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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52화 (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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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번에 꿨던 악몽의 내용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 악몽과 얼굴을 마주하니 잊고 있던 모든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끔찍한 몰골의 테오필부터,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붉은 피까지 전부.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을까.

    이제 와서 떠올려 보니 처음부터 며칠 전의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악몽에서 막 깨어나고 노아를 찾아갔을 때는 악몽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잊고 있었던 거지?

    노아를 찾아간 이후에 깔끔하게 이 일을 잊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 끔찍한 악몽을 잊고 있었던 걸까. 이렇게 쉽게 잊을 만한 기억이 아닌데.

    며칠 전의 그때와 똑같았다. 테오필은 몸 여기저기가 기형적으로 꺾인 채 내게 다가왔다.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튀어나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완전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금방 테오필에게 따라잡혔다.

    “신께…… 서 널…… 저주…… 거야…….”

    테오필은 저주의 단어들을 뱉으며 나를 향해 기어왔다. 그의 모습은 저번보다 더 끔찍해졌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끄으으. 그의 입에서 듣기 싫은 쇳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테오필의 손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테오필은 손가락마저도 온전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손가락을 네 개까지 세다가 포기했다.

    “너, 때문에…… 내가…….”

    제발 좀 사라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 소리는 공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손이 또다시 흥건해짐을 느꼈다. 나는 굳이 그게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피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검붉은 피.

    손에 흐르는 피의 환영을 없앤 것은 결국 노아의 말 한마디가 아닌 내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을 바꾸면 이 환상을 없앨 수 있어야 하는데, 왜 사라지지를 않지.

    차라리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꿈에서 깨어난다면 테오필은 사라질 테고 나는 바로 노아에게 달려가면 되니까.

    나는 아리안이 내 옆에 있다면 나를 좀 깨워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

    당시 아리안은 스텔라를 침대에 눕히고도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은 마녀들의 약 덕분에 스텔라가 악몽을 꾸지 않고 편안히 잘 자기는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만들어 놓았던 마녀들의 약이 전부 떨어져 버렸다.

    악몽의 내용이 과연 무엇일지는 잘 모르지만, 스텔라가 또다시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곧장 그녀를 깨워야 했다.

    규칙적으로 스텔라를 주시하며 연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집중력을 흔드는 일이었다. 결국 아리안은 연구를 포기했다.

    그리고 스텔라가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스텔라가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당장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스텔라에게 달려갔다.

    “스텔라!”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었다. 있는 힘껏 그녀를 부르는 아리안과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는 스텔라. 그녀는 깨어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환각 같은 것을 보며 두려워했다.

    아리안은 입을 고집스럽게 다물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덜커덩!

    그래서 그녀는 이곳으로 노아를 불렀다. 물론 시간이 없었으므로 아리안은 마법으로 공중에 노아를 불러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그는 허리를 부여잡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느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리안은 어깨를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노아는 그 손을 쳐내며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나한테 겁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지?”

    “스텔라를 깨워.”

    그 말을 들은 노아의 시선이 스텔라에게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다는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여린 뺨을 타고 식은땀이 가득 흘러내렸다.

    “……누나?”

    그녀는 오지 마, 싫어 따위의 말을 뱉으며 몸부림쳤다. 아리안은 다시 스텔라의 손을 잡고 의식이 없는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스텔라는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나, 누나…….”

    아리안에게 날카로운 말을 하던 노아 또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스텔라를 흔들어 깨우려고 시도했다. 아리안은 노아, 그라면 스텔라를 깨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텔라가 일방적으로 노아에게 적대적으로 굴기는 했으나 무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을 보면 오래 알고 지낸 듯 친근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텔라는 지난번에도 악몽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 노아에게 달려갔다.

    노아의 뺨과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스텔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내색하지는 않으려고 하지만 그를 아끼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누나, 지금 대체 무슨…….”

    또 그 같잖은 환영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노아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환영?”

    물론 아리안의 그 순간의 말조차 놓치지 않았다. 같잖은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지만 노아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귀를 닫고 스텔라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윽, 아니, 아니야…… 흐…….”

    스텔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흐느꼈다.

    아리안은 노아의 어깨를 세게 작으며 소리쳤다. 어깨를 쥔 손아귀 힘이 강력한 탓에 노아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뭘 쳐다보고만 있어? 빨리 깨우라니까?!”

    “…….”

    저 여자는 내가 누나를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어떻게? 누나는 이미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부른다고 해서 일어날까? 노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나…….”

    “…….”

    “스텔라, 누나…….”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성기사 단장이라는 놈을 찌른 게 그렇게 죄스러워?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누나는 나의 신이나 마찬가지니, 부디 죄책감을 갖지 말아 달라고. 누나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지게 될 테니까.

    내가 간절하게 부르면 일어나 줄 거야? 누나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평생 옆에서 환영을 없애 줄게,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

    ***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테오필에 의해 신전에 갇혀 있을 때도 괴로움의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도망칠 수 있을지, 혹은 영원히 그곳에 처박혀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지금도 비슷한 경우였다. 테오필이 아무리 내 목을 졸라도 이곳은 꿈속이기 때문에 고통이 끝나지 않았다.

    숨통이 조여온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거지?

    숨을 들이마시면 시체 썩은 내가 풍겼고 눈을 뜨면 썩어 문드러진 얼굴이 보였다. 뺨 위로는 테오필의 얼굴에서 흐른 피가 뚝뚝 떨어졌다.

    테오필은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죽으라는 말만 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려면 멀었나? 아리안은 아직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걸까? 아니, 그게 아니면 그녀가 나를 깨우고 있는데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눈을 감았다.

    “누나?”

    테오필이 갈라진 목소리로 저주가 섞인 말들을 내뱉는 와중에, 희미하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뜨고 그쪽을 바라보자 어렸을 때의 노아가 나를 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목을 조르던 테오필도 고개를 들어 노아를 바라봤다.

    “넌…….”

    테오필이 내 목을 조른 채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숨을 끊은 사람을 알아보는 걸까.

    결국 그는 내 목에서 손을 떼어 내고 비틀거리며 노아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쓰라린 목을 부여잡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노아는 여전히 나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저 바보가 도망치지 않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테오필이 나한테 그랬듯이 노아의 목을 조르고 저주를 퍼부을까? 저 어린아이한테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할까? 많아 봤자 다섯 살로밖에 안 보이는 어린 노아한테?

    분명 여기는 꿈속이고, 저건 그냥 내 꿈이 만든 가짜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느새 테오필을 앞질러 노아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검은 손들이 내 발목을 붙잡았지만 어떻게든 밟고 뿌리치며 뛰었다. 어린아이가 나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 멍청아!”

    바로 뒤에는 테오필이 있었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노아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테오필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어떡하지. 무작정 뛰기는 했는데 그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내 목을 조르려나. 꿈에서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채로 이렇게 계속 기다리기만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더욱 세게 노아를 끌어안았다. 이 어린 몸뚱이가 고통스러워하며 발버둥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목을 졸리는 것이 나았다.

    아리안, 제발 옆에 있으면 나 좀 깨워 줘요.

    “누나.”

    노아가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 조금 달랐다. 조금 더 어른스럽고, 굵고…… 음.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좀 더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듣고 다시 고개를 들자 열여덟의 노아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 내 잘못을 생각하면서 평생 사죄하면서 살라고 했잖아.”

    “아니, 그렇기는 한데…….”

    “저 끔찍한 것도, 손에 보이는 환영도 내가 어떻게든 없애 줄게.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면 안 돼, 응?”

    그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우리를 쫓아오던 테오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테오필이 사라지자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 밝아졌고 내 발목을 끌어당기던 검은 손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이 끔찍했던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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