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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표정을 하고선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표정, 왜인지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아. 나는 이내 언제 노아의 그 표정을 봤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전에 알베르트와 함께 수도원에 방문했을 때. 기도실에서 그와 관계를 맺다가 문틈 사이로 노아를 발견했을 때 그의 표정이 딱 저랬다.
부엌에 있던 그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손에 있던 유리컵은 어느새 산산이 조각나 위협적인 흉기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살로스의 목에 날카로운 파편을 겨누며 물었다.
“누구지?”
“아,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공작이 보냈나?”
그에 살로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노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유리 파편을 툭, 바닥에 내려놓았다. 피로 범벅된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더욱 자잘하게 조각났다.
그는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전에 알베르트가 노아를 대할 때 했던 행동이었다. 귀족 특유의 거만한 습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그가 하고 있다니.
5년이라는 긴 세월이 너를 변화시킨 건지, 그게 아니면 네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노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빠르게 살로스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살로스는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머리카락을 내어 줬다.
?
“다시 한번 묻지.”
“아야, 이것부터 놓고 말하자. 응? 아프단 말이야.”
“공작이 보냈나?”
그는 살로스의 머리에 달린 어두운 색의 뿔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녀님, 얘 너무 무서워졌어. 어렸을 때는 좀 덜 사나웠던 것 같은데.”
?
이번에는 노아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살로스의 머리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누나. 아는 사람이야?”
“……글쎄. 애초에 사람이 아닌데.”
이에 노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살로스를 가리켰다가 톡톡 머리를 두드렸다.
그제야 노아는 살로스의 뿔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곳에는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 옳은 악마의 뿔이 달려 있었다. 노아의 얼굴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
“있잖아, 꼬마야.”
꼬마라니. 외형만으로는 노아와 살로스는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내가 수녀님을 데리고 가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이것 좀 놔 주라.”
“뭐?”
“다시 말해 줄까? 수녀님이 날 선택했다고. 네가 아니라, 나를.”
살로스의 표정은 어린아이에게 장난을 치는 못된 어른처럼 보였다. 과연 노아가 저 말에 넘어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는지, 살로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던 노아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
“……버릴 거야?”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목소리로 그가 내게 물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라고 하는 게 맞겠다.
“버리고 갈 거야? 엄마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응. 갈 거야.”
“가지 마, 누나. 가지 마…….”
이 울음 또한 거짓말일까. 이제는 무엇이 그의 진심인지 모르겠다.
?
이렇게 약한 척 울먹이다가 또다시 본심을 드러내고 나를 향해 비리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워서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
?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또 나한테 거짓말을 하네.”
감정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걸 보면, 너한테는 눈물을 흘리는 게 그렇게 쉽구나. 감정이라는 게 너한테는 진심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노아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또 거짓이었구나. 나는 도대체 너한테 뭐길래 너는 나를 대할 때마다 가면을 쓰고 거짓만을 말하는 걸까.
“나는 너를 구원해 줄 만큼 강하지도 않고 희생적인 사람도 아니야.”
“아니, 누나만이 날 구원해 줄 수 있어.”
두 손목을 압박하는 철쇄는 지나치게 걸리적거렸다. 서로 얽혀서 끊어지지 않는 각 사슬의 관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핏 보면 나를 올려다보는 노아의 눈동자는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그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면,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손에 머무르던 온기가 점차 사라졌다.
“구원자를 원하는 거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 봐. 적어도 나보다는 희생적이고 널 위해서 살아 줄 사람을 찾을 수 있겠지.”
“안 돼. 누나가 아니면 안 돼.”
노아가 무어라고 더 말했으나 나는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살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꼿꼿이 서 있었다.
“살로스.”
“응, 수녀님.”
“너를 선택할 테니까, 그러니까.”
?
부디 나를 삼켜 줘.
?
살로스가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의미인가. 나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며 생각했다.
“또 나를 두고 가지 마.”
“…….”
“이 끔찍한 어둠 속에 날 홀로 남겨 놓고 가지 마.”
또다시 노아가 나를 향해 애원했으나 내가 그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대신 나는 살로스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을 잡는 순간 간절하게 애원하던 노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이 콧등이 시큰했다.
?
너와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추억을 만들었으나 끝내 너를 미워하며 마지막을 그린다.
곧 시야가 흐려지며 시야에서 노아의 얼굴이 사라졌다.
?
***
여기가 어디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콜록.”
?
먼지 때문에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들자 손목을 연결하는 철쇄가 거친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창문부터 열까?”
?
살로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니 미약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낡아 여기저기가 부서진 을씨년스러운 집이었다.
?
“……여기가 어디야?”
“그냥 제국 안에서 인적이 제일 드문 곳으로 왔어. 어디 보자, 집 밖에 마물들이 우글우글하네.”
마물이라고?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
그러자 살로스가 생글 웃으며 손가락으로 창밖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방향에는, 어두운 색의 끈적이는 점액으로 뒤덮인 징그러운 생명체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으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려고 보니까 국경 지대밖에 없더라.”
?
국경 지대. 드넓은 사막과 제국이 이어지는 곳.
동시에, 수많은 마물들의 서식지라고 불리는 곳.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의 마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낡은 집들이 몇 채 더 있었다. 아마 마물들이 소환되기 전에 사람들이 거주하던 집일 것이다.
대책 하나 없는 멍청한 몽마 같으니라고. 나는 얼굴은 잔뜩 일그러트리며 살로스를 노려봤다. 그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결국 나는 한숨을 푹 내쉰 후 구석에 가 대충 주저앉았다.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 건 머리가 너무 복잡한 탓인가.
?
아니, 그것보다는 오히려 머리가 멍하니 텅 빈 탓이었다.
과연 내가 살로스의 손을 잡기 직전 노아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허공을 응시했다.
햇빛을 받고 은색으로 빛나는 먼지가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내 손은 먼지에 닿지 못하고 살로스에게 잡혔다.
“피곤해 보여, 수녀님.”
“너한테서 그런 정상적인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한숨이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잘게 몸을 들썩일 때마다 먼지가 피어올라 일렁였다.
“그냥 눈 좀 붙여.”
?
어쩐지 짜증이 난다. 살로스가 한 저 말이, 노아가 이전에 나를 구해 주는 척 연기를 할 때 했던 말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
살로스가 손으로 내 눈 위를 덮었다. 인간도 아닌 주제에 손에서는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무슨 마법이라도 사용한 건지,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꿈속으로 찾아갔다.
***
?
“모니카 공작가에서 또다시 서신이 왔습니다.”
“…….”
“저, 들어가겠습니다.”
스테판은 문고리를 돌리고 힘껏 문을 열었다. 암흑가의 주인을 위한 방답게 노아의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노아는 스테판에게 등을 보인 채로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스테판은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모니카 공작가에서 온 서신입니다.”
“…….”
“또 불태워 버릴까요?”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러라는 것인가 보다. 스테판이 몸을 돌려 화로에 편지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낮게 깔린 노아의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
“스테판.”
스테판의 손을 벗어나려던 편지는 겨우 재가 되는 것만은 피했다.
“그 편지, 이리 가져와라.”
등을 보인 채로 허공만을 바라보던 노아가 드디어 몸을 틀어 스테판을 바라봤다. 그는 노아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주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스테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히 편지를 건넸다. 노아는 굵은 눈물을 대충 소매로 닦아 낸 후 나이프로 편지의 봉인을 제거했다.
편지에는 특별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찾아오라는 내용뿐이었다.
하여간 귀족들이란 전부 이따위다. 거만하고 멍청한 족속들. 노아는 편지를 구길까 고민하다가 독수리가 새겨진 봉인을 뜯어 주머니에 넣었다.
?
“스테판.”
“예, 주인님.”
“마차를 준비시켜라. 모니카 공작저로 갈 것이니.”
?
봉인에 새겨진 독수리를 보니 독수리가 새겨진 보석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던 그날의 스텔라가 떠올랐다. 노아가 봉인을 세게 쥐자 봉인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공작이 반 미리엄의 정체를 알아차려 그에게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노아는 입을 꾹 닫고 손가락으로 나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사실 공작의 목적이 무엇일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보나 마나 반 미리엄, 즉 암흑가의 주인이 가진 힘을 빌려 스텔라를 찾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이래 봬도 공작은 암흑가의 주인보다도 스텔라를 먼저 찾은 자였다. 그런 자를 이용해서 그녀를 찾으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노아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