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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26화 (2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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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가 여전히 호흡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이는 살아 있었다. 스텔라는 작은 손으로 아이를 눕힌 후 물병에 담긴 물을 아이의 입에 가져다 댔다.

    의식이 없는 아이는 잠시 힘겨워했으나 이내 갈증에 미친 사람처럼 물을 마셨다. 스텔라는 아이가 물을 마시는 것을 보며 안도했다.

    노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날 밤에 봤던 금빛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왔다. 하지만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몸에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는 떠났고 아빠는 날 두고 오랫동안 잠만 자고 있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나를 부를 리가 없다.

    노아는 이 상황을 그저 꿈으로 치부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

    ***

    눈을 뜨니 노아는 푹신한 침대 위였다. 그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머리에 올려져 있던 축축한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아빠, 아빠는 어디 있지.

    그의 세상은 매우 좁았다. 그의 세상은 오두막과 숲뿐이었으며 아는 사람은 그의 부모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미는 그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남은 것은 아비뿐이었다.

    그런데 하나 남은 가족이 사라졌다. 비록 항상 그를 때리며 욕설을 퍼붓는 아비였으나 좁은 세상에 살던 노아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다.

    “아빠, 아빠…….”

    그는 어미를 부를 때처럼 애타게 아비를 불렀다. 눈물이 주륵 흘렀으나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침대 아래로 발을 뻗는 순간, 그는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요란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수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어린아이가 갑자기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노아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뚱이 탓에 무력감을 느꼈다.

    ?

    “어머, 도대체 무슨 일이니.”

    파열음을 듣고 달려온 한 여자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였다. 노아는 그녀의 도움을 받고 겨우 일어나면서도 아비를 애타게 불렀다.

    “아빠…….”

    어리석은 소년은 우는 방법을 몰랐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 슬픔인지도 몰랐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눈물인지도 몰랐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년인가.

    소년은 소매로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으며 오두막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것을 떠올렸다.

    별. 별을 봤던 것 같다.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던 금빛 별을 가까이에서 봤던 것 같은데.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것은 어미의 뒷모습과 쓰러져 있던 아비의 뒷모습뿐.

    “아빠…….”

    다시 한번 그가 애처롭게 아비를 부르자 여자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린아이에게 도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네 아버지께서 너를 이곳에 맡기고 가셨단다.”

    ?

    여자는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노아의 얼굴이 어떤 감정인지 모를 무언가로 물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절망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년은 슬퍼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그저 아비를 그리워하며 멀뚱히 앉아 있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노아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답하지 않았다. 오래전 어미가 그에게 지어 준 이름이 있기는 했으나 아무에게나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 별은 뭐였을까. 노아는 의문을 품은 채 고아원에 살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를 비슷한 또래들이 지내고 있는 방에 집어넣었다. 순한 아이들이니,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순한 아이들이라고? 노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절대 순수하게 착할 수 없다. 설사 착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은 더 높은 상대에 대한 복종일 뿐일 것이다.

    고아원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관리하는 수녀에게는 복종했으나 어눌한 노아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눌하게 말하는 노아를 깔보고 무시했으며 이따금 폭력도 행사했다.

    겨우 다섯 살밖에 먹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말이다.

    그곳에서 노아는 세상을 배웠다. 1년, 2년.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교활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여덟 살. 세상을 깨닫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여덟 살이 되자 왜 자신의 어미가 그렇게 다급하게 도망쳤는지, 왜 자신의 아비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별이었다. 분명 금빛 별이 그를 구했다. 그런데 그 별은 그를 구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별을 닮은 천사였나, 혹은 변장하고 나타난 악마였을까.

    ?

    그리고 그가 여덟 살이 됐을 때, 그는 마침내 별을 찾았다.

    ?

    “이씨, 내 베개 찢어 놓은 거 너지!”

    “아니, 나 아닌데.”

    ?

    노아는 앞에서 시비를 거는 대신 뒤에서 복수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허술했던 건지, 한 멍청한 놈이 그의 악행을 알아챘다.

    ?

    바실. 덩치가 크고 뚱뚱한 놈이었다.

    ?

    그는 노아를 고아원 건물 뒤로 부른 후 찢어진 베개를 그의 앞에 흔들며 추궁했다. 하지만 노아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부정했다.

    “너 맞잖아! 너 자꾸 거짓말하면 죽는다?”

    꽤 살벌한 협박이 들려왔는데도 노아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죽여 버린다는 말은 행동으로 실행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이 허세를 부리는 말일 뿐이었다.

    “왜 나라고 생각하는데?”

    “그야 당연히……!”

    놈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본 노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작게 웃었다.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은 미소였다.

    “네가 항상 나를 괴롭히니까 내가 복수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이 곧 정답이었다.

    놈은 힘으로 다른 아이들을 지배했다. 모든 또래 아이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며 복종했다.

    단 한 명, 노아를 제외하고는.

    “어디 보자, 네가 어제는 누구를 괴롭혔더라. 샐리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앤디의 모래성을 밟았네.”

    바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악행들에 대해 창피함을 느낀 건 아닐 테고, 그저 분노한 것이겠지.

    “네 무거운 머리를 매일 지탱하다 보니 베개가 혼자 찢어졌을 수도 있고, 앤디나 샐리나가 찢었을 수도 있지.”

    베개가 혼자 찢어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앤디나 샐리나는 그의 베개를 찢을 만큼 용감하지도 않았다.

    ?

    노아는 이왕이면 조용히 살려고 했다.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도 없고,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서 좋을 것도 없으니.

    하지만 바실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노아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뺏어 가서 찢어 버린다든가, 하는 유치하고 한심한 시비.

    “어떻게 할까. 수녀님께 가서 말씀드릴까? 네 베개가 찢어졌는데, 그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이익!”

    “그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도 같이 말씀드리면 되겠다. 그렇지?”

    노아는 눈꼬리를 휘며 예쁘게 웃었다. 미형의 외모를 가진 소년이 싱긋 웃는 것을 보면 모두 그를 따라 웃을 테다. 하지만 바실에게는 그저 악마의 미소로 보일 뿐이었다.

    ?

    “어떻게 할까, 바실?”

    노아는 마치 선택하라는 듯 물었다.

    “둘 중에 골라 봐. 지금 당장 수녀님께 가서 네가 아이들에게 한 짓을 말씀드릴까?”

    “…….”

    “아니면 빌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 봐.”

    떠나는 어미를 그리워하며 울던 소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꿈속에서 어미를 만나지도 않았으며 아비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순수하고 여리던 소년은 변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상황이 그를 변화시켰다.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이 위협적인 상황이 항상 그의 발밑에 있었으니, 변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바실은 어느새 이 상황이 두려운지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노아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려 웃었다.

    바실은 폭력적이었으나 열정적이었다. 또래 아이들 중 가장 열심히 주신 렌다를 섬기고 기도했다.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이렇게 게으르고 무자비하게 사는 주제에 신에게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다니.

    하지만 수년 전에는 노아도 그러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신을 향해, 별을 향해 기도했다.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소원 또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속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

    어디 한번 네 신에게 빌어 봐.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구원해 달라고. 아마 그 신은 네 멍청한 모습을 보며 즐겁게 웃고 있을 테니까.

    “멍청하긴.”

    노아는 한숨을 뱉는 짧은 말을 남긴 채로 뒤돌았다. 그러자 바실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야, 야! 어디 가!”

    “네 멍청한 짓들을 말씀드리러.”

    머저리의 멍청한 꼴을 보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는 끝까지 노아의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자존감만 높은 멍청이. 노아는 바실에 대해 그렇게 평가를 내렸다.

    노아는 이제 저 멍청한 것과는 엮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건물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이들을 관리하는 수녀에게 가 바실의 죄들을 일러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바실은 무언가 고민하며 입술을 세게 깨물더니,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바실이 노아에게 주먹을 휘두름과 동시에 그늘이 가득 드리운 음침한 곳에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나이에 비해 크고 무거운 주먹에 얼굴을 가격당하고도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노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시야에 들어온 푸른 하늘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보였고 머리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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