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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28화 (2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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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스텔라는 성년이 될 것이다.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수녀가 되어 수도원에 머무를지, 혹은 수도원을 떠날지.

“가지 마, 응? 안 가면 안 돼?”

노아는 스텔라의 허리에 매달려 간절하게 애원했다. 순진한 그녀는 얼떨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나도 우리 노아 쭉 보고 싶으니까.”

노아와 스텔라가 만난 지 8년이 됐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잠시 고민했으나 곧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으면서. 도대체 그놈의 추억이 뭐라고, 고작 8년의 세월이 뭐라고. 스텔라는 더 넓은 세상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남았다.

?

***

삭막하던 수도원의 정원이 어느 순간부터 화사하게 변한 일이 있었다. 칙칙한 색의 나무만이 존재하던 정원이, 화려한 붉은 장미로 가득 찬 것이었다.

물론 수도원의 성직자들이 이뤄 낸 일은 아니었다. 오직 신만을 섬기는 것이 삶의 목표인 이들이 그것 외에 무엇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장미를 심은 것은 노아였다. 그는 땅을 얕게 파 씨앗을 심고 정성으로 가꿨다. 한 송이로 시작됐던 장미의 정원은 수년 후 정원을 가득 채울 정도로 그 수가 많아졌다.

수수함을 추구하는 수도원 건물과 화려한 장미 정원이라니. 참으로 괴상한 조합이었다.

노아는 길에 피어 있는 자유로운 들꽃보다는 일정한 곳에 갇혀 있는 장미가 더 좋았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도 결국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정원 속의 장미가 참 좋았다. 그리고 정원의 장미를 볼 때는 스텔라의 보석 같은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장미를 봄으로써 스텔라를 보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이걸 다 노아 네가 심은 거라고? 진짜?”

다 누나를 위해서 심은 건데. 정작 본인은 정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누나, 옆에 앉아도 돼?”

별이 그의 옆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장미는 바람을 맞아 날아가지 않지만 들꽃은 바람에 의해 하늘로 올라갔다. 분명 스텔라를 닮아 예쁜 꽃이었으나 손에 잡을 수 없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들판에 자란 노란 꽃을 망설이지 않고 꺾었다. 그리고 그는 들꽃을 스텔라에게 선물했다. 도망치려던 들꽃은 그녀의 손에 붙잡혔다. 그 광경을 보는 심정은 꽤나 미묘했다.

노아는 스텔라를 닮은 들꽃은 사랑했으나 그것들이 도망치는 것까지 용서할 수는 없었다.

노아는 참 변덕이 심한 아이였다. 꽃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마구 분노하여 들꽃을 꺾다가도 자신이 스텔라를 닮은 꽃을 꺾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몸을 잘게 떨고는 했다. 차마 스텔라를 닮은 들꽃을 아무렇게나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들꽃은 스텔라에게 선물했다. 수수하기도 하며 화려한 모습이, 서로 퍽 잘 어울렸다.

그렇게 변덕스러운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꽃은 장미였다. 장미는 들꽃처럼 도망치지 않고 항상 그의 곁에 머물러 줬으니.

수도원에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장미의 정원. 그 정원이 노아가 스텔라를 제외하고 가장 아끼던 것이었다.

?

?***

추억이란 참 비겁하다. 나는 너를 미워하고 싶은데 추억이 내 판단을 방해한다. 네가 미운데 결코 너를 미워할 수가 없다.

황홀한 비극. 추억이라는 단어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

이제는 십수 년 전 죽어 가던 너를 구했던 것을 후회한다. 내가 증오해야 하는 대상은 너일까,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는 추악한 나 자신일까.

?

그렇게 알베르트를 거부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가 나를 찾아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 정도로 이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 속에 들어오기 전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악당을 꽤 좋아했던 것 같기도 했다. 비열하지만 퇴폐적이고 매력적이라고, 환호했었다.

“허.”

이제 와서 떠올리니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노아, 악당 같은 너를 보니 알겠다. 악당은 매력적이지 않다. 그저 추악할 뿐.

“누나.”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목에는 여전히 붉은 사슬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 이름 불러 줘.”

“…….”

“어렸을 때처럼 내 이름 불러 줘, 응?”

?

나는 그저 침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노아의 행동은 전부 꾸며낸 가짜 같았다. 그는 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웃어 줘.”

“웃어, 달라고?”

“응. 웃어 줘.”

“날 이 꼴로 만든 게 너인데 너한테 웃어 주라고? 도대체 너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대답을 원하고 질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아당겨 그의 뺨에 가져대 댔다. 따듯한 온기가 손을 통해 느껴졌다.

“좋아해.”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좋아한다면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으니까.

“좋아해서 그랬어. 누나를 바라볼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하기를 원해서.”

“이기적이네.”

“어쩔 수 없지.”

?

태어나기를 이렇게 추악하게 태어났으니까. 노아는 내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태어나기를 행복하고 깨끗하게 태어났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겠지.

“누나가 어렸을 때 읽어 준, 성녀 세티아께서 저술하신 성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어.”

“…….”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

진심을 다해 주신 렌다를 섬기고 사랑한다면 끝내 주신의 보살핌 아래 구원받으리라.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전에 그에게 읽어 준 성서의 내용이었다.

“누나는 내 신이나 마찬가지잖아. 내가 이렇게 누나를 섬기고 사랑할 테니, 진심을 다해 사랑할 테니까…….”

“난 신이 아니야.”

분명하게 노아의 말을 부정했으나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꿋꿋이 자신의 말을 이었다.

?

“날 구원해 줘, 사랑해 줘.”

나는 신이 아니다. 감히 누군가를 구원할 만큼 위대한 존재도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나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이가 내게 사랑해 달라고 빌고 있으니, 나는 도대체 무어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내보내 줘. 그럼 기꺼이 널 사랑해 줄 테니.”

물론 거짓말일 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게 옳은 말일 것이다. 이미 그를 미워하는 동시에 아끼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싫어.”

하지만 그것마저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노아의 얼굴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보였다. 내 손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누나가 웃는 모습이 좋아. 그치만 놔 주면 도망갈 거잖아. 다시는 날 보러 안 올 거잖아. 날 미워할 거잖아…….”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말은 너무 모순적이야.”

“나도 알아.”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적어도 나를 이런 곳에 처박아 두지는 말았어야지.”

노아는 내 말에 대해 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기 위해 세게 손을 잡아당기자 예상과 달리 그는 쉽게 내 손을 놓아 줬다.

나는 축 처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노아를 뒤로한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무런 목표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욕망이라고 해 봤자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

“안녕, 수녀님.”

“……아.”

“오랜만이네.”

살로스가 내 눈앞에서 살포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운 밤이었다. 꿈인가 싶어 팔을 내려다봤으나 손목이 아픈 것은 여전했다.

아니, 사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살로스가 만든 공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생생해서 어떤 감각이든 현실처럼 느껴지니까.

“꿈이야?”

너 때문에 비밀 속에 감춰져 있던 문을 열었다고 화낼 기력도 없었다. 간신히 고개만을 돌려 그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현실.”

힘을 잃었다고 주장하던 이전과는 달리 살로스의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힘을 되찾은 건가. 나는 빤히 그의 뿔들을 응시했다.

“내가 말했지. 부디 기대하라고.”

잠이 덜 깨 정신이 몽롱했다. 다른 것들은 제대로 인지할 수도 없었으나 살로스의 목소리만큼은 귀에 똑똑히 박혔다.

“조만간 수녀님을 삼켜 버릴 거라고 했잖아.”

“삼켜도 돼.”

“응? 뭐? 뭐라고?”

“삼켜도 된다고.”

무슨 반응을 기대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로스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네가 날 삼켜서 여기서 내보내 줄 수 있으면 기꺼이 허락해 줄게.”

“허락을 구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근데 그렇게 할 수 없으면.”

당장 꺼져. 내가 생각해도 감정 하나 깃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살로스는 멍하니 내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

“수녀님다운 말이네.”

그런가.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시작한 순간부터 쭉 서 있던 그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낮시간 내내 노아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의자였다.

“하나만 분명하게 말할게.”

“그러든가.”

“그냥 체념해. 다 체념하고, 나를 선택해.”

애초에 이 상황에 내게 선택권이 있기는 했나. 선택이라는 말을 듣자 헛웃음이 흘러나올 듯 입가가 간지러웠다.

“너를 선택하면 상황이 나아질까.”

“글쎄. 장담은 못 하겠는데.”

살로스는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몽마다운 곱상한 얼굴이 갑자기 성큼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감흥이 일지는 않았다.

“근데 적어도 여기보다는 낫겠지. 믿던 동생에게 이런 짓을 당하는 것보다는 말이야.”

“뻔뻔하네. 이런 상황을 조성한 건 너면서.”

“뭐, 칭찬으로 들을게.”

한 대 쥐어박을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로스를 노려보던 중, 열린 문 너머에서 낮게 깔린 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그의 손에는 투명한 유리컵이 들려 있었다. 자던 중 갈증이 일어 깬 모양이었다.

“그거, 뭐야?”

노아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살로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물음은 마치 살로스를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

아, 물론 인간이 아닌 건 맞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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