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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38화 (3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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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억울하기는 했다. 나는 아무것도 이룰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렇다고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당신이 변화하지 못하는 건 제가 당신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니.”

    ??

    ?나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은 거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말았다.

    ?

    ??“절망을 배우세요, 로즈. 비록 작은 절망으로 시작하더라도 언젠가 그건 당신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만큼 거대해질 테니.”

    ??“절망은 이미 질릴 만큼 경험해 봤어요.”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당신은 절망을 겪고도 아직 무너지지 않았잖습니까.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완전한 절망이 아니에요.”

    ??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려 구겨진 꽃다발을 쳐다봤다. 꽃다발 안에서 함께 뭉개졌던 백합은 비록 꽃잎 여기저기가 찢어지기는 했으나 아름다운 향을 잃지 않았다.

    ?

    ?코를 찌르는 진한 향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꽃다발을 버리지도 않았다. 나는 꽃이 시들어 버릴 때까지 계속 침대 옆에 그 백합을 올려놓았다.

    ?

    ***

    ?

    ?어느 날 테오필은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신이 난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로즈. 제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왔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해 봤자 그의 주관적인 평가일 뿐일 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당신의 고향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기도 할 텐데 듣지 않으시겠다니. 유감이군요, 로즈.”

    ??

    ?고향에 대한 소식이라고?

    ?

    ??“아니, 이제는 로즈가 아니라 스텔라라고 불러야 할까요.”

    ??“…….”

    ??“트리센 마을을 조사하며 함께 알게 됐습니다. 당신이 머무르던 마을이잖습니까, 트리센 마을은.”

    ?로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불쾌했으나 내 진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것보다 배는 더 불쾌했다.

    ?

    ??“트리센 마을에는 당신이 모니카 공작과 연인이 되어 떠났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문을 지니고 국경 지대에는 무슨 일로 계셨습니까? 그것도 몽마와 함께.”

    ??“개인적인 일일 뿐이에요.”

    ??“제게도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겁니까?”

    ??

    ?나는 테오필이 언제나처럼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국경 지대로 가게 됐는지 알아내면 그것을 이용해 또 나를 짓누르기 위함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하지만 테오필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마치 당연히 내가 그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

    ??“도대체 내가 왜요?”

    ??“네?”

    ??“지금도 당신만 보면 발목을 부러뜨려 주고 싶어요. 그 짜증 나는 얼굴을 마주하면 뺨을 갈기고 싶고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다고요. 내가 몇 달이 지나도록 당신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데 그런 걸 기대해요?”

    ??

    ?나는 마음속에 담겨 있던 말을 전부 내뱉은 후 후회했다.

    ?

    ?테오필은 결코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아마 그는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물론 내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테오필의 발목을 부러뜨려 버리고 싶다는 것도, 뺨을 갈기고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다는 것도 전부 다.

    ?

    ?그가 내게 저지른 모든 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

    ?하지만 때때로 진실이라도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테오필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 버렸다.

    ?

    ?그리고 그는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

    ?이렇게 하면 전부 테오필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테오필이 돌아왔을 때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살려 달라고, 고개를 푹 숙이고 빌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비참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리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

    ?이틀 동안 나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손을 움직일 힘이 없었고 목이 따가웠다.

    ?

    ?그제야 테오필은 자비롭게 웃으며 내게 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나는 허겁지겁 그 물을 마셨다.

    ?

    ?나는 드디어 확신했다. 테오필은 자신이 내게 질리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내가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

    ?그가 원하는 대로 모두 포기한 척, 무너진 척 연기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테오필이 원하는 ‘무너짐’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몰랐다. 나는 일단 이 방법을 최후의 수단으로 미뤘다.

    ?다시 돌아온 테오필은 나를 스텔라라고 부르며 트리센 마을과 수도원의 소식을 내게 들려줬다. 그는 이미 나와 친하던 이들의 정보까지 수집한 뒤였다.

    ?

    ??“애니카라.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들었습니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최근에 큰 상단에 들어가 활약하고 있다더군요. 상단주의 최측근까지 올라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애니카는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몇 달 사이에 수도원을 나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

    ?상단주의 최측근이 되어 늠름하게 서 있는 애니카의 모습이라니. 상상만 해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뤘지. 주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느라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지?

    ?

    ?갑자기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

    ?그 후로도 나는 대충 테오필의 말을 경청하는 척하며 규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필은 내 이런 행동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계속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테오필이 마지막 이름을 불렀다.

    ?

    ??“노아. 당신이 가장 아끼던 동생의 이름이라던데, 사실입니까?”

    ??“…….”

    ??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살짝 벌렸다.

    ?

    ??“사실이죠. 아끼던 동생이었으니까.”

    ??“당신이 아끼던 동생이라면 순수하고 티 한 점 없는 아이였겠군요.”

    ??“…….”

    ??“아마 이 부분이 소식 중 가장 흥미로운 내용이겠군요.”

    ??

    ?테오필은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는지, 감은 눈을 쉽게 뜨지 않았다.

    ?

    ??“그렇게 순수하고 깨끗하던 아이가 암흑가의 주인이 됐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

    ??“……네?”

    ??“모니카 공작의 기사가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는 건가 봤더니, 그 대상이 당신이 아끼던 동생이자 암흑가를 관리하던 범죄자였더군요.”

    ??

    ?암흑가의 주인.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반 미리엄었지, 결코 노아의 이름이 아니었다.

    ?

    ??“뻔뻔하게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전대의 이름을 빌려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습니다.”

    ??“…….”

    ??“어떻습니까, 스텔라. 당신이 아끼던 동생이 정말 이 흉악한 범죄자 맞습니까?”

    ??

    ?그가 암흑가의 주인일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

    ?내가 그를 알지 못한 사이에 그가 좋지 않은 쪽으로 삐뚤어졌다는 건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그렇게 지나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노아가, 암흑가의 주인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테오필이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준 이유를 유추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전에 확신했듯이, 그는 내가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

    ??“당신은 내가 무너지기를 원하고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죠. 저는 당신이 제게 애원하는 걸 보고 싶으니까.”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야.”

    ??“제가 어떻게 하면 애타게 울며 애원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아끼는 친구나 동생을 죽이기라도 해야, 그래야 애원하시겠습니까?”

    ??“……거짓말. 당신은 성기사잖아.”

    ??

    ?떨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자신의 인생을 찾아 애니카는 행복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또한 지금은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노아조차도 결국은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감히 그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해?

    ?

    ??“거짓말 같습니까?”

    ??

    ?아니. 테오필이라면 애니카와 노아를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

    ??“그러지 말아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스텔라.”

    ??“그러지, 말아요……. 그냥 내가 애원할 테니까, 당신이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아도 그냥 내가 애원할 테니까 제발 그러지 마요.”

    ??

    ?테오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역시 전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전에 말했듯이 과하게 멍청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아서.”

    ??

    ?테오필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내 뺨에 닿았다.

    ?

    ?원래대로라면 나는 그에게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애니카와 노아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이상, 더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됐다.

    ?

    ?나는 전부 순응하고 포기한 듯 순한 양처럼 테오필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

    ?내 얼굴을 쓰다듬던 테오필의 손가락이 입에 들어와 입안을 마구 헤집었다.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올 때면 숨이 막히기도 했다.

    ?

    ?왈칵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테오필에게서 벗어나거나, 혹은 내가 먼저 그를 죽이기 전에는 울고 싶지 않았다.

    ?

    ***

    ?

    ?오랜만에 꿈속에서 살로스를 만났다. 약 세 달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

    ??“안녕, 수녀님…….”

    ?

    ?그는 힘없이 인사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살아 있었네.”

    ??

    ?노아의 오두막에 있을 때 봤던 살로스의 모습처럼, 지금 그의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지 않았다.

    ?

    ?가끔 테오필이 헤프게 보이기는 하지만 성기사 단장이기는 하구나. 한순간의 공격으로 살로스를 저렇게 만들다니.

    ?

    ??“너한테 이렇게 인사하려니까 뭔가 웃기기는 한데.”

    ??“…….”

    ??“잘 지냈어?”

    ??

    ?살로스와 안부 인사 따위를 나누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

    ??“아니, 절대. 잘 지냈을 리가 없잖아.”

    ??“그렇구나.”

    ??“수녀님은 그렇게 힘들었을 텐데, 나는…….”

    ??

    ?도움 한 번 못 주고……. 결국 살로스의 뺨을 따고 흐른 눈물이 검은 바닥 위에 떨어졌다.

    ?

    ?몽마가 우는 장면은 언제 보든 항상 어색했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몽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살로스는 참 희한한 존재였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몽마라니. 평생 살며 들어 본 적도 없었다.

    ?

    ??“넌 너무 감정적이야.”

    ??“내가 너무 감정적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잖아. 수녀님하고 관련된 일인데.”

    ??“…….”

    ??“내가 전에 말했잖아. 수녀님이 나한테 명령하면 뭐든지 다 하겠다고. 그 성기사를 죽이라고 나한테 명령해. 그 새끼가 밉지도 않아?”

    ??“내가 너한테 명령하면 죽일 수는 있고?”

    ??

    ?그건……. 살로스는 무언가를 외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살로스 그 자신도 테오필을 죽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테오필은 성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만큼 그는 가장 확실하게 신의 축복을 받았고, 가장 강력한 성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력에 특히 더 취약한 살로스가 테오필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 그를 방심시킨 후 죽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문제는, 테오필을 방심시킨다고 해도 그를 죽일 만큼 강력한 무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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