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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50화 (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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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은 둥근 마법구로 스텔라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잠든 것을 보고는 그제야 마법구의 작동을 해제시켰다.

    스텔라가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밤을 새우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옆에서는 스텔라가 일정하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사람의 소리를 들으니 꽤 기분이 좋았다.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옆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스텔라였다. 아름다운 꿈을 꾸듯 평온하게 자던 그녀는 갑자기 몸을 비틀며 끙끙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아리안은 잠시 스텔라를 쳐다볼 뿐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흔히들 꾸는 악몽을 꾸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평범한 악몽 따위가 아닌 것 같았다.

    “스텔라?”

    아리안은 의문이 담긴 어조로 스텔라를 불렀다. 응답을 원해서 불렀다기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부른 것에 가까웠다.

    스텔라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호흡 또한 불규칙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그녀는 위태로워 보였다.

    아리안은 곧장 그녀에게 뛰어갔다. 의식도 없이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이 걱정됨을 넘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스텔라.”

    그녀는 스텔라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을 뿐이었다.

    “스텔라, 스텔라.”

    몇 번이고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크게 소리를 질러도 그녀는 지독한 악몽에서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했다.

    “아악!”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스텔라를 내려다보고만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빽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 다행이다. 아리안은 그제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스텔라의 시선은 이상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그쪽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흐으, 아악!”

    스텔라가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굳게 감았다. 그렇게 하고도 스텔라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부림쳤다.

    “노, 아. 노아…….”

    노아? 그게 누구였더라. 아리안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곧 그게 스텔라와 함께 있던 남자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스텔라는 눈을 뜨고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다시 눈을 감는 것을 반복했다.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 스텔라는 악몽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스텔라를 깨워야 했다.

    아리안은 스텔라의 손을 잡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악몽 속에 파묻힌 스텔라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스텔라.”

    어둡기만 하던 스텔라의 붉은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악몽에서 막 깨어나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는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왜 우는 거야?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엄청 놀랐어.”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 그리고 표정에는 어떠한 대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주먹을 세게 쥐더니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리안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애타게 부르던 노아라는 남자를 찾아 내려간 것이 분명했다. 아리안은 그녀를 따라가는 대신 책장에서 마법구를 꺼내 조심히 책상에 올려놓았다.

    마법구 위에 손을 얹고 집중하자 곧 마법구 중앙에 스텔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베개 위에 흘러내린 노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길래 아리안은 마법구가 고장 났다고 생각하고 마법구를 몇 대 때렸다. 하지만 곧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그저 스텔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텔라는 한참 동안 노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곧 얼굴이 평온해지는 걸 보니 잠든 듯했다.

    도대체 스텔라와 노아는 무슨 관계인 걸까. 끔찍한 악몽을 꾸고 고통스러워하던 스텔라가, 어떻게 노아를 보자마자 평온한 얼굴로 잠든 걸까. 큰 의문이었다.

    하여튼 그건 그렇다 쳐도, 결론은 스텔라를 저대로 불편하게 자게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

    아리안은 마법구의 작동을 해제시킨 후 다시 책상에 대충 처박았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 보니 깨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리안은 천천히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스텔라를 다시 푹신한 침대에 눕혀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봤을 때, 노아는 이미 스텔라를 자신의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준 후였다.

    벌써 잠에서 깨어났다고 하기에는 아직 늦은 밤이었다. 그렇다고 스텔라의 기척을 듣고 깼다고 하자니 그녀가 과하게 조용히 움직이던 게 생각났다.

    그렇다면 애초에 잠들지 않았던 건가. 아리안은 유심히 노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는 잠든 스텔라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도 그는 한참 스텔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음. 아리안은 벽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쁜 놈은 아닌 건가?

    생각해 보면 스텔라가 종종 노아에게 잔소리를 할 뿐이었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함께 성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지 않았던가.

    아리안이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휘두르자 스텔라의 주변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스텔라는 오묘한 색의 빛 안에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부디 꿈속에서는 편안하기를. 아리안은 조금 더 스텔라를 쳐다보다가 복잡한 머릿속을 지워 버리고 위층으로 돌아왔다. 뭐, 스텔라는 노아라는 녀석이 잘 챙겨 주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연구에 몰두했다.

    ***

    노아는 늦게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낮에 잠을 조금 잔 탓인지 혹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너무 밝은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낮에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스텔라가 했던 말을 다시 상기시켰다.

    [네 잘못을 생각하면서 평생 내 옆에서 사죄하면서 살아.]

    그 말에 감정이 담겼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스텔라가 떠나고 다시 그녀를 찾는 과정에서 그는 몇 가지를 포기했다.

    처음 그는 스텔라가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이 애증이라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스텔라는 그를 보며 과거의 불쌍했던 노아를 떠올리고는 했었다.

    노아 또한 그것을 알고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졸랐다. 그녀의 안에 두 가지 감정이 존재한다면, 차라리 증오를 지워 버리라고. 그렇게 애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증오가 아닌 사랑이 희미해졌다. 끝내 그녀는 노아를 미워하며 그를 떠났다.

    그래도 노아는 계속 희망 속에서 스텔라를 찾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밝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대하며 그녀를 찾고 또 찾았다.

    물론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희망과 꿈은 그저 상상 속의 무가치한 기대였다.

    스텔라를 대신해 감옥에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노아를 사랑해 주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매일 그녀가 자신을 만나러 와 줬으니까. 스텔라가 주는 사소한 물 한 잔, 빵 한 조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건조한 어조를 들을 때면 다시 기분이 바닥에 처박혔다.

    계속 욕심이 났다. 사랑해 주지 않아도, 그녀의 곁에만 머무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애원하며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다.

    참, 어리석기도 했다. 자꾸 흔들리는 모습이 스스로가 보기에도 아둔하고 멍청했다.

    노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빨리 잠이 들기 위해 노력했다. 깨어 있으면 자꾸 머리가 복잡해져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계단을 타고 다급하게 노아가 있는 층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상한 여자인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노아는 발소리의 주인이 스텔라임을 확신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스텔라가 가쁜 숨을 쉬며 들어왔다. 노아는 살짝 눈을 떠 그것이 스텔라라는 것을 확인했다.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온 스텔라는 천천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스텔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노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갑자기 왜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거지?

    그러나 그는 곧 그 손길에 애정이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애정이 담겨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지금의 노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는 달빛을 받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스텔라는 노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이번에는 뺨을 세게 문질렀다. 문질렀다기보다는 꼬집는 것에 가까워 노아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스텔라는 꼬집는 것에 가깝게 그의 뺨을 문지르다가 노아가 누워 있는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노아는 그녀의 숨결을 바로 옆에서 들으며 곁눈질로 몰래 그녀를 쳐다봤다.

    곧 완전히 잠들었는지 스텔라의 몸이 규칙적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텔라를 침대에 눕혔다. 그때 방문 쪽에서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에 올 사람은 마법사라는 그 이상한 여자밖에 없었다.

    노아는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수십,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말이 진실인지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그는 아리안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 버린 채 스텔라만을 응시했다. 그녀가 잠든 틈을 타 몰래 손등에 입술을 붙여 보기도 했다. 깨어 있을 때 이런 짓을 하면 더욱 미움을 살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노아는 시선이 못 박힌 듯 스텔라를 뚫어져라 쳐다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노아는 스텔라가 그랬던 것처럼 스텔라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보기도 하고, 뺨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 마치 그녀가 유리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히.

    그는 완전히 스텔라의 행동을 따라 했다. 침대는 몇 없었지만 그가 잘 만한 방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노아는 굳이 침대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구부정해진 목이 더럽게 아팠다. 노아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꿨다.

    어떻게 해도 불편한 것은 똑같길래 결국 그는 바닥에 눕는 것을 택했다. 아리안이 이미 청소를 해 줬기 때문에 바닥의 상태는 양호했다.

    눈을 반쯤 감자 창문 사이로 반짝반짝 예쁘게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그는 별을 향해 잠깐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괜한 짓 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그렇게 생각하며 노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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