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로즈. 당신을 위해 재미있는 놀이를 준비해 봤는데, 당신은 어떠셨습니까? 저는 매우 즐거웠습니다.”
??
?그 손의 주인은 테오필이었다.
?
?그의 표정은 굉장히 오묘했는데,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말대로 즐거워 보였으나 어딘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내가 뒤로 도망친 만큼 테오필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내가 순순히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
?“로즈. 즐거우셨습니까?”
?“왜 화가 난 거예요?”
??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입을 조금이라도 잘못 놀리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그는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
?“오, 로즈. 설마 제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나는 화가 나지 않았어요. 그저,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울 뿐이에요.”
??
?테오필은 나를 들어 올려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도록 했다. 그는 복도를 따라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
?“이제 당신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만 봐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허언이 심하시네요.”
?“허언이라니요. 당신의 생각을 제가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
?테오필이 살짝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소매로 이마를 문질렀다.
?“왜 이곳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이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
?짜증 나게도 정답이었다. 테오필이 의도한 상황인 걸 짐작하고도 방을 빠져나온 것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으니.
?
?“애초에 당신을 아무런 곳에나 둘 리가 없잖습니까, 로즈. 그렇지 않나요?”
?“…….”
??“이곳은 성기사 단장만을 위한 공간입니다. 오로지 저와 제가 허락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 는 공간.”
??
?즉, 도망쳐 봤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테오필이 내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
?분했다. 당연히 밖에 나가기만 하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 때문에.
?“그래도 꽤 애를 먹을 뻔했습니다.”
?“…….”
?“고양이가 몸에 방울을 매달고 있어서 다행이었죠.”
??
?그러고 보니 그녀를 안은 테오필이 걸을 때마다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하지만 아무리 몸을 뒤져 봐도 방울은 발견되지 않았었다.
?
?역시 그곳에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딱딱한 구체가 들어 있기라도 한 건지, 아랫배가 살짝 볼록했다.
?
?도망치던 내내 나를 불안하게 만든 그 방울은, 내 아랫배에 들어 있었다.
?
?“당신이라면 한 번쯤은 이상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내가 간절하게 뛸 때마다 아랫배에 들어 있는 방울이 내 위치를 알려 줬다. 테오필은 그 방울 소리를 듣고 금방 나를 금방 찾아온 것일 테다.
?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습니다. 당신이 도망칠 기회가 있어도 이곳에 남는 걸 선택하지 않을까, 라고.”
?“당신이 지금까지 내게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갇힌 시간 동안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 왔다. 테오필은 계속 언젠가 놓아 주겠다며 희망을 갖게 하고 곧 그 희망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
?“그동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한테 상처를 입혔잖아요. 상처들을 성력으로 치료한다고 해서 그 기억이, 그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서러웠다.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손으로 눈을 막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
?눈물은 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
??
?테오필은 아무 말도 없이 내가 우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 ?모르겠다. 묵묵히 나를 지켜보던 그는, 나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신전 기둥에 등을 기대게 했다.
?
?“로즈. 이렇게 제게 약한 모습만 보여 주면 어떡합니까.”
?“…….”
?“당신이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이 좋아요. 처음 만났을 때 당당하게 나에게 맞서던 그 태도가 무너지는 것이 좋아요.”
??
?그 말을 듣고 눈물을 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마 눈물로 범벅이 되었을 얼굴을 들어 테오필을 바라봤다.
?
?그는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즐겁게.
?
?그 모습이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나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새하얀 기둥이 뒤를 막고 있었다.
?
?“왜 더 이상 울지 않으십니까?”
?“흐, 으윽.”
??
?나는 억지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참았다. 결국 테오필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그는 그것을 재미로 삼는다는 것.
?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괴물이었다. 사람의 불행을 먹고 행복을 얻는 끔찍한 괴물.
?나는 신이 끔찍한 괴물에게 징벌을 내리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테오필의 말대로 신은 내가 아니라, 저 끔찍한 괴물을 더 사랑하고 아꼈다.
?
?언젠가 눈앞에 있는 괴물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나에게는 날카로운 무기가 있나? 그게 아니라면 테오필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나?
?
?둘 다 아니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과연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갑자기 밀려오는 절망감 탓에, 나는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
?테오필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다시 감옥을 닮은 그 방으로 데려갔다.
?
?테오필은 다시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두껍고 무거운 철문은 남아 있었다.
?
?“로즈. 나는 당신이 더욱 무기력해졌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전부 이뤄질 일은 없을걸요.”
??
?이를 악물고 테오필을 노려보며 따지자 테오필이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글쎄요. 앞으로 두고 보면 정답은 스스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다시 철문이 닫혔다. 탈출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
***
?
?테오필은 이전에 나에게 줬던 <에반 일대기>와 <엘도니아 여행기>를 다시 가져가지 않았다. 아마 읽으라는 의미로 두고 간 듯했다.
?
?온통 벽으로 가로막힌 방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질릴 때까지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
?다시 한 글자씩 곱씹으며 <필릭 일대기>와 <엘도니아 여행기>를 읽어 본 결과, 나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됐다.
?
?먼저 엘도니아는 사제이기는 했으나 성력이 강력하지 않아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
?두 번째. 하지만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엘도니아도 오스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
?세 번째. 엘도니아는 다음날 바로 마을을 떠난 이유가 오스틴에게 중독될까 봐, 하고 말했다.
?
?중독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는 한 문장을 계속해서 읽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
?강력한 성력을 지닌 성기사인 에반의 일대기를 기록한 <에반 일대기>에서는 중독에 관련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
?일반인에 가까운 엘도니아는 느낄 수 있고, 성력을 가진 성기사인 에반은 느낄 수 없는 무언가라.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책들로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오필에게 책을 더 부탁하고 싶지도 않았다.
?
?결국 나는 궁금증을 해소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책을 덮은 후 베개를 끌어안고 누웠다.
?
?“아.”
??
?목에 힘을 주고 소리를 내뱉자 잔뜩 갈라져 듣기 싫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에 잡힌 머리카락은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빗자루처럼 푸석푸석했다.
?나는 손을 쫙 펴고 눈앞에 가까이 가져왔다. 확실히 이전보다 조금 더 살이 빠진 것 같았다.
?
?콜록. 가끔 스스로 들어도 고통스럽게 들리는 기침을 하기도 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나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
?이곳에 갇힌 후 얻은 버릇 중 하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
?달칵. 문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
?그런 버릇을 얻었다고는 하나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이제 나는 테오필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도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
?테오필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후에야 나는 고개를 돌려 테오필을 쳐다봤다.
?
?테오필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었다.
?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보아 정원이나 길가에서 꺾은 꽃으로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테오필은 내 시선이 꽃다발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챘다.
?그는 기꺼이 꽃다발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
?꽃다발을 이루고 있는 꽃은 순결해 보이는 백합이었다. 나에게 로즈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을 생각하면 어색한 선물이었다.
?수도원이나 신전에서 백합이 사용되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
?“오늘은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이었습니다.”
??
?그래,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 수도원과 신전에서는 성녀 세티아는 백합을 닮았다는 기록을 발견한 이래로 백합으로 그녀의 탄생일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백합으로 만들어진 꽃다발 따위가 아니었다.
?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이요?”
??
?오늘이 성녀 세티아의 탄생 기념일이라는 것은 즉, 내가 이곳에 갇힌 지 적어도 세 달이 흘렀다는 뜻이었다.
?
?“……나한테 그걸 알려 주는 이유가 뭐예요?”
?“위대한 성녀 세티아의 탄생일은 누구나 기념함이 마땅하기 때문이죠.”
?“거짓말. 다른 목적이 있잖아요.”
??
?정답이었나 보다.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테오필은 곧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
?“나는 당신이 참 좋아요. 과하게 멍청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으니까. 적당하다는 건 항상 좋은 일입니다.”
?“무슨 의도였는지나 말해요.”
?“그저 작은 절망감을 심어 주려는 의도였을 뿐입니다. 요즘 당신은 무언가를 잊은 것 같아서요.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갇혀 있기만 해도 시간은 당신을 기다려 주지 않고 계속 흐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