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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성기사 단장을 죽인 범인이 아니더라도, 그는 살인자이자 범죄자입니다. 그런 것을 살려 둬서야 되겠습니까. 제국의 앞날을 방해할 범법자인데.”
“그렇게 따지면 공작님은요?”
“무슨 의미입니까?”
“스테인 경을 시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으신가요?”
소설에서 내가 읽은 것만 세어도 다섯 번이 넘었다. 여주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처리한 것은 코르넬이었다. 물론 그의 뒤에는 항상 알베르트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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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갚아야 할 만큼 흉악한 죄를 저지른 자들뿐이었습니다.”
“정말요? 죄가 없는 사람은 없었나요?”
“스텔라, 그만.”
알베르트는 듣기 싫다는 듯 내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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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당신의 살인을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죄를 탓하는 자가 있다면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이겠지요.”
내가 저지른 죄.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알베르트와 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눈앞에 위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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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보이는 손은 붉었다. 그냥 붉은 것이 아니었다. 두 손이 붉은 피로 완전히 덮여 있는 탓에 붉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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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야. 제발 아니라고 해 줘. 누군가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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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점점 손에 고여 방울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베르트를 바라봤지만 그는 이 피가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차라리 당신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모두에게 버려졌을 때 내가 기꺼이 당신을 거둘 테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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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렇게 말을 하면 테오필이랑 뭐가 달라. 내가 무너지기를 바라던 테오필이랑 뭐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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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공작님. 제발, 제발…… 노아를 구해 주세요.”
“놈이 죽는다고 해서 당신이 무너질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아니, 아니에요. 난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신은 더 이상 나를 구원해 주지 않을 테니까요.”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꼴이 한심했다. 내가 언제부터 구원 따위를 원했다고. 그것도 그렇게 미워하던, 노아의 구원이라니.
알베르트는 그 예쁜 얼굴을 가차 없이 구기며 몰인정하게 답했다.
“그게 굳이 놈이 될 필요는 없잖습니까.”
“안 돼요. 꼭 노아여야만 해요. 노아가 아니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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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는 오히려 나를 죄책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노아와 대화를 할 때는 보이지 않던 피가 알베르트와 대화를 하자마자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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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베르트의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의 팔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여전히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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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요, 놔 주세요. 지금 노아한테 가야 해요.”
“놈에게 가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 알베르트가 나를 보내 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보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바닥을 기어서 가는 한이 있어도 나는 가야만 했다. 오직 나를 위해서, 노아의 한마디에 기대 내가 살인자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오로지 내 편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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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그놈이 아니면 안 되는 겁니까? 당신이 나에게서 도망친 사이 놈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다 알고 왔습니다. 왜 아직도 놈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버리지, 못한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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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죄를 부정해 주는 사람이 노아밖에 없어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입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나는 당신을 공작저로 데려갈 겁니다.”
“전 가고 싶지 않아요.”
“스텔라. 사랑하는 나의 스텔라.”
“…….”
“이 이상 고집부리지 말아요. 내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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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눈을 문질러 닦아도 손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이것이 진실이 아니며 환영일 뿐이라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알베르트에게 손에 있는 이 핏자국에 대해 밝혀야 하나. 만약 그가 알게 된다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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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알베르트가 나에게 거부감을 갖는다면, 더 이상 나를 쫓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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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심호흡한 뒤 조심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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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손에는 지금 피가 잔뜩 묻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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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내 손을 살핀 알베르트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예?’ 하고 되물었다.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말을 마구 쏟아 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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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사 단장을 죽인 후부터 손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여요. 알아요, 저도 안다고요. 이게 환영일 뿐이고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걸.”
“스텔라.”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이건 노아만이 없애 줄 수 있어요. 노아의 말 한마디면 사라질 환영인데,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해서 미쳐 버리라는 말씀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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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알베르트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마침내 허리를 감은 팔을 풀어냈다. 허리를 짓누르는 강력한 힘이 사라지자 여러모로 한결 편해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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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몸을 돌려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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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핏자국이라는 환영을 없애 줄 수는 없는 겁니까?”
“아니, 안 돼요. 오히려 공작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핏자국을 더 선명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노아의 말이 꿈이라면 알베르트의 말은 현실이었다. 노아의 말이 달콤한 거짓이라면 알베르트의 말은 씁쓸한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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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에게는 달콤한 거짓을 속삭여 줄 거짓말쟁이가 필요했다. 내 죄를 함께 부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 또 도망칠 겁니까? 내가 그 환영을 없애 주지 못하기 때문에?”
알베르트의 말투는 차분했으나 그의 표정은 화가 난 듯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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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이제 그만해 주세요…….”
“…….”
“저는 공작님께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제발 이제 제가 원하는 대로 평화롭게 살게 해 주세요, 제발. 저를 찾지도 말아 주세요. 저를 쫓지도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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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제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러고 있겠습니까.”
“제가 아니라 제 향이 좋은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향을 가진 사람은 저 말고도 또 있을 거예요. 아, 신전 도서관에 기록이 있을 거예요. 날이 밝으면 제가 찾아올게요. 그러니까…….”
“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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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횡설수설하자 알베르트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쓰러지다시피 몸을 늘어뜨렸다. 다만 알베르트가 나를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쓰러지지 못한 것뿐이었다.
“이제 향은 상관이 없습니다. 이 향이 당신의 향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거예요.”
아니야. 당신은 다른 세계의 향에 중독된 것뿐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외쳤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믿을 리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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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는 내 손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말한 핏자국이 있는 자리를 살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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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자국, 핏자국이라.”
“…….”
“밤이 깊어 피곤한 탓에 이상한 것이 보이는 모양입니다.”
밤이 깊은 탓에, 피곤한 거라고? 하지만 이 핏자국이 보이는 시간대는 다양했다. 새벽에 보이기도 했으며 아침에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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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는 내가 보는 이 환영을 피곤한 탓에 착각한 것뿐이라고 치부했다.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혹은 억지로 이 환영을 부정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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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방으로 돌아갑시다. 동이 트면 당신을 공작저로 데려갈 테니.”
“저를 데려가시면 저는 정신이 나가 버릴지도 몰라요.”
“상관없습니다.”
“공작님께서 미친 여자를 거두셨다고 소문이 날 거예요.”
“그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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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나는 알베르트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데려가지 말아 달라는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건데 왜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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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면 일부러 이해하지 못하는 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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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네, 스텔라.”
“지금 이대로 공작님을 따라가면, 전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공작님이 관계를 요구하시면 따르고, 평생 그곳에 갇혀서 제가 원하는 것은 버리고,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원하는 것은 내가 전부 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포기하라는 것만 제외하고 전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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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알베르트는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내 의견을 묵살한 채,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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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알베르트는 해가 뜨면 공작저로 출발하자고 말하며 나를 방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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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받은 방에서는 창문을 통해 신전 입구 쪽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커튼 뒤에 숨어 알베르트의 마차가 마을로 향하는 것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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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낮에 알베르트가 찾아왔을 때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했었다. 해가 지면 외부인은 전부 신전에서 내보낸다는 것이 신전의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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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신전 측은 알베르트가 나를 데려갈 수 있도록 그를 신전에서 내보내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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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신전의 사람들은 나를 몽마에게 시달리다 미쳐 버린 불쌍한 사람 취급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신전은 나를 알베르트에게 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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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도망치면 노아는 그대로 죽게 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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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새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하며 침대 위를 굴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가 뜨면 알베르트가 신전으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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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알현실의 의자에 앉았다. 알현실 창문을 통해 희미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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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성기사 단장 테오필을 죽인 죄인의 사형 집행일이 정해졌다. 정확히 사흘 후에 죄인은 형장의 이슬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교황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전의 모든 이들이 테오필이 죽었다는 이유로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교황만이 성기사 단장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슬프지 않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죽음이 기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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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교황이 그 자리를 얻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테오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