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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44화 (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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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고? 설마 애니카는 아닐 테고, 노아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렇다면 설마…….

    ?

    “혹시, 그 찾아온 사람이 자신이 누구라고 말하던가요?”

    “알베르트 모니카 공작 전하셨습니다.”

    “…….”

    ?

    순간 말을 잃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노아는 그렇게 말했다. 알베르트가 자신에게 감시자를 붙여 놨을 수도 있다고.

    ?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아니, 애초에 이곳에 계속 남아 있던 내가 잘못이었다.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

    “저, 하나만 더 질문할게요. 공작님께선 제가 이곳에 있다고 확신하고 계셨나요?”

    “금발과 붉은 눈을 가진 아가씨를 찾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아. 이 정도면 거의 확신이나 다름없다. 분명 알베르트는 노아에게 감시자를 붙여 놨던 거다. 그게 아니라면 노아가 나를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찾아올 리가 없잖아.

    ?

    “만나지 않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래도…… 만나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신이 아가씨의 보호자라고 주장하셨는데…….”

    “보호자요?”

    ?

    문 너머의 사람이 뻔뻔스럽게 네, 라고 대답했다.

    ?

    “전 보호자 없이는 앞가림도 못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가서 전해 주세요.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만…….”

    “테오필, 아니 성기사 단장이 한 말 때문인가요?”

    “네?”

    “몽마에게 시달리고 있던 사람이니, 누군가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했었나요?”

    ?

    오히려 내가 알베르트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처지인데, 알베르트를 내 보호자라고 생각하다니. 애초에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성인에게 보호자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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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씨?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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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얇은 이불이 보호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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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시 이불에서 꾸물꾸물 나왔을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웠다. 왜인지 창문이 있으니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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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이니 신전 내의 경비가 그렇게 삼엄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신전을 지키는 성기사들은 전부 건물 밖에 있을 테다.

    ?

    나는 주변을 살피며 방에서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이곳을 지키는 성기사들은 없었다. 주머니에는 작은 빵을 넣어 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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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알베르트와 만나기 전에 이곳에서도 도망친다면, 다시 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

    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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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과 멀지 않은 곳에는 서쪽 왕국인 아르엘과 연결되는 국경 지대가 있었다. 서쪽 국경 지대는 다른 국경 지대들과는 다르게 마물이 소환되지 않아 안전한 곳이었다.

    ?

    잠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마음을 굳혔다. 어설프게 도망친다면 알베르트는 반드시 나를 찾아낼 것이다.

    ?

    나는 아르엘 왕국으로 넘어갈 것이다. 아니, 넘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거가 반복될 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이대로 아르엘 왕국으로 가 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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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노아는?

    ?

    그 생각을 한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이대로 아르엘 왕국으로 가 버린다면 노아는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처형대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

    나 대신 감옥에 들어간 그에게, 죽음까지 강요해야만 하나?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정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

    하아. 발에 못이 박힌 듯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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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복도에서 어느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너 아까 모니카 공작 봤냐?”

    “당연히 봤지. 아주 얼굴이 장난 아니던데.”

    ?

    헉. 야간 순찰을 도는 성기사들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른 벽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

    저벅, 저벅. 두꺼운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복도 끝을 향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완전히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히 벽 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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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우…….”

    ?

    나는 노아를 살려야만 했다. 그를 살리지 않으면 또다시 짜증 나는 죄책감으로 인해 두 손이 피범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게다가 노아를 생각할 때마다 과거의 그가 떠올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노아가 과거의 그 여리던 아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죽도록 이곳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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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생각을 해 보자. 어떻게 하면 노아를 그 더러운 지하 감옥에서 꺼낼 수 있을지.

    ?

    나는 무의식적으로 지하 감옥을 향해 걸었다. 한 자리에 오뚝이처럼 서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며 생각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몸의 힘을 빼고 걷기는 했으나 넓은 복도에 걸음 소리가 울리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걸음 소리를 줄이기 위해 조금 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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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걸음 소리와 다른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겹치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 빨리 걸어도, 조금 느리게 걸어도 따라오는 걸음 소리는 일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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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했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

    순찰을 도는 성기사에게 발각된 것이 분명했다. 왜 이 시간에 방이 아니라 이런 곳에 있었냐고 추궁하면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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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상대는 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성기사는 밤에 방에서 나온 나를 매섭게 추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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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곧 이어진 것은 성기사의 위협적인 추궁이 아니라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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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는 팔을 뻗어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파악할 수 있었다.

    밤에는 신전에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설마 공작이라서 그냥 들여보내 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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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신전에 사는 게 신을 모시는 사제라는 놈들인지 계급주의자들인지 모르겠다. 상대가 지위만 높으면 다 허용해 주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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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전에 방문을 두드렸던 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으득,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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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꿀을 바른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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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스러운 나의 스텔라.”

    “……아.”

    “도망쳐서 이런 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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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허리를 감싼 팔은 단단했다. 오래전부터 그의 고유한 향이었던 그 시원한 향은 여전히 깊게 남아 있었다.

    ?

    “당신이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아닌데요.”

    “도대체 왜 당신은 얌전히 앉아 있는 방법을 모르는 걸까요. 가만히 내 옆에만 있으면, 당신이 원하는 건 전부 들어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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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거짓말이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잖아요. 맨날 섹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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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님이 저한테 뭘 해 주시든 그게 제가 원하는 건 아닐 거예요. 공작님이 저한테 해 주실 수 있는 건 없어요.”

    “제가 당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제발 저 좀 그냥 평화롭게 찌그러져 살게 해 주세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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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트는 잠시 말하기를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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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알지 못할 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 옆에서는 공기마저도 이렇게나 달콤한데.”

    “결국 저의 무언가가 좋은 게 아니잖아요. 그 향인지 뭔지를 좋아하시는 것뿐이죠.”

    “그것마저도 당신의 일부입니다. 당신의 성격을 좋아하든, 외모를 좋아하든, 결국 당신을 사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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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많고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에 널렸는데 왜 굳이 나한테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절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 향이라는 게 뭐길래 알베르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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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잠시만. 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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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이전에 테오필이 내게 던져 주고 갔던 책들이 떠올랐다. 엘도니아 여행기에 나온 내용이었나. 하여간 그 책에서 엘도니아는 오스틴이라는 남자에게서 희한한 향이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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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오스틴과의 만남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그 향에 중독될 것만 같아서 끝내 허겁지겁 그 마을을 떠났다고, 그렇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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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트가 말하는 향도 그것과 비슷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여주를 사랑해야 할 알베르트가 나를 따라 신전까지 쫓아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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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코르넬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해 줬습니다. 하지만 결국 반 미리엄, 아니,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동생이 당신을 찾아 준 덕분이죠.”

    결국 노아에게 감시자를 붙여 그를 쫓아왔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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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놈에게는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네. 당신을 찾게 해 줬으니.”

    “노아는 지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요.”

    ?

    내 말을 들은 알베르트가 ‘그래서 뭐?’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비꼬기 위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표정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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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알베르트라면 노아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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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님. 노아를 구해 주세요.”

    “네?”

    ?

    알베르트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입 밖으로 헛웃음을 뱉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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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텔라. 갑자기 내게 그런 말을 해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작님에게는 공작이라는 지위가 있잖아요.”

    “더군다나, 놈은 고귀한 성기사 단장을 죽인 범죄자가 아닙니까. 저는 당신의 말대로 이 제국의 공작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국의 공작이라는 자가 그런 범죄자를 옹호할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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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는 말이었다. 노아는 나 대신 죄를 뒤집어썼으니 표면적으로 성기사 단장인 테오필을 죽인 범죄자였다. 공작이 범죄자를 옹호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런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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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무엇이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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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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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사 단장을 죽인 건 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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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결국 노아를 살리기 위해 거짓을 말했다. 뭐, 그래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결국은 나도 테오필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최우선인 일은 노아를 구하는 것이었으니.

    “이런. 내가 없는 동안 살인까지 저지르셨습니까.”

    “하지만 이유가 있었어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

    알베르트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마치 내 사정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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