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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43화 (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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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말한 대로 하면 뭐가 남는데?”

“뭐가 남느냐고?”

“이 죄책감이 사라지기라도 해? 도대체 내가 그렇게 해서 내가 뭘 얻는데?”

?

얻는 것도 없는데 뭐하러 내가 싫은 일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대가 없이 너를 사랑하라니. 그냥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믿음을 얻겠지. 나는 항상 누나가 하는 일이 옳다고 믿고 있으니까.”

“뭐?”

“누나가 성기사 단장인지 뭔지, 그놈을 죽였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었겠지. 놈이 악마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겠지. 나는 그렇게 믿어.”

?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노아가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가 나를 잡아당기자 나는 힘없이 노아에게 다가갔다.

?

“원래 신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거잖아. 천하의 죄인을 죽인 이유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내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나는 노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

밤에도 어둠을 뚫고 손 위에서 선명하게 나를 괴롭히던 핏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했다.

?

너는 내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설마, 설마 그 말 한마디로 나를 괴롭히던 환영이 사라졌다고?

?

평소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신의 저주가 아니라 내 죄책감일 뿐이었구나.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운 탓인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

그래서 대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네 말 한마디가 나를 구원한 건가.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나 증오하는 네가 나를 구원한다니. 신도 해 주지 않은 일을, 어떻게 감히 네가?

?

그래서 노아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노아는 순순히 손을 놓을 뿐, 나를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렌다의 석상 앞에서 기도해도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살인자의 말 한마디에 핏자국이 지워지다니.

?

아니야, 아니야. 나는 이불 속에 숨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머리가 윙윙 울리는 것 같았다.

?

나는 네가 싫어. 근데 네가 나를 구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어, 그래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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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도 보기 싫어…….”

?

네 푸른 눈동자도 싫고 어두운 흑색의 머리카락도 싫다. 네가 나를 보며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증오스럽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네 손은 혐오스럽다.

?

나는 이렇게나 네가 싫은데. 너를 아끼던 마음과 사랑하던 마음은 이미 추억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인데.

?

그런데 나는 왜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해 주던 네 목소리가 한 번 더 듣고 싶은 걸까. 왜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굳게 잡고 있던 너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걸까.

?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다시 노아를 찾아갔다. 신전은 그에게 음식과 물을 조금도 주지 않는 듯했다.

?

어리석게도 나는 그를 위해 품에 물통을 숨겨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노아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다급하게 물을 삼켰다.

“나는 알 것 같아.”

“뭘.”

“어제 그렇게 다급하게 도망쳤으면서 누나가 다시 나를 찾아온 이유.”

?

나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나한테서 필요한 게 있는 거잖아. 누나가 필요로 하는 게 정확히 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누나. 내가 계속 말하고 있잖아. 부디 날 한 번만 사랑해 줘. 그럼 난 누나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테니까. 신발을 핥으라고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할 거고 누나 대신 죽으라고 해도 기쁘게 죽을게.”

?

이미 나 대신 죽으려는 작정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거잖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아를 쳐다봤다.

?

노아는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손을 휘저으며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정정했다.

?

“아니, 아니다. 생각해 봤는데 역시 한 번만 사랑받는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

“……그럼?”

“한번 사랑받으면 더 욕심이 날 테니까. 매일이 지날수록 하루만 더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할 게 분명해서.”

?

진부하지만 노아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무릎에 바닥이랑 이어지는 자석이라도 붙어 있나. 왜 이렇게 무릎을 자주 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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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제발.”

“짜증 나니까 자꾸 무릎 꿇지 마. 네가 반성하는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내가 이렇게 애원할게, 제발…….”

?

그리고 노아는 작게 웃었다. 자신이 애원한 바에 대해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이.

?

“누나도 전에 부정하지 않았잖아. 누나는 나를 싫어하는 동시에 좋아한다고. 나만 보면 어렸을 때의 그 불쌍한 꼬마가 생각나는 거지?”

?

정확한 답이었다. 이전에 꿨던 꿈에서도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노아에게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그를 위로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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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순간의 욕심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누나가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까? 계속 좋아하는 감정만 남아 있었을까?”

“아마 그렇겠지.”

“아아, 진짜…….”

?

멍청했구나, 노아. 노아는 스스로 자조하며 바닥에 천천히 쓰러졌다.

?

너는 지금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테오필처럼 죽는 순간까지도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당당할까. 아마 노아의 경우는 전자인 것 같았다.

?

“그래서 내가 항상 말했잖아. 너랑 맞는 다른 여자를 찾으라고.”

“지금 사랑해 달라고 빌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해.”

?

그러다가 문득 노아가 왜 홀로 이곳까지 왔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데려왔었다면, 그가 감옥에 갇힌 사실을 암흑가에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

나는 이것을 그대로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암흑가를 이용해 신전을 몰아붙이고 탈출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노아는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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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이나 신전은 피해 입는 걸 싫어하니까 암흑가를 쉽게 못 건드는 것뿐이지, 싸워서 이기지 못할 정도로 범죄자들의 힘이 절대적인 건 아니야. 오히려 그것들이 신전에 쳐들어와 봤자 개죽음만 당할걸.”

“네가 그런 이유로 싸워 보지도 않고 죽음을 택하는 거야? 암흑가의 주인인 주제에 네가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고 범죄자들의 안위를 생각해?”

“아니. 당연히 아니지. 그 개미들 목숨이 나한테 뭐가 중요하다고.”

?

그가 범죄자들을 개미라고 부르는 꼴이 웃겼다. 자기 자신도 범죄자인 주제에 도대체 누가 누구를 무시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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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명확한 답을 말해 주지 않고 오히려 내게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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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이 전부 여기로 몰려오면 누가 제일 먼저 이상함을 느낄 것 같아?”

“황실?”

“아니. 황실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하나 있는데, 한번 맞춰 봐. 누나도 아는 사람이니까.”

설마…….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알베르트……?”

“모니카 공작.”

?

우리는 거의 동시에 한 인물을 언급했다. 노아가 한 말에 따라 유추해 보면, 알베르트는 여전히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개미들의 헛된 개죽음부터 모니카 공작이 다시 누나를 데려가는 것까지. 신전과 싸워 봤자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

“그 뱀처럼 재수 없는 새끼가 누나 옆에 붙어 있을 때 얼마나 짜증 났는지 알아?”

“알베르트가 또 나를 찾고 있구나…….”

?

물론 그가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알베르트와 헤어졌던 이유는 그가 내게 질렸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코르넬을 속이고 도망쳤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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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도 지금 당장 누나의 위치를 아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썩 나쁘지는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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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창살 사이로 그의 두 다리가 삐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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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공작이 나한테 감시를 붙여 놨을지도 모르거든. 아직 수상한 기색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있는데 네가 찾지 못한 거면 어쩌려고.”

“글쎄. 만약 내가 못 찾은 감시자라도 있으면 큰일인데. 물론 가능성은 적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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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의미 없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와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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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가려고? 가지 마, 누나. 더 있어. 응?”

?

노아가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이곳에 더 있으면 성기사의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손을 외면하고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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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감옥에서 나가던 중 지나가던 어느 성기사와 마주쳤는데, 그는 품 안에 상자 같은 각진 것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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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십니까.”

?

내 시선이 품속의 상자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성기사는 얼른 쓸데없는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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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놈이 가지고 있던 단검입니다.”

“……아.”

“자세히 조사해 보니 몽마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봉인실에 넣어 두라는 명령을 받고 가던 길입니다.”

몽마의 힘이 깃들어 있는 단검이라고? 그러고 보니 살로스는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알 수 없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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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한테 질린 걸까.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던 주제에 상황이 이렇게 되니 떠나 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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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금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존재였는데. 하지만 살로스가 나를 떠난 것에 상처받기에는 머리가 복잡했다. 하나하나 전부 신경 쓴다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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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하 감옥에서 놈을 만나고 오신 모양입니다.”

“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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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투를 보아하니, 그는 내가 지하 감옥에 자주 들락거려도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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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님께서 저런 놈 때문에 돌아가셨으니, 아가씨께서도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렇게 아가씨께 잘해 드렸는데…….”

“…….”

“신전의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습니다. 놈의 사형 문제를 두고 신전이 시끄럽습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상심이 크겠다고? 테오필이 나에게 잘해 줬다고? 성심껏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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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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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방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네.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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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은 테오필이 관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시설이 좋고 깔끔했다. 내가 지하 감옥에 있는 사이 누군가 방을 치워 준 모양인지, 이불이 각에 맞춰 정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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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만난 성기사는 신전이 노아의 사형 문제를 두고 시끄럽다고 말했다. 노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노아가 밉기는 해도 죽는 걸 원한 적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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끙.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를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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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행동을 멈추고 문을 쳐다봤다.

?

“저, 아가씨. 아가씨를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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