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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49화 (4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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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환영이 남아 있다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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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따지듯 나를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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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누나. 내가 사랑하는 절대적인 믿음이 이렇게 흔들리면 나는 어떡하라는 거야. 나는 누나가 왜 죄책감을 갖는 건지 도저히 이해하지를 못하겠어.”

    “시끄러워, 말 걸지 마. 조용히 좀 해. 지금은 안 보이니까.”

    “지금은 안 보인다는 게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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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진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노아는 끈질기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네 말 한마디가 내 죄책감을 없앴으며 네가 내 죄를 부정해 줬기에 이 환영이 사라졌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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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는 뜻이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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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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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나 몇 개만 물어봐도 돼?”

    “내가 허락 안 해 줘도 물어볼 거잖아.”

    “날 왜 감옥에서 꺼내 줬어?”

    “그거야 당연히…….”

    “그때 분명 누나는 환영을 없애려고 날 꺼냈다고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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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사들에게 쫓기며 흘리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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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누나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잖아.”

    “…….”

    “네 잘못을 생각하면서 평생 내 옆에서 사죄하면서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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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이 환영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이 노아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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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노아를 옆에 두지 않아도 환영을 없앨 방법이 있다면 그를 옆에 둘 필요가 없었다. 소설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환영을 없앨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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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든지 사죄할 테니 가지 마.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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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있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빌고 있는데도 무정하게 가 버릴 거냐고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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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다시 잠이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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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손을 잡은 노아의 손을 대충 흔들어 털어냈다. 손으로 그의 눈을 덮어 감긴 후에야 나도 옷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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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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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은 우리에게 꽤 극진한 대우를 해 줬다. 겨우 몽마의 힘이 깃든 검이 그녀의 목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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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마법으로 따듯한 수프와 빵을 만들어서 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아가 먹지 않겠다며 괜한 고집을 부리고 버티길래 머리를 잡고 입에 빵을 욱여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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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가 늦게 왔나. 성인식도 치른 놈이 대체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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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은 우리가 식사를 하는 중에도 계속 책상 앞에 앉아 깃펜으로 무언가를 쓰고만 있었다. 눈 밑이 어두운 걸 보니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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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저렇게 살다가는 몸이 망가져서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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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생각을 하다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자기 입으로 수십, 수백 년을 살았다고 말했는데 뭐. 그 정도 살아왔으면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잘 관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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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도 햇빛을 받으며 몇 시간 낮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나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우리의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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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한 것 같은데 자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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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보는 사람이니 계속 경계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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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노아나 알베르트, 테오필 같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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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침대가 있는 방이 몇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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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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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저 아래층에서 자고, 아가씨는 내 침대에서 잘래? 나는 앞으로도 며칠 동안 안 잘 예정이라서.”

    “누나가 왜 당신 침대에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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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놈 말투 싹수없는 거 봐라. 얼굴을 구기고 노아를 노려봤더니 그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쓰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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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리안이 안내해 준 침대에 올라가 주섬주섬 이불 안에 들어가 누웠다. 솜으로 가득 채운 이불은 폭신하고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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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은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나를 배려해 심지가 가장 작은 초에 불을 붙였다. 초의 불빛은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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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각사각. 깃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꽤 듣기 좋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편하게 누웠다. 침대에서는 좋은 꽃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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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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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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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로스가 내 꿈에 나타나지 않은 지는 꽤 됐다. 그 날짜를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 그 단검을 얻은 날이자 테오필이 죽은 날부터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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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로스가 없는 꿈속에서의 내 의식은 두루뭉술했다. 내 신체의 형체도 정확히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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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은 온통 암흑뿐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어둠과 암흑이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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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말하자면 어둠과 암흑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둠과 암흑 속에 숨어 나를 공격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을 누군가가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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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곧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어차피 여긴 꿈속인데. 누군가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현실의 내가 다칠 리가 없는데 도대체 뭘 무서워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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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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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암흑 속에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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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적한 액체와 바닥이 서로 붙었다가 떨어지는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밀색 머리의 남자가 암흑 속에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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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이 흐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실제로도 떨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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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필은 노아와 내가 만든 칼자국을 그대로 몸에 지닌 채로 나타났다. 머리가 터지고, 몸의 내용물이 전부 쏟아진 그때의 그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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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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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동물의 고통에 찬 신음을 닮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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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하나 남은 눈동자로 끔찍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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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쳐야지. 저 끔찍한 테오필과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야지.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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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상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 손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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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사이 테오필이 비틀거리며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체가 썩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코를 막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은 공포에 잠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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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발치에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테오필의 몸에서 흐르고 있는 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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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 피는 내 손에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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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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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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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을 내려다보니 알베르트와 함께 있을 때처럼 손에 붉은 환영이 보였다. 아, 싫다. 또 환영이 보인다. 노아를 데려왔으니 이제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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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감아도 테오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끔찍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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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으, 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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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좀 사라져.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먼저 나를 못살게 굴면 당신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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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아.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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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를 불러야 한다. 노아를 불러서, 내 옆에 둬야지만 이 짜증 나는 환영을 잠시나마 없앨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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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노아는 아래층에 있었다. 아래층으로 가려면 눈을 떠야 했으나, 눈을 뜨면 손에 묻은 피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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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도대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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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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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빽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혼란스럽던 머리가 말끔해졌고, 나를 부르던 갈라진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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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가가 축축한 걸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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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는 거야?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엄청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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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이 놀란 얼굴로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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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부르는 테오필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나 손에 핏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이 노아가 필요한 때였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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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낡은 나무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탑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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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컥. 나는 곧장 노아가 머무르는 방의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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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노아는 들어오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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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 아직 환영은 없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다가가야만 환영이 없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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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개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아. 드디어 핏자국이 사라졌다. 환영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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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노아의 옆에 서는 것만으로 환영이 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를 통해 환영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버린 탓일까. 결국 환영을 없애는 건 노아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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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환영을 처음으로 없애 준 게 노아, 그였기 때문에 내 사고가 맹목적으로 그를 믿고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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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뭐. 사람을 죽인 죄인들끼리 서로를 두둔해 주며 범죄를 부정해 주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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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이라. 이전의 나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노아뿐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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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었고. 이것은 구원의 탈을 쓴 회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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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과 감정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때때로 내가 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도 하고 사실 내가 옳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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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어느 한쪽에 생각이 고정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노아를 내려다봤다. 아무리 달빛이라도 정통으로 받고 있으면 눈이 부신지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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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미운 얼굴을 어떻게 하면 좋나. 나는 손을 뻗어 노아의 뺨을 엄지로 세게 문질렀다. 그런데도 그는 깊게 잠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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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어렸을 때의 노아와 지독히도 닮았다. 차라리 자라면서 얼굴이 달라졌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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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쭈그려 앉아 노아의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 더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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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편해지니 금방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졸음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곧 암흑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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