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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세요, 아가씨-23화 (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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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설마 빨리 나가라고 눈치 주는 건가.

?

“……그게.”

“그게?”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곧 나가야지. 공작 놈, 아니. 공작님한테서 받았던 보석은 잃어버렸으니까 돈을 벌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도망칠 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알베르트가 선물했던 보석들도 몇 개 가지고 나왔었는데, 되팔면 비싼 것들이라 남자가 가지고 간 모양이었다. 노아는 내 옆에 보석 같은 귀중품은 놓여 있지 않았다고 답했다.

?

귀찮게도, 다시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몸뚱이 하나만 먹여 살리면 되니 단순한 노동도 괜찮았다.

?

그래도 역시 수도원이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청소와 기도만 하면 밥이 나오는 생활이라니. 알베르트만 없었어도 나는 아직 수도원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드니, 노아가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안 가면 안 돼?”

“엥?”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지 마. 나랑 같이 살자. 나 누나랑 같이 살고 싶어. 여기에서 살면 안 돼?”

노아가 말꼬리를 늘이며 내 손을 맞잡았다. 마치 어렸을 때의 그를 보는 것 같았다. 오래전 내게 꽃을 선물하며 방긋 웃던 귀여운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의외다. 노아가 한 말의 의도가 저런 것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네가 나가라고 재촉하는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너는 수도원에서 살던 거 아니었어?”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

“여기 있을 거야?”

나는 쉽게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노아와 함께 있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망설이는 거지.

순간 부엌에 위치한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문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집요하게 문을 응시했다.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있길래 굳게 문을 봉하고 그 안의 내용물마저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는 걸까.

“누나?”

노아가 재촉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대답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래, 망설여서 뭐해.

“그러자, 우리 동생.”

내가 말했으면서도 동생이라는 단어가 신기해 몇 번 되뇌었다. 동생이라고 부르니 마치 5년 전의 귀엽던 그가 떠올랐다. 의도치 않게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노아는 그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정말 그냥 동생이야? 그게 다야?”

그는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의 표정을 미처 살피지 못하고 가볍게 답했다.

“아, 그럼 우리 착한 동생.”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아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노아?”

“…….”

“왜 그래?”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 중에 불쾌한 말이 섞여 있었나, 생각해 봤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슬슬 이 분위기가 불편해졌기에 나는 노아의 소매를 약하게 잡았다.

그러자 노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

“사랑스러운 동생 정도는 돼야지. 서운하네.”

그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다. 아, 역시 장난이었구나. 그제야 나도 편하게 웃으며 노아를 향해 우리 사랑스러운 동생, 하고 불렀다.

그렇게 오늘도 노아와 함께 썩 나쁘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아니,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운 하루였다.

?

꿈에서 살로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지.

“안녕, 수녀님. 오랜만이네.”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 살로스가 은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며 내게 인사했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

그는 왜인지 며칠 전보다 기세등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확 머리를 다 뽑아 버릴까…….”

그러나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살로스가 급하게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호하듯 가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수녀님 너무해.”

“싫으면 꺼져.”

“수녀님,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 나름 진지하게 말했는데 농담으로 치부 당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수녀님은 궁금하지 않아? 저 방에 뭐가 있는지.”

살로스의 손가락은 부엌에 딸린 방을 향하고 있었다.

“과연 그 꼬맹이가 저 방에 뭘 숨겨 놨을까? 대체 뭐가 들어 있길래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까.”

“별로 안 궁금한데.”

내가 단호하게 답하자 살로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큭큭, 웃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부추기지 않았다. 대신, 내 목덜미를 잡더니 혀를 내어 내 목을 핥기 시작했다.

갑자기 물컹한 것이 목에 닿자 나는 반사적으로 살로스를 밀쳤다. 그는 힘을 잃었으니 쉽게 밀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

?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치아로 내 목을 약하게 깨물었다.

“열어 보자.”

그는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속삭였다.

“이전부터 궁금해 했잖아. 열어 보고 싶잖아.”

그는 마치 뱀처럼 선악과를 삼키라고 나를 유혹했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몽롱해졌다. 그러니까, 살로스가 내 목덜미를 물었을 때부터.

살로스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기듯 기대어 비밀이 가득한 방을 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노아가 열지 말라고 했는데. 약속까지 했는데.

분명 머리는 이러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몸이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나무문 앞에 서 있었다.

?

“자, 여는 거야.”

살로스는 내게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의 손안에 내 손을 쥔 채로 내가 문고리를 잡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헉.”

?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까지 나를 부추기던 살로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

대신,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노아가 보였다.

“침대 가서 편하게 자라니까 또…….”

그는 자꾸만 의자에 앉아 자곤 했다. 침대를 양보해 주겠다고 말해 보기도 했으나, 노아는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에게 이불이라도 덮어 주려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절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

노아의 주머니에서 흘러내린 것은 갖가지 열쇠들이 모여 있는 열쇠 꾸러미였다.

[열어 보자.]

순간 살로스가 속삭였던 말이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여는 거야.’

속삭임은 점점 커져 이제는 울림이 되었다. 목소리는 내게 명령하고 있었다. 굳게 닫힌 저 문을 열라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노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열쇠를 손에 쥐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방을 향해 걸을 때마다 초조해졌다. 금방이라도 노아가 잠에서 깨어나 나를 향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길지 않은 거리를 걸어 마침내 문 앞에 당도했다.

떨리는 손이 열쇠를 잡는다. 그중 가장 밝고 화려하게 생긴 열쇠. 나는 그 열쇠를 선택해 문의 열쇠 구멍에 꽂았다.

그 열쇠가 바로 정답이었는지 문은 바로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쉽게 열렸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 들어가지 않기로 노아와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내 몸을 억누르던 강압적인 기운이 사라졌다.

이곳까지 걸어오는 내내 의지가 돌아오면 이 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침대로 돌아가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방안에 들어오니 호기심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방안은 박물관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오래되어 변색된 지도나 나침반, 혹은 특이한 모양의 시계들.

왜 노아가 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방은 딱 봐도 귀해 보이는 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으로 건들지만 않으면 구경은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조심히 유물들에게 다가갔다.

“와아…….”

?

탄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래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먼지 한 톨 쌓이지 않고 깨끗하게 관리된 상태였다.

?

황족이나 착용할 법한 커다란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봤을 때는 정말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마침내 목걸이를 전부 구경하고, 한 걸음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

다음은 비싸 보이는 진열대에 올려져 있는 붉은 보석이었다.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거기서 뭐해?”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미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노아가 있었다. 그는 문에 기댄 채로 팔을 뻗어 출구를 가로막았다.

마치 누군가의 탈출을 막으려는 것처럼.

“아, 미안해. 내가 들어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

나는 횡설수설 변명했다. 노아는 빙긋 웃으며 내 변명을 들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본 붉은 보석, 그 아래에 무슨 문양이 그려져 있던 것 같은데.

나는 눈동자를 굴려 힐끗 보석을 바라봤다. 보석의 밑부분에는 얇은 황금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작게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독수리. 그것은 알베르트의 가문인 모니카 공작가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저 독수리 문양은 모니카 공작가의 마차에도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씹었다.

독수리 문양 자체는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모니카 공작가를 제외하고도 독수리를 가문의 문양으로 사용하는 귀족 가문들은 많으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독수리 문양이 그 자체가 아니라, 저 익숙한 붉은 보석에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저 보석은 내가 코르넬을 속이고 도망칠 때 비상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챙긴 것이었다. 전부 챙기면 의심받을까 봐 알베르트가 선물한 보석 중 가장 비싸 보이는 보석만 챙긴 거였는데.

그러나 노아가 말하기를, 그가 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 주변에 보석 같은 귀중품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남자가 가져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 보석이 이곳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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