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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36화 (3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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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카라빈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임무를 수행하러 가기 전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

    놀랍게도 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루디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가진 기운은 전 세계를 떠돌던 나도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

    아르엘 왕국에서 느껴지는 기운인가? 아니,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대 제국의 사람들이 지닌 기운이었나?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

    완전히 처음 느껴 보는 기운이었다. 본래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 소속된 자가 의도치 않게 이곳으로 옮겨진 것처럼 말이다.]

    ?

    내가 이 책을 읽는 사이 테오필은 다른 책의 페이지를 펼쳐 내게 내밀었다.

    ?

    이번 책의 제목은 <엘도니아 여행기>였다.

    ?

    [나는 어느 날 주점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

    ?

    외모가 이상했느냐고? 아니, 그는 달콤해 보이는 오렌지 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남자였다.

    ?

    하지만 그에게서는 다른 세상의 기운이 느껴졌다.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래. 맡아 본 적 없는 희한한 향이 난다고 해야 맞겠다.

    ?

    드넓은 바다와 같은 광활한 향, 그리고 꽃밭의 근본이 되는 달콤한 향. 그런 매력적인 향들이 한데 섞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

    그는 자신을 오스틴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술을 마신 후 관계를 가졌는데, 정말로 신기한 건 여기부터였다.

    ?

    오스틴과 관계를 맺고 입을 맞출 때마다 그 신비한 기운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연결된 부분을 타고 매혹적인 향이 흘러왔다.

    ?

    그 향에 중독될 것만 같아서, 나는 다음날 바로 그 마을을 떠났다.]

    ?

    ?“전부 사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제나 성기사들이 쓴 기록들입니다. 당신과 비슷한 경우인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

    아마 그런 것 같았다. 특히 <에반 일대기>의 내용을 보자마자 나는 확신했다.

    ?

    [다른 차원에 소속된 자가 의도치 않게 이곳으로 옮겨진 것처럼 말이다.]

    ?

    다른 차원에 소속된 자. 이 구절이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

    ?“특히 전 <엘도니아 여행기>의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

    테오필은 내 손에서 책을 빼앗아 책의 한 구절을 따라 읽었다.

    ?

    ?“오스틴과 관계를 맺고 입을 맞출 때마다 그 신비한 기운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

    그리고 테오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

    아니, 설마. 아닐 거다, 아닐 거야.

    ?

    ?“흥미롭지 않습니까? 입을 맞추고 관계를 맺을 때마다 신비한 기운이 더 강렬해진다니.”

    ?“…….”

    ??

    테오필은 내 손을 잡고 그 위에 입술을 붙였다. 나는 그저 얼른 그에게 잡힌 손을 닦아 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그때, 손등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신음하며 손을 부르르 떨자, 테오필이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

    붉은 피가 그의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그의 턱을 타고 흐르는 피는 내 손등에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

    테오필은 고개를 살짝 숙여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가 말끔한 손을 내 손 위에 올리자 손등에 있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입을 맞추고 관계를 갖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건 성기사가 할 만한 일이 아닐 텐데요. 그러다가 신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성력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테오필을 비꼬기 위해 한 말이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짜증의 절반이라도 그가 느껴 보기를 바라면서.

    ?

    하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

    ?“성력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신의 축복이니까요.”

    ?“…….”

    ?“무지한 이들은 신께서 공평하시다고 믿고는 하죠. 아주 어리석지 않습니까. 세상의 밑바닥에서 태어난 이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

    그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

    ?“렌다께선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몇몇 인간들에게만 축복을 선물하셨습니다. 귀족들은 신께서 내리신 축복을 이용해 거짓 고귀함을 만들죠.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고귀함을 잃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테오필이 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으며 그가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었기 때문에.

    ?

    ?“성력 또한 신의 축복입니다.”

    ??

    그는 세상의 어두운 부분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밝게 미소 지었다.

    ?

    ?“그 어떤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렌다께서는 이 축복을 다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전 신의 축복을 받았으며 렌다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이니까요.”

    ?“유감이네요. 신께서 당신의 발목을 하나하나 부러뜨리시는 걸 보지 못하게 돼서.”

    ?“그것참 안타깝군요, 로즈.”

    ??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오필은 한 손으로 내 뺨을 쥐었다. 곧 입술을 통해 물컹거리는 더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

    ***

    ?

    ?“로즈.”

    ??

    갑자기 무게가 쏟아진 탓에 침대가 출렁였다. 침대의 출렁임이 멈췄을 때쯤 테오필이 멋대로 지어 줬던 이름이 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이불 안에 묻혀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테오필이었다.

    ?

    로즈라는 이름에 즉각 반응하는 걸 보니 이 거지 같은 생활에 익숙해진 모양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전에 온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테오필이 가져다주는 식사의 횟수를 통해 시간을 유추해 보려고 하기도 했지만 테오필은 이 수작을 눈치챘는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짧은 시간 동안 식사를 두 번이나 가져다주기도 했으나 어떤 날은 굶어 죽기 직전까지 식사를 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 쓰러진 나를 보며, 테오필은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쓰러진 내 입에 억지로 음식물을 쑤셔 넣었다.

    ?

    퍽퍽한 빵이 목에 걸려 컥컥대자 테오필은 잘 좀 삼켜 보라며 내 목을 졸랐다. 이후에 그는 목에 멍이 생긴 것을 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성력으로 치료했다.

    ?

    그뿐이겠는가. 그는 다른 세계의 그 신비한 기운이 궁금하다며 거칠게 입을 맞추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

    그때마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테오필의 물건이 아래에 들어올 때였다. 이처럼 남성의 성기가 징그러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

    어렸을 적, 그러니까 고아원에 있을 때 수도원의 목사님이나 수녀님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성기사의 멋진 모험을 기록한 동화를 읽어 주곤 했었다.

    ?

    동화에 등장하는 성기사들은 항상 정의로웠다. 악마와 마물들을 멋지게 물리치고 성력으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줬다.

    ?

    그때는 성기사의 그런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기사의 실체를 알게 되어 끔찍할 뿐이었다. 순결해야 할 성기사가 성을 탐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여전히 어색했다.

    테오필은 흥미가 떨어지면 나를 보내 주겠다고 말했었다.

    ?

    하지만 발목을 채운 족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방과 바깥을 분리하고 있는 무거운 철문 또한 그랬다.

    ?

    고난을 겪고 눈물을 흘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정말, 정말로 가끔씩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

    나는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흰옷의 소매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테오필이 본다면 눈물까지도 조롱하며 재밋거리로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

    그러나 어떻게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희망이 전혀,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알베르트나 살로스, 노아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새하얀 베개에 얼굴을 묻자 베개가 천천히 눈물로 젖어 들었다.

    ?

    ?“울고 계십니까?”

    ??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테오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는 것도 최근에 생긴 버릇이었다.

    ?

    ?“도대체 언제…….”

    ?“제가 없을 때만 우는 것 같아 최대한 조용히 들어왔습니다.”

    ?“…….”

    ?“섭섭하군요. 이렇게 예쁜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다니.”

    ??

    테오필은 내게 깊게 입 맞춘 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놓아 줬다. 나는 콜록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

    ?“도망치고 싶습니까?”

    ??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긍정의 답을 하면 어떤 폭력이 되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

    ?“사실대로 마음에 담긴 답을 말해 보십시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

    여전히 그를 믿을 수 없었지만 나는 또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로 테오필은 아무런 폭력도 휘두르지 않았다. 목을 조르지도 않았고 입술을 물어뜯지도 않았다.

    ?

    그제야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나에 대한 테오필의 흥미가 식어 버린 모양이라고. 이제야 나에게 질린 것이라고.

    ?“로즈. 당신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

    하지만 테오필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는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

    그리고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지난 후. 나는 잠에서 깨어나 발목을 채우고 있는 족쇄를 바라봤다.

    ?

    그런데 발목을 채우고 있어야 할 족쇄가 보이지 않았다.

    ?

    ?“헉……?”

    ??

    너무 당황해서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한참 동안 발목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철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

    과연 이건 테오필이 의도한 상황일까, 아니면 그의 실수일까.

    ?

    그가 의도한 것이든 실수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점이었다.

    ?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시 휘청거렸지만 곧 똑바로 설 수 있었다.

    ?

    아랫배에 무언가 차갑고 딱딱한 것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탈출이었으니까. 다른 건 전부 탈출한 다음에 생각하자.

    ?

    그리고 나는 달렸다. 숨이 차올라도 뒤를 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그러나 왜인지 신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제 한 명쯤은 보일 법도 한데…….

    ?

    이상함을 느낀 것은 내가 다리를 뻗으며 뛸 때마다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

    처음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방울 소리의 주인이 테오필이 아닌가 싶어 겁을 먹었다. 하지만 방울 소리는 내 움직임에 따라 달라졌다.

    ?

    설마 몸 어딘가에 방울이 달려 있는 걸까. 온몸을 구석구석 살폈지만 방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설마……. 불길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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