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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자 국경 지대를 가득 메우고 있던 마물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가끔 나가 마물들을 죽이며 놀던 살로스는 성기사들이 도착한 후로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취미 생활을 뺏긴 기분이야.”
??
살로스가 창문을 통해 성기사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대해 그딴 게 취미 생활이냐고 반박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상대의 취향에 간섭하는 것은 괜한 짓이었다.
?
성기사들이 국경 지대에 온 지 얼마나 지났더라.
?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성기사들은 훨씬 오래 국경 지대에 머물렀다. 이 정도면 일반 기사단이 왔다고 해도 마물들을 다 처리했을 시간인데.
살로스는 매일 아침 성기사들을 노려보다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으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바닥이나 낡은 침대 위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잡아먹겠다는 말과 달리 살로스는 얌전했다. 이전에 상처를 핥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짓도 하지 않았다.
?
다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그가 어째서 아직도 새로운 정착지를 찾지 못했는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여기저기에 성기사들이 깔렸거든. 어딜 가도 저놈들뿐이야. 완전 짜증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신전에 틀어박혀 웬만하면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 바로 저것들인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살로스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지 못하는 이유가 성기사들이 제국 여기저기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성기사란 성녀의 탄생일 정도로 큰 행사가 있지 않은 이상 신전 안에서 나오지 않고 수련을 하는 직업이었다.
국경 지대에 서식하는 마물의 수가 급증하기라도 했나? 아니, 아마 그건 아닐 테다.
?
마물에 관한 일은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였다. 만약 마물의 수가 급증했다면 전국에 그 소식이 퍼졌을 테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
?“수녀님. 무슨 생각해?”
??
갑자기 살로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뒤로 조금 물러나려고 했으나 이미 등을 벽에 맞대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손으로 살로스의 가슴을 밀어 그를 뒤로 밀어냈다.
?
그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으나 동시에 내 손을 잡고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꼈다.
?
?“수녀님한테는 신기한 향이 나.”
“……향?”
?“응. 수천 년 동안 살면서도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향이.”
손목 안쪽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진다. 살로스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어. 도대체 수녀님은 뭐야?”
“…….”
?“애초에 수녀님을 발견한 것도 이 이상한 향 때문이거든. 향이란 건 절대 유일무이할 수가 없는 건데.”
?
살로스가 천천히 얼굴을 기울이자 살로스의 코끝과 내 코끝이 톡, 닿았다. 눈앞,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가까운 곳에서 살로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녀님은 어디에서 온 거야?”
?“……먼 곳. 엄청 먼 곳에서.”
차마 이 세상은 사실 소설 속이고 나는 이 소설의 바깥에서 왔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살로스의 성격이라면 분명 ‘수녀님, 생각보다 창의적인 몽상가였네’ 따위의 말을 하며 놀릴 게 뻔했다.
?
?“대답이 재미가 없어.”
?“무슨 대답을 원했길래.”
?“글쎄.”
??
대답이 끝나자 손목에 닿아 있던 살로스의 입술이 점점 팔을 타고 올라왔다. 조금 전에 비해 거칠어진 숨결이 귓가에서 들려왔다.
?
?“삼켜 버리겠다더니, 그게 지금이야?”
?“미안. 그 꼬마 때문에 속상할까 봐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
?“뭐, 네가 언제부터 내 기분을 신경 썼다고.”
??
눈앞에 있는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
괴로운 것 같기도 하고, 서글픈 것 같기도 한 그런 복잡한 얼굴.
?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거야 네가 더 알겠지.”
??
살로스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미간을 꾹꾹 눌러 보기도 했다. 살짝 구겨진 눈가도 천천히 쓸어내렸다.
?
그리고 그는 벽에 붙어 있는 깨진 거울 조각에 얼굴을 비췄다. 미끈한 그의 얼굴이 거울에 반사되어 돌아왔다.
?“수녀님 표정이랑 비슷한 것 같아.”
?“내 표정이랑, 비슷하다고.”
“지금 슬픈 건가? 내가 슬프다고?”
?
아니, 그보다 지금 내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나?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살로스처럼 거울을 통해 내 표정을 살폈다.
?
입꼬리는 살짝 내려가 있었다. 낯빛이 조금 창백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다른 것이 없었다.
?
?“슬픈 표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니야. 수녀님은 슬플 때 그런 표정을 지어. 내가 알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수녀님이 아끼는 그 꼬맹이랑 헤어질 때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거든.”
??
아. 살로스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나는 깨진 거울을 느릿하게 손으로 쓸었다. 내가 노아를 버리고 살로스를 따라갈 때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
손가락의 연한 살점은 결국 거울의 뾰족한 파편을 이겨 내지 못하고 팍, 하고 터지고 말았다. 붉은 피가 손가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
?“수녀님, 피 나잖아.”
??
그것을 발견한 살로스가 다급하게 내 손을 거울에서 떼 냈다. 피는 멎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몽글몽글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살로스는 이전처럼 혀를 내어 조심스럽게 상처를 핥았다. 따끔한 감각도 잠시일 뿐이었다. 깊게 베였던 손가락은 금방 아물었다.
?
하지만 살로스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핥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핥다가 손바닥을 핥았고, 손바닥을 핥으며 점점 위로 올라왔다.
?
목에서 일시적인 고통이 느껴졌다. 살로스는 내 목을 살짝 깨물어 그 위에 자국을 만들었다. 몽마인 주제에, 사람의 것을 닮은 잇자국을 만들었다.
?
?“흐으…….”
??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로스는 나를 쳐다보며 조금 전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결국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
살로스는 나를 따라 몸을 낮추며 계속 목에 입을 맞췄다. 나는 나른하게 움직이는 살로스의 얼굴, 그러니까 두 뺨을 양손으로 쥐었다.
?
?“너 왜 자꾸 그런 표정 지어?”
?“수녀님이 짓고 있는 표정?”
고개를 끄덕이자 살로스가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렸다.
?
?“나도 왜인지는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모르겠는데?”
?“수녀님이 나 미워하니까 슬픈가 봐.”
?“네가 지금까지 한 행동에 그 이유가 있다는 건 생각을 안 하는구나.”
?“미안해.”
내가 수년간 겪은 일들이 겨우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해결될 만큼 가벼운 일이었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살로스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안아 들었다.
?
다시 손을 짚을 수 있는 바닥이 생겼을 때 나는 침대 위였다. 살로스는 내 셔츠를 잠그고 있는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
그때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크기의 물방울이 손등에 떨어져 자국을 만들어 냈다.
?
?“……너 울어?”
??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몽마가 눈물을 흘린다니. 수도원의 도서관에 잔뜩 보관된 두꺼운 책들에서도, 전설이나 기록에서도 읽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
?“미안해, 미안해.”
?“……이게 지금 무슨.”
?“내가 잘못했어…….”
지금까지 수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도대체 왜?
?
?“좋아해 달라고 안 할게. 미워하지만 말아 줘…….”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수녀님 눈동자가…….”
??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리던 살로스가 돌연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어두운 자색 눈동자가 물기가 차올랐다.
?
?“전에는 예쁘게 빛났는데, 이제 빛나지가 않아. 수녀님이 멀리 가 버릴 것 같아서그래. 그래서 걱정이 돼서…….”
?“…….”
?“지금 수녀님 눈이 너무 슬퍼 보여. 지금까지 이렇게 슬퍼한 적 없잖아. 그 동생이라는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걔가 그렇게 소중해?”
?“……아.”
?“나는 왜 수녀님이 그렇게 슬퍼하는 건지 모르겠어. 수녀님 눈동자만 보면 금방이라도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잡을 수 없는 곳이라고? 내가 죽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당사자는 그럴 생각도 없는데 오히려 네가 망상을 펼치는 중이라고.
?
?“……난 죽을 생각 없어.”
??
이 말에 대해 살로스가 무어라고 의견을 덧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로스는 입술을 꾹 깨물며 나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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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지 않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고 버텨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침대 위에 내가 쓰러지고, 그 위에 살로스가 쓰러지듯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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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스의 무게를 버텨야 하니 숨이 찰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살로스의 몸은 나와 닿아 있지 않았다. 나를 배려하는 건지, 그는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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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스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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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그대로 떠 있는 손이 뻘쭘해 그냥 살로스의 등 위에 손을 얹었다. 이렇게 하니 그를 안고 있는 것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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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살로스가 울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살로스의 눈물 때문에 어깨가 축축해졌으니.
?
?“좋아해, 수녀님. 좋아해…….”
?“…….”
?“가지 마. 떠나지 마. 내 옆에 있어 줘. 수녀님이 아끼는 그 꼬맹이한테도 가지 말고 내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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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창문 너머로 봤던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성기사가 떠올랐다.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몸을 잘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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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그 사람이 가 버렸으면 좋겠다. 혹은 살로스와 내가 먼저 이곳을 떠나거나.
?
?“……너야말로.”
살로스의 등 위에 얹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