힘든 척하고 있지만 올라오느라 지쳐서 서 있을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은 노아의 정수리가 보일 정도였다.

노아는 최대한 숨을 삼키며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들어 보이는데 그냥 두지, 뭐.

나는 잠시 노아의 둥근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두웠다. 새까만 밤하늘에 은색 실로 수를 놓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대조되는 색 속에서 별들이 눈에 띄게 반짝였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다시 잠이 오기 시작했다. 노아도 어느새 내 무릎에 기댄 채로 색색거리며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절반 정도 감았을 때, 아리안이 한 손에는 하얀 컵을 들고 나타나 잔소리를 퍼부었다.

“잠시만 기다리라니까 그새를 못 참고 몰래 눈을 감고 있네.”

아차. 나는 얼른 눈을 뜨며 컵을 건네받았다.

아리안은 내가 잔에 든 액체를 끝까지 다 마시는지 지켜보다가 노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얜 뭐야. 왜 여기에서 자고 있어?”

아리안이 다소 과격하게 노아의 뒷덜미를 붙잡았다가 그 상태로 몸을 굳힌 채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보기에는 마법으로 그를 방으로 보낼지 혹은 뒷덜미를 잡고 방까지 끌고 갈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곧 아리안은 드디어 결정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녀는 노아의 뒷덜미를 잡은 채 허공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얇은 벽 너머로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직접 침대에 던져 주고 왔나 보다.

생각해 보면 노아도 나와 같은 시간에 침대에 올라갔으니 지금쯤이면 분명 한참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인데. 이곳에 있던 걸 보니 중간에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봤던 노아를 떠올렸다가 곧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왜 꿈속에까지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마치 노아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도움을 받는 건 현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리안은 나 대신 침대를 정리해 주고는 누우라고 손짓했다. 나는 얼른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리안이 준 약 때문인지, 혹은 시간이 늦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금방 의식이 흐려졌다. 다만 완전히 잠들기 전에 아리안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꿈 한번 꾸지 않은 편안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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