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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48화 (4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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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손을 잡자마자 시야가 뒤집히더니 몸이 어딘가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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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눈을 떴을 때, 노아와 나는 물건이 가득 쌓인 더미 위에 처박혀 있었다. 마법을 사용한 저 여자만이 멀쩡하게 두 발로 서 옷의 먼지를 툭툭 털고 있었다.

    “우리 집이야. 더럽기는 한데, 뭐 앉을 공간 정도는 있으니까.”

    ?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책상이 드르륵, 끌리는 소리를 내며 방의 중앙으로 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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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통성명부터 할까. 나는 아리안이야. 아가씨는?”

    “아……. 스텔라예요.”

    “그쪽은?”

    “……노아.”

    ?

    이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싹수없게 반말을 찍찍하네. 내가 노아의 어깨를 툭 치자 노아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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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표정은 마치 ‘저 사람도 나한테 반말했잖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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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아가씨. 아니, 이름으로 불러야지. 스텔라. 그 검은 어떻게 구했어? 길 가다 주운 건 아닐 테고. 그렇게 흔한 물건은 아니니까. 나도 기록에서만 읽어 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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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구했냐고 물어도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 손바닥을 문지르니 갑자기 튀어나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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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저 근데.”

    “응? 말해 봐.”

    “저는 이게 뭔지도 아직 잘 모르겠는지라.”

    ?

    그렇게 물으셔도 뭔 말씀을 못 드리겠는데요. 나는 눈에 살짝 힘을 주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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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지금 당장 아리안이라는 여자를 믿을 수도 없었다. 정말로 이 검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목적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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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글벙글 멍청하게 웃는 모습이 무해해 보이기는 했으나 사람을 외양으로만 판단했다가는 언젠가 뒤통수를 맞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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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 이 검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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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아리안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온 것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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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어디인가요?”

    “우리 집 말하는 거야?”

    ?

    노아는 이제 거의 힘이 없는지 책상에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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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간간이 내 몫의 식사를 몰래 가져다주기는 했으나 자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힘이 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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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를 빤히 바라보던 아리안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자 둥근 접시에 담긴 수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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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속인 것 같길래. 빈속에 기름진 걸 먹으면 속이 뒤집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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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오래 굶주린 노아를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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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팍 인상을 쓰고 수프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수저를 들고 수프를 떠먹었다. 따지기에는 심하게 굶주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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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일단 우리 집은 아르엘 왕국에 있는 마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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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을 듣고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마탑, 여기가 마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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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탑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었다. 마법에 특화된 아르엘 왕국에 위치한, 마법사들이 모여 연구를 진행하는 탑.

    나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 곧 우리가 땅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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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곳은 마탑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마탑에서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마법도 개발한다고 들었다. 마법을 개발하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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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탑의 마법사였을 줄이야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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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은 없나요?”

    “다른 사람? 다른 마법사들 말하는 거야?”

    ?

    으음. 아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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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죽었어. 23년 전쯤. 애초에 별로 머릿수가 많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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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아리안은 내 당황한 표정을 보고 표정이 웃기다고 놀렸다. 그녀는 혼자 킥킥거리며 웃다가 과거 회상에 빠져 혼잣말하듯 주절주절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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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게 실력이 뛰어난 애들이 많았어. 수십 년 동안 함께하면서 연구도 많이 했고 마법 개발도 많이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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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수십 년이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아리안의 나이는 몇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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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기록들을 읽다가 이 세상 말고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했거든. 그래서 그곳의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오려고 했어. 마법진을 그려서 힘을 전부 쏟아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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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목숨을 건 시도였다고 할 수 있었는데, 실패했어. 그렇게 말하고 아리안은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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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라도 해 줘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으나 지금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오려고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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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묻지도 않은 걸 주절주절 말하고 있군.”

    ?

    옆에서 노아가 틱틱거렸다. 얘 요즘 도대체 왜 이래. 사춘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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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조용히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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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손으로 노아의 입을 틀어막은 뒤 계속 아리안의 말을 들었다. 아리안은 노아의 뚱한 표정을 보고 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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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요?”

    “어어? 이 이야기를?”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들다는 건 아는데, 저한테 너무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요.”

    나한테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에 아리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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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뭐. 듣고 싶다는데 말 못 해 줄 것도 없지. 어차피 꽤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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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의 말에 따르면 23년 전 마법사들이 떼로 죽은 이유는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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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것은 마력이 많이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실패할 확률도 높다. 아리안을 제외한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그리고 그것을 발동시키기 위해 힘을 전부 쏟아부었으나, 마법진에서는 빛만 뿜어져 나올 뿐 다른 세상의 사람은 마법진에서 소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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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후로 마법사들 사이의 불화는 점점 몸집을 불렸고, 그나마 힘이 남아 있던 마법사들은 서로에게 저주를 걸고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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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주를 걸고 싸운 탓에 힘이 빠진 마법사들은 하나둘 죽기 시작했고, 남아 있던 마법사들도 결국 저주를 받아 전부 죽었다. 그리고 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마법진에 힘을 쏟아붓지 않았던 아리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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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가 아리안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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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일 이후로 무슨 저주받은 마탑이라고 소문이 났는지 아무도 마탑에 찾아오지를 않더라고. 그래서 나 혼자 연구나 하면서 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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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이 선뜻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은 정말 고마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마법사들이 싸워서 서로에게 저주를 걸고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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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했다는 그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23년 전쯤 마법사들이 죽었다는 것은 곧 그때쯤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그렸다는 말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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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 전. 그해는 내가 태어났던 해였다. 정확히는 갓난아이인 채로 고아원에 버려졌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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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세상과 연결하는 마법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알베르트가 항상 운운하는 그 지긋지긋한 향인지 뭔지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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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생을 그리워한 적은 없지만, 잘만 하면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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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쪽에서도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나요?”

    “에헤이, 그런 거 궁금해하지 마. 나한테 궁금하다고 말해도 난 못 해 주니까. 괜히 그 바보들처럼 개죽음하기는 싫거든. 아, 근데 그 검에는 마력이 꽤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아. 한 번만 빌려줘 봐. 혹시 알아? 연구하다가 그 마법진을 다시 열 수 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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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검에 마력이 많이 담겨 있다고? 나는 아리안과 단검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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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아리안이 검을 연구하다가 마법진을 열게 되면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몽마의 힘이 담겨 있다는 말도 그렇고, 이 검을 얻은 후로 살로스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이 검이 왠지 살로스와 큰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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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망설이는 걸 보면 소중한 물건인가 보네?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봐. 심심하면 마탑 구경이라도 할래? 아래층은 내가 거의 안 다녀서 더럽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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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도 충분히 더러운데 아래층은 더 더럽다고? 나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공기 대신 먼지를 마시는 건 사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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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아리안은 직접 마법으로 아래층을 청소해 주겠다며 노아와 나를 아래층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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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그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때가 낀 계단이 본래의 돌 색으로 변했고 먼지가 가득한 방이 깨끗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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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됐지? 그럼 난 연구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잘 생각해 보고 올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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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은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아래층에는 노아와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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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까 하도 구박을 해서 그런지 어쩐지 조금 어색했다.

    방구석에 텅 빈 옷장이 있길래 나는 그곳에 가서 기대고 앉았다. 노아도 나를 따라와 내 옆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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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옷소매로 단검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 단검 중앙의 자색 보석이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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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안은 이 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 검이 살로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리안에게 묻는다면 아리안이 알아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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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러고 보니 밤새 나를 괴롭혔던 환영은 노아와 함께 있었더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이렇게 쉽게 사라지다니. 왠지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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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피곤했다. 힐끗 노아를 보니 그 또한 피곤한지 눈을 살짝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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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뒤통수를 옷장에 기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몸을 뒤덮는 햇살이 꽤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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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어깨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슬쩍 눈을 떠 보니 노아가 내 어깨에 머리를 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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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를 노려보며 어깨를 털어낼까 고민하다가 그냥 혀를 쯧, 차고 그대로 뒀다. 옆에 벽도 있는데 왜 하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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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나도 다시 눈을 감았다. 여기서 또 소란스럽게 그를 구박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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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방 옆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길래 노아가 이미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깨가 불편해서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는데, 갑자기 노아가 눈을 감은 채로 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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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날 두고 가려고 하는 거지?”

    “어깨가 불편한 걸 어쩌라고.”

    “아니, 그거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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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아니라면 뭘 말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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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렇게 싫어?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을 정도로, 내가 싫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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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아까 내가 한 말을 쭉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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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에는 두고 가지 말라고 어린애처럼 떼쓰며 울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꽤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누나가 나한테서 뭔가 필요로 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조금 안심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

    “도대체 나를 통해서 얻으려고 했던 게 뭐야? 이제 그게 필요가 없어졌어? 그래서 가려고 하는 거야?”

    “다른 곳으로 가면 이 짜증 나는 환영이 사라지기라도 하겠지. 설령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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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제야 노아는 쭉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는 내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들어 올려 뚫어지게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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