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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는 마차의 손잡이를 부술 듯 쥐었다. 실제로 유약한 종류의 광물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알베르트의 힘을 정통으로 받고는 살짝 아래로 휘어졌다.
알베르트는 아침이 된 후에야 신전에 도착했다. 그는 성기사들을 통해 스텔라가 노아를 구해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신전은 알베르트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니, 사실 그에게 호의적이었다기보다는 스텔라에게 적대적이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사제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내내 몽마에게 시달리던 스텔라를 성기사 단장이 구한 것이라고 했으니까.
몽마와 관련이 있는 자를 신전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알베르트 또한 모두가 그녀를 배척하는 편이 그에게는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심한 것이었다. 평소였다면 스텔라를 찾은 즉시 공작저로 데려갔을 것을, 방심하여 다음 날로 미뤘다.
도대체 신전 놈들은 일을 어떻게 하길래! 알베르트는 분노해 창문에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그가 주먹으로 마차의 창문을 깨려고 하는 것을 옆에 있던 코르넬이 겨우 막았다.
젠장. 알베르트는 낮게 욕을 읊조렸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스텔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면서.
가장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스텔라가 노아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점이었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아끼는 동생이라 이건가.
신전은 스텔라와 노아의 탈출 문제로 시끄러웠다. 사실 논란의 초점은 스텔라와 노아보다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둘을 데리고 사라진 마법사에 맞춰져 있었다.
“마법사가 아직도 남아 있어?”
“그래. 그때 놈들을 쫓아갔던 성기사들 중에 발트가 있었는데, 걔가 말한 거야.”
사제들은 알베르트가 근처에 있는 것도 모르고 서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붉어진 주먹을 펴고 코르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에게 어떠한 말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올린 것이었다.
“……마법사.”
감히 자신을 두고 이번에는 어디로 도망쳤을지 궁금했다. 도망치면 내가 찾지 않을 거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 알베르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반면,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코르넬은 오히려 무언가 불편한 듯 두 손을 등 뒤에 모은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안 그래도 얼마 없던 마법사들이 수십 년 전에 어떤 사건으로 인해 전부 죽었다고 했었다.
그런데 마법사가 스텔라와 노아를 데려갔다니. 살아남은 마법사가 여전히 있단 말인가.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마탑에 대한 정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마법에 특화된 아르엘 왕국 안에 세워져 있다는 것.
그렇지만 은둔하며 아르엘 왕국을 뒤에서 지원해 주던 마탑은 이미 몰락했다. 마법사들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아르엘 왕국은 그들이 남겨 놓은 마법으로 문명을 일구고 있었다.
그만큼 마법사들은 강한 존재였다. 그들은 악마와 같이 마법을 사용하나 악마처럼 성수로 해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런 마법사가 스텔라를 데려갔다.
이번에 스텔라를 찾는다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겠다고, 코르넬은 그렇게 생각했다.
***
“안녕, 아가씨.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나는 잠시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젯밤에 아리안이 나를 도와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오늘 아침에 노아의 침대에서 눈을 떠서 어찌나 놀랐던지. 심지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노아를 보고 두 배로 놀랐다.
노아를 발로 툭툭 차며 농담으로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간다고 말했더니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얼굴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꾹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근데, 뭐. 자기가 말하지 않겠다는데 굳이 내가 물어봐야 할 필요가 있나. 나는 그의 몸을 넘어 아리안이 있는 위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아리안은 아침부터 방긋방긋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리안의 눈 밑이 얼굴색에 비해 어두웠다. 어제도 눈 밑만 어두워 보이기는 했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눈 밑이 어두우신데…….”
말을 끝마치지 않고 흐렸음에도 아리안은 내 말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아, 이거? 괜찮아. 나중에 며칠 몰아서 자면 괜찮아지겠지, 뭐.”
그러다가 큰 병에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리고 이거 말이야. 요즘은 거의 없어진 마녀들의 약인데, 아가씨 줄게. 자기 전에 물에 타서 마시고 자면 수면에 좋을 거야.”
“약이요?”
“응.”
수면에 좋은 약이라니, 그런 걸 왜 나한테 준단 말인가?
“저 말고 아리안…… 아니, 마법사님…… 그러니까…….”
“그냥 아리안이라고 부르면 돼.”
“아리안이 먹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왜인지 할머니의 이름을 찍찍 부르는 것 같아서 마음 한쪽이 불편하기는 했다. 아무리 외양이 젊다고 해도 나이가 하도 많아서 그런가.
“내가? 왜? 나는 이런 거 없어도 잘 자는데.”
“거울부터 보고 그런 말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리안과 나, 둘 중에서 수면이 더 필요한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누구나 아리안을 고를 것이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에잇, 그러지 말고 받아. 밤새 만들었단 말이야.”
아, 뭐야. 희귀한 보물 같은 게 아니라 직접 만들 수 있는 거였어? 그걸 깨달은 후에야 나는 선뜻 아리안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받기만 하고 감사 인사로 끝내려니 왜인지 부족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리안. 수면 부족은 큰 병으로 이어질지도 몰라요.”
“어, 정말? 지금 일주일은 안 잔 것 같은데. 오늘은 조금이라도 자야겠네. 잠 조금 안 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잠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참 부러웠다. 마법사들은 잠이나 건강에 대한 인식도 다른가 보다. 일반인에 비해 더 체력이 뛰어나거나 건강이 좋은 건가?
그때 문이 열리더니 아래층에서 노아가 올라왔다. 내가 올라올 때부터 깨어 있었으면서 뭐하다가 이제야 오는 건지.
들어올 때부터 노아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왔다. 아리안은 조금 들뜬 말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저 꼬맹이는 왜 또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지.”
꼬맹이……. 나는 아리안이 노아를 꼬맹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수백 년을 살았다고는 해도 노아한테 꼬맹이라니. 왠지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호칭인데.
그러다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하던 살로스가 떠올라서 나는 꾹 주먹을 쥐었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야, 꼬맹아. 인상 쓰지 말고 와서 아침이나 먹어.”
아리안은 또다시 노아를 꼬맹이라고 불렀다. 아리안을 바라보는 노아의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딱 오두막에서 살로스를 보던 그 눈빛이었다. 이러다가 살로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리안에게도 깨진 유리컵 같은 걸 휘두르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탁자를 툭툭 두드리자 순식간에 화려한 식사가 차려졌다. 아침부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속이 안 좋을 텐데, 라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식사는 가벼운 음식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심지어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 본 빵은 금방 구운 것처럼 따듯했다. 나는 그 후로도 빵을 톡톡 건드려 보다가 입에 넣었다.
어제는 연구를 하느라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던 아리안도 풀 따위를 포크로 눌러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한 채 눈앞에 놓인 샐러드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노아가 보였다.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불만이 저렇게 많은 거지? 심지어 아리안은 성기사들 사이에서 우리를 구해내 이곳으로 데려와 주기까지 했는데.
막막하기만 하던 상황이 이제야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조금씩 풀리고 있는데, 이유도 말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짓만 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아리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 대신 노아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도대체 방금 무슨…….”
놀라울 따름이었다. 노아를 저렇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노아도 얼굴을 마구 찌푸린 것과 동시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으나,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더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아리안이 험악한 노아의 얼굴을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노아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는 것을 반복했으나 곧 하, 하고 짜증이 담긴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기보다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하여튼.
나는 다시 빵으로 시선을 돌리고 달콤한 잼을 발라 입에 넣었다. 달달한 맛이 입안에 골고루 퍼졌다.
아리안과 노아의 기 싸움이 분위기를 망칠 뻔했던 것만 제외하면, 꽤 괜찮은 아침이었다.
***
다시 밤이 되고 노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리안은 또 밤새 연구를 할 생각인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잠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아리안이 잊지 말라는 듯 자신이 줬던 약을 가리켰다.
“수면에 좋다니까. 조금만 마시고 자 봐.”
그리고 그녀는 손수 둥근 유리컵을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과하면 중독되는 성분이 들어 있거든.”
“아아, 네.”
아리안이 물에 소량의 약을 타 내밀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컵을 받아들었다. 물의 색은 보랏빛이 도는 파란색이었다.
나는 컵 안에 든 액체를 한입에 마셔 버렸다. 향은 이상했지만 어린이들이 먹는 약처럼 과일 맛이 나는 덕에 꽤 쉽게 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안이 나에게 이걸 준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저한테 왜 준 거예요? 아무리 봐도 저보다는 아리안한테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어젯밤에……. 아니, 아니야. 그냥 푹 자라고.”
아리안이 빨리 자라는 듯이 손으로 베개를 탕탕 치자 나도 모르게 베개 위로 쓰러졌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아리안이 천천히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
아리안이 준 약의 효능은 꽤, 아니 엄청나게 뛰어났다. 오랜만에 푹, 깊게 잠을 자고 일어난 덕분에 몸이 개운했다.
아리안은 그 후로도 매일 내가 침대에 누우면 파란색의 액체를 내게 내밀었다. 어느새 며칠이 지났고, 그건 마치 일상 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매번 내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할 말이 있느냐고 물어도 아리안은 어물쩍 농담으로 대화를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손가락만 한 유리병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약도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엑. 이게 벌써 떨어졌네. 잠시만 기다려 봐. 금방 만드니까 먹고 자.”
“저…… 금방이 어느 정도인가요?”
“한 시간 정도?”
한 시간? 벌써 졸음이 쏟아지고 있는데 잠을 자지 않고 한 시간을 버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루쯤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이미 충분히 잘 자고 있기도 하고.”
“…….”
아리안은 한동안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며칠 동안 간간이 그녀를 관찰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는 고민할 때 저렇게 화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했다.
“그런가…….”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가까이에 있던 나는 그 소리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자다가 몸이 불편하면 말하고.”
아리안은 빛을 뿜어내는 마법구를 끈 뒤 불빛이 약한 촛불에 의존해 책을 펼쳤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잊고 있던 지난번의 악몽이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제야 나는 며칠 전에 꿨던 악몽을 기억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