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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24화 (2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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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

우리는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노아가 느린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항상 화사하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은 이제 겨울처럼 차갑게 나를 응시한다.

마침내 그가 내 바로 앞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굳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묻고 싶은 것들은 너무나도 많은데.

“누나.”

“…….”

“내가 열지 말라고 했잖아.”

“…….”

“왜 내 말 안 들었어, 응?”

그 내용은 전혀 따스하지 않았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금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나는 겨우 입을 열어 쥐어짜듯 질문을 던졌다.

“아니지……?”

내가 첫 번째로 한 것은 부정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이 틀렸기를 바라며, 부정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노아의 고개가 상하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잘못 본 것이겠지.

“제발, 노아.”

다음으로 내가 한 것은 애원이었다.

“제발. 그렇다고 대답하지 마. 네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

“돌이킬 수가 없게 되는 거잖아.”

애원하고 동시에 외면했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그가 고개를 젓고 부정하기를 바랐다.

그가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그 친근한 사이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내가 그를 증오할지도 모르니까.

?

“누나, 미안해.”

갑자기 노아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였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 용서해 줘…….”

미안하다고? 도대체 뭐가?

그는 무엇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내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이것도 네 가면이고 연극일까.

?

게다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가 정말로 너였다는 거구나.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아.”

나는 짧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뺨을 감쌌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한순간이지만 내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든 이 사람이.

“난 네 진심을 모르겠어.”

그렇게 뻔뻔하게 가면을 쓰고 나를 속였구나.

“네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다 거짓말 같아.”

“…….”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차라리 네가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면 이 관계가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 거짓말이었다고 말해 줘. 거짓말이었다고, 이건 다 꿈이라고.

“아니.”

하지만 희망은 완전히 부서졌다.

?

눈물이 맺혀 있던 슬픔 가득한 눈동자는 이미 날카롭게 변한 지 오래였다. 아, 역시 저 눈물마저도 거짓이었구나.

노아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완벽하게 착한 동생을 연기한 것이었다. 그래, 미안하다는 말도 연기였고.

“상관없어. 애초에 그딴 관계,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

“누나와 동생이라. 이게 얼마나 우스운 호칭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노아.”

“친누나도 아니면서 항상 내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따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런데 왜 네 목소리는 떨리고 있는 걸까. 내가 몸을 떨고 있듯이 노아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눈물이 흘러나온 탓에 말을 마치지 못했다.

어떻게 네가, 어떻게 네가 나한테.

구해 줘서 고맙다며 웃는 나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을 속였다는 생각을 하며 즐거워했을까.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 도대체 왜. 왜 그런 짓을 저질러서 감히 되돌릴 수도 없는 이런 비참한 기억을 내게 선물했나.

?

너는 내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을 겪었는지 이해할 수나 있을까. 매일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너를 걱정하며 버텼는데.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 사람이 바로 너인 줄은 모르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게 바로 너였다고?

이 상황이 꿈이기를 바랐다. 눈을 뜨면 평소의 친절한 노아가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꿈이기를 바랄 때는 언제나 현실이었다. 친절한 네가 현실이 아니라, 나를 속인 거짓말쟁이가 바로 진실이며 현실이고 네 본질이었다.

“내가 누나를 보내 줄 것 같아?”

“…….”

“아니, 절대 안 보내 줘.”

노아가 쓰게 웃으며 내 턱을 쥐었다.

어디인지 모를 곳이 미칠 듯이 쓰라렸다.

잘 모르겠다. 노아에게 잡힌 턱이 아픈 건지, 혹은 이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고 슬퍼서 마음이 쓰라린 건지.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던가.

?

그건 바로 나를 겨우 지탱하고 있던 지지대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

그 후 노아는 스텔라의 얇은 두 손목에 무거운 철쇄를 채웠다.

발목이 아닌, 두 손목에.

두 손목을 연결하는 쇠사슬은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사람의 목에 둘러도 한 바퀴는 족히 두를 수 있을 정도의 길이였다.

그렇다면 그가 의미도 없는 철쇄를 채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저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누나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해, 아무리 쇠사슬이 길어도 누나는 도망치지 못할 거야. 그는 철쇄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텔라도 그 숨겨진 의미를 이해했는지 그저 가만히 순응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변했다. 희망도, 꿈도 담겨 있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가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저 길거리에 흔히 굴러다니는 붉은색 돌 같았다.

눈에 담겨 있던 생기도 사라졌고 빛도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텔라는 테이블 앞에 앉아 앞에 놓인 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서 응시했다.

이전에 스텔라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보고 있던 컵이었다. 그때는 반짝거리는 예쁜 눈으로 보고 있었잖아. 왜 이제 그 예쁜 눈을 보여 주지를 않아?

?

노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원인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스텔라의 눈이 빛을 잃게 만든 것도, 그녀를 비참하게 만든 것도.

전부 그였다.

반 미리엄처럼 교활하게 행동하겠다고 했던가.

그래, 그는 교활하게 행동하기는 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여 사악하게 스텔라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시작은 반 미리엄처럼 사악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노아로서 그녀를 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했던 멍청하고도 교활한 계획이었다.

?

그렇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어떻게든 동아줄을 부여잡고 싶은 법이니.

설령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실제로 스텔라의 심장은 노아를 향해 빠르게 뛰었었다. 하지만 그가 암흑가의 주인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그 떨림은 완전히 멎고 말았다.

?

화사한 미소도, 떨리는 심장도, 부드러운 목소리도. 이제 아무것도 그를 향하지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넋이 나간 여인만이 그의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

기쁠 줄 알았다. 어떤 방법을 쓰든 스텔라가 자신의 곁에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떠한가. 텅 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뤘는데.

?

“누나.”

?

노아가 스텔라를 불렀으나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답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해 보였다.

그에 노아는 무릎 위에 올려진 스텔라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는 작고 하얀 손에 짧지만 깊게 입 맞췄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이 순간 절그럭거리는 쇠사슬을 바라보며 빛났다.

***

목이 따가워서 천천히 눈을 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았기에 목은 어서 물을 달라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작게 신음하며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자 듣기 싫은 갈라진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절그럭.

?

몸을 움직임에 따라 내 손목을 묶은 철쇄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함께 움직였다. 무겁고, 걸리적거렸다. 풀어 버리고 싶지만 풀리지 않았다.

맑은 창문을 통과해 석양이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는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칠흑 같은 어두운 머리통이 보인다.

노아는 의자에 앉은 채로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잠결에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철쇄 안쪽에는 백색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 철쇄를 풀기 위해 마구 몸부림을 쳤더니 손목에는 깊은 상처가 생겼다.

아마 잠든 사이에 그가 치료해 놓은 것일 테다. 철쇄 사이로 약의 씁쓸한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양쪽으로 철쇄를 당겼다. 여전히 철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손목을 연결하는 쇠사슬의 길이는 꽤나 길었는데, 사람의 목을 조르기에도 충분할 정도였다.

나는 차갑고 소름 끼치는 쇠사슬을 빤히 쳐다봤다.

최근 5년 동안 항상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어쩌다 나한테 이런 상황이 벌어졌지, 어쩌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사실 아직도 나는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노아는 그저 순수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던가. 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짓을.

?

다시 내 시선이 쇠사슬을 향했다.

?

쇠사슬의 길이는 사람의 목도 조를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이번에는 내 시선이 노아를 향했다.

밉다. 네가 참 미워.

?

착한 얼굴을 하며 나를 향해 웃었으면서 속으로는 나를 기만하고 농락하던 네가, 너무나도 밉다. 너는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알까.

?

아니, 모르겠지. 애초에 내 마음을 알았으면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테니까.

사탕을 주며 나를 걱정하던 과거의 네가 그립고 꽃을 선물하며 예쁘지 않냐고 환하게 웃던 오래전 그날의 네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과거의 모습은 이제 현재의 네 악행 뒤에 숨어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제 과거는 그저 추억할 수밖에 없는 거짓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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