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30화 (30/100)

-30-

“서신을 몇 통이나 보냈는데 이제서야 답하다니.”

알베르트는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놈은 더럽게 비싼 몸이신가 보군.”

“…….”

아마 이 자리에 알베르트와 함께 있는 것이 코르넬이 아니라 집사였다면 제발 체통을 지켜 달라며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물론 알베르트는 집사가 잔소리를 하든 말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어느 날 아침, 코르넬이 가지고 온 것은 암흑가의 주인이 모니카 공작저를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늙은이가 오면 응접실로 안내해.”

“예, 알겠습니다.”

반 미리엄. 교활한 여우 같은 늙은이라고 들었다. 그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진짜로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알베르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농도가 높은 위스키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헤집는 듯했다.

스텔라가 암흑가로 들어갔다는 증언. 그놈의 증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의존해 스텔라를 찾아 헤맨 경험은 셀 수도 없이 해 봤다.

또다시 그 증언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이런 고생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알베르트는 턱을 괴고 앞을 응시했다.

추악하고 오염된 인생 살며 얻은 유일한 유희라서 그런 걸까. 그는 답지 않게 장난스러운 소년처럼 미소 지었다.

덜컹덜컹. 꽤 작은 소리였음에도 알베르트의 귀에는 마차가 공작저로 들어오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 더러운 범죄자의 얼굴이나 보러 가 볼까.”

과연 범죄자들의 주인이라는 그 늙은이가 얼마나 교활한지 말이야. 알베르트는 1층에 위치한 응접실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계단에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세상이 비틀렸다. 아마 위스키를 마구 입에 들이부은 탓이리라. 알베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응접실 앞에 서 있는 코르넬을 쳐다봤다.

코르넬이 지키고 있는 저 응접실 안에는 대단하신 범죄자가 앉아 있을 것이다. 알베르트가 응접실 앞에 서자 코르넬이 대신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색의 망토를 둘러쓰고 수수한 흰색 가면을 쓴 남자가 보였다.

알베르트는 남자가 먼저 그에게 인사를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제국의 공작이 한낱 범죄자에게 먼저 인사할 수는 없으니.

?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전하. 반 미리엄입니다.”

“노인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젊군.”

“…….”

“실내인데 그 가면은 좀 벗지그래.”

눈까지 전부 가리고 있는 가면은 어쩐지 꺼림칙했다. 애초에 암흑가의 주인은 노인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저렇게 젊은 목소리라니.

?

알베르트는 응접실의 중앙에 위치한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의 대각선에는 반 미리엄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

가면을 벗으라는 말에도 반 미리엄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허. 알베르트는 짜증이 섞인 비웃음을 내뱉었다.

알베르트는 손을 뻗어 가면의 끝부분을 쥐었다. 그가 손을 당긴다면 반 미리엄의 가면은 바로 어딘가로 날아가고 이 범죄자의 얼굴은 전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은 곧 반 미리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노인의 손 치고는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감히 자신의 옷을 구긴 그 손을 노려봤다.

“무례하군. 감히 범죄자 따위가.”

“제가 아무리 무례하다고 한들 첫 만남에 상대의 가면을 벗기려고 하신 전하보다 무례하겠습니까.”

나지막한 미성은 왜인지 익숙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처럼.

?

과연 가면 속에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지 궁금했다. 당장이라도 저 가면을 벗기고 놈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

마침 알베르트의 뒤에는 코르넬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악당처럼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코르넬에게 명령했다.

“코르넬. 이 무례한 범죄자의 가면을 벗겨라.”

과연 공작의 개라고 불리는 기사 답다고 해야 할까. 코르넬은 즉시 소파를 뛰어넘어 반 미리엄에게 달려들었다. 반 미리엄이 재빨리 알베르트의 손을 놓고 제 얼굴을 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

명령을 수행한 후 알베르트의 뒤로 돌아온 코르넬의 손에는 백색의 가면이 들려 있었다. 알베르트는 턱을 들어 올리며 반 미리엄의 얼굴을 응시했다.

?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니. 네놈이었구나.”

“…….”

“마법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외모와 목소리도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어디, 한번 들어볼까. 무엇이 너를 그렇게 다급하게 만들었는지.”

거만한 말을 뱉는 백발을 가진 공작은 천사 같다기보다는 뱀의 탈을 쓴 악마 같았다. 푸른 눈동자의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공작을 노려봤다.

곧 노아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것 또한 거짓이며 가면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시고도 제가 공작 전하의 물음에 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당장 목이 잘리고 싶나?”

“제국의 모든 범죄자들로부터 살아남으실 자신 있으십니까?”

?

알베르트는 지긋이 노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거만한 것이, 마치 귀족의 표본 같았다. 노아는 그 오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꼬맹이가 배짱 하나는 좋구나.”

“…….”

“예전부터 그 배짱이 마음에 안 들었어.”

알베르트는 당장이라도 손짓 한 번으로 거만한 범죄자의 목을 자를 수 있었다. 하지만 노아가 죽어 버린다면 스텔라의 행방을 쫓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터.

“스텔라가 암흑가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증언이 있었다.”

?

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증언자의 혀를 잘라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

“아무래도 그 대상이 네가 될지도 모르겠군.”

?

코르넬. 알베르트가 코르넬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코르넬은 노아의 머리를 잡고 눌러 그를 무릎 꿇렸다.

?

그에 노아가 얼굴을 구기며 몸을 비틀었으나 수 년 동안 훈련받은 기사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무릎 꿇은 노아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알베르트가 표정을 완전히 굳힌 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해. 스텔라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그렇지 않으면 네 혀를 잘라 버릴 테니.”

“제 도움이 필요해서 절 부르신 것 아니었습니까? 제가 없으시면 누나의 행방을 영영 모르실 텐데 말입니다.”

그는 ‘누나’라는 말을 특히 강조하며 말했다. 그녀와의 친근함을 드러내기 위한 표시인 걸까. 꼴에 도발이라도 해 보려고?

그래 봤자 아직 소년의 티가 나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겨우 저 정도로 암흑가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꼬맹아, 하나만 묻자.”

알베르트는 한 손으로 노아의 뺨을 세게 쥐었다. 노아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머리카락을 뽑아 버릴 듯 잡아당기는 손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이렇게 멍청하게 행동하는 건 과연 네가 순진해서일까, 아니면.”

“…….”

“스텔라가 새처럼 멀리 도망가 버린 탓에 불안해서일까.”

당연히 후자가 정답이었다. 애초에 알베르트 또한 그것을 예상하고 질문한 것이었으니.

“반응을 보아하니 후자인 것 같군.”

만약 그가 스텔라를 데리고 있었다면 알베르트의 초대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제 발로 알베르트를 찾아왔다는 것은 곧 노아 또한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미 스텔라가 노아를 떠났다면 그는 스텔라를 찾는 데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눈먼 암흑가의 주인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알베르트는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려 웃으며 생각했다.

“반 미리엄. 아니, 노아.”

자신의 진짜 이름이 들려오자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알베르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스텔라를 찾아와라.”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으나 그 한마디 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가 힘들게 누나를 찾아 전하께 데려오는 멍청한 짓을 저지를 것 같습니까?”

“암흑가가 지도에서 사라져도 좋다면 그렇게 해도 좋고.”

“황실도 쉽사리 건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암흑가인데, 무슨 자신감이십니까?”

노아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알베르트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미소가 자신감을 뜻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

결국 노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공작에게 상당히 무례한 태도였으나, 알베르트 또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가 보도록.”

?

코르넬은 그제야 강하게 잡고 있던 노아의 머리에서 손을 떼 냈다. 노아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면을 주워 다시 얼굴에 씌웠다.

그는 응접실에서 나가기 전 가면으로 가려져 눈빛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알베르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수도원의 정원에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

그곳은 나만의, 그리고 누나만을 위한 공간이니까. 노아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공작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공작저를 떠나는 모습은 코르넬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다. 괜히 공작의 개라고 불리는 자가 아니었다.

“코르넬. 그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으면 못생겨질 텐데 표정 좀 펴는 게 어때.”

장난이 섞인 말이었으나 코르넬은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것을 본 알베르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정말 저 범죄자를 믿으십니까?”

알베르트는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놈이 스텔라를 찾는다고 해도 내 앞에 스텔라를 데려올 리가 없지. 차라리 암흑가를 버릴 놈이야.”

“그럼 도대체 왜…….”

“마침 잘 말했군. 코르넬, 저놈을 감시해.”

?

코르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베르트를 쳐다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

“혹시라도 저놈이 나보다 먼저 스텔라를 찾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

노아를 감시함으로써 배의 효율을 얻겠다는 소리였다. 코르넬은 알베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로 무릎을 꿇은 뒤 조용히 노아의 뒤를 따랐다.

노아를 태운 어두운 색의 마차는 빠르게 달려 암흑가로 향했다. 코르넬은 자신이 스텔라를 놓쳤던 골목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또다시 그의 주인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코르넬은 허리에 꽂았던 검을 세게 쥐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