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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쇠사슬이 내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 따라온다.
그때 방을 연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당시에 계속해서 내게 속삭이던 살로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의 속삭임은 정말로 내게 선악과였던 것이다. 궁금증을 유발하여 결국 선악과를 베어 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이토록 비참하고 씁쓸하지 않은가.
나는 목도리를 두르듯 노아의 목을 따라 쇠사슬을 감았다. 내가 이 상태로 손목을 당긴다면, 그는 쇠사슬에 목이 졸려 삶의 끝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손이 덜덜 떨렸다.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뭐해, 당기지 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일어났는지, 노아는 어느새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 작은 손목에 철쇄를 채운 순간부터 계속 나를 죽이고 싶어 했잖아. 기회가 왔는데, 왜 죽이지 않아?”
나도 모르게 두 손목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알고 있었구나. 너를 향한 내 증오가 얼마나 큰지.
그는 내 손을 잡고 쇠사슬을 양쪽으로 당겼다. 쇠사슬이 팽팽해지며 노아의 목을 조르자,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누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누나.”
?
하지만 그는 가쁘게 숨을 쉬며 집요하게 나를 불렀다. 그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더 세게 당겨, 그리고 죽이는 거야.”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위기를 향해 달려가는 연극 속 상황에서나 들릴 것 같은 고요한 경보음이었다. 내 손목을 잡은 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지금 힘을 보탠다면 그는 확실히 죽을 것이다. 머리는 분명 내게 그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왜? 어째서?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여야 하는데, 죽이고 싶은데.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를.
노아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도 힘이 풀렸는지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선택의 나의 몫이었다. 쇠사슬을 졸라 그를 죽일지, 혹은…….
“…….”
?
손목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노아는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를 굴려 나를 응시했다.
“왜 안 죽여?”
?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이 쓰라린 감정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
“봐, 나를 죽이지 못하잖아.”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너무 미워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눈을 가려 버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
“누나는 나를 싫어하는구나.”
?
당연한 말이었다. 나는 얼굴을 손바닥에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좋아하잖아.”
?
인정하기 싫었다. 순간 그를 남자로서 좋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랑 따위와 같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었다.
?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려고 해도 감정이 깃든 기억, 즉 추억이라고 불리는 질척거리는 감정이 자꾸만 내 눈 앞을 가린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내 두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는다.
내가 사랑하며 아끼던 것은 오래전 만든 추억 속에 남아 있는 푸른 눈동자의 화사한 어린아이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 귀여운 어린아이인데. 나를 비참하게 만든 저 추악한 남자가 아니라.
하지만 자꾸 오래전의 그와 지금의 그가 겹쳐 보인다. 도저히, 내가 아끼던 그 아이를 죽일 수가 없었다.
노아가 힘없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뺨을 쥐며 속삭였다.
“그럼, 이왕이면 나를 좋아해 줘.”
그는 뻔뻔하게 내게 애원했다.
?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아, 그래. 이게 바로 애증이라는 감정이구나.
애증이란, 살로스가 내게 선사한 그 선악과보다도 훨씬 달콤하며 비참한 감정이었다.
***
때는 13년 전.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그들이 처음 만난 그 순간을 알 수 있었다.
?
노아는 13년 전, 즉 그가 다섯 살일 때 고아가 되어 고아원에 들어왔다.
?
아직 어리며 짧고 별것 없는 그의 지난 인생은 어떠하던가. 깊은 숲속에 위치한 초라한 오두막에서 매일 부모의 싸움을 보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
그의 아비는 도박에 빠져 살았으며 그의 어미는 술에 빠져 살았다. 어떻게 만나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악화되어 있었다.
?
“당신이 매일 술만 마시니까 애 꼴이 이따위잖아!”
“뭐? 네가 밖에 돈을 버리고 오는 건 생각도 안 해?”
또다시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노아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조금이라도 그 소리를 막아 보기 위해서.
?
그의 부모가 싸우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구석에 앉아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는 것뿐이었다. 어두운 하늘에 떠 있는 금빛 별이 그날따라 유난히 밝았다.
?
새벽이 될 때까지도 싸우는 소리는 멎지 않았다. 노아는 귀를 꾹 막고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면 이 소리도 멎을 것이다.
?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어느새 시끄럽던 집은 고요해져 있었다. 그들은 항상 아침이 되면 싸움을 멈추고 각자의 유흥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노아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시야에 급하게 가방에 무언가를 욱여넣는 그의 어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
“엄마……?”
그는 어눌하게 어미를 불렀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꾹 부여잡으며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
그리고 그녀는 그 길로 도망쳤다. 하나뿐인 제 아들을 오두막에 버려둔 채로.
?
그는 제 어미를 쫓아 달렸다.
엄마, 엄마. 작은 입으로 어미를 부르고 작은 손으로 낡은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어미는 낡은 옷 몇 벌과 소량의 돈을 가방에 욱여넣은 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노아는 바닥을 굴러 엉망이 된 모습으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것이 어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아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엄마…….”
?
그는 어렸음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어미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해가 나무 위에 걸릴 때까지 어미가 도망친 방향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해가 천천히 산 뒤로 모습을 숨길 때쯤, 그제야 그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그를 챙겨 주던 것은 그의 어미뿐이었다. 앞으로 무능한 아비와 살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하지만 어쩌겠는가.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가 그밖에 없는 것을. 노아는 제 아비를 찾기 위해 오두막 여기저기를 뒤졌다.
그가 부엌에 있는 작은 방문을 열었을 때 발견한 것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아비의 모습이었다.
?
노아는 그가 그저 잠을 자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깨우면 맞을 것이 분명하니 깨우지 않았다. 그냥 그가 일어날 때까지 구석에 앉아 기다렸다.
보살핌 없이 작은 오두막에서 거의 죽어 가던 노아를 발견한 것은 하늘의 별처럼 금빛으로 빛나는 금발을 가진 한 소녀였다.
?
“애니카, 여기 집이 있어!”
소녀와 그 친구는 고아였다. 둘은 몰래 고아원을 빠져 나와 탐험이라는 명목으로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데에 집이 있다고?”
스텔라의 뒤를 따르던 애니카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스텔라는 눈을 빛내며 손가락으로 오두막을 가리켰다.
“응, 저기.”
“진짜네.”
?
가 보자, 응? 스텔라는 애니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애니카는 못 이기는 척하며 그녀를 따라 오두막으로 향했다.
“이 집에 보물이 있을지도 몰라.”
“스텔라, 넌 동화를 너무 많이 읽었어.”
“하지만 필립이 그랬어. 숲속에는 원래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똑똑. 스텔라는 싱글 웃으며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주인이 없는 집인가 봐.”
“당연하지. 보물은 원래 주인이 없어야 하니까!”
그녀는 오두막이 버려졌으리라고 확신하며 문을 세게 밀었다. 열 살 소녀가 미는 힘에도 문은 쉽게 열렸다.
?
“계세요?”
“방금은 원래 보물에는 주인이 없는 법이라며.”
스텔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주인을 찾자 애니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스텔라는 무해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
오두막 내부는 엉망이었다. 깨진 접시들, 그리고 널브러진 옷가지들. 그러다가 그녀는 부엌에 있는 작은 방을 발견했다.
“저기에 보물이 있을 거야.”
“어휴, 그놈의 보물.”
애니카는 툴툴거리면서도 스텔라를 따라갔다. 스텔라는 보물을 기대하며 조심히 문을 열었고, 보물 대신 고약한 썩은 내가 그녀를 반겼다.
?
“욱!”
그녀는 구역질이 이는 것을 겨우 참으며 얼굴을 구겼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자의 시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주위에는 파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친구를 막은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에 들어오지 말고, 수도원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왜? 왜 그래?”
“빨리!”
?
순하던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애니카는 얼떨결에 으응, 하고 대답하며 오두막을 벗어나 나무 사이로 달렸다. 스텔라는 그녀가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녀는 작은 손으로 코를 막고 시신으로 다가갔다.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끔찍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꽤나 태연했다.
스텔라는 시신의 앞에 무릎 꿇고 시신을 위해 기도했다. 주신 렌다이시여, 부디 이 자를 영원한 안식으로 이끄소서.
그리고 기도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스텔라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아악!”
?
구석에 한 어린아이가 쭈그려 앉아 있는 것이었다.
?
어우, 깜짝이야. 스텔라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겨우 잠재우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
설마 이것도 시신인가. 스텔라는 다시 한번 기도를 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